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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불필요한 대화 (1) (108/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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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불필요한 대화 (1)

“대화하고 싶다······ 그 대화가 대체 뭐지?”

여인이 그 상황에서 침착하게 유선에게 물었다. 대충 그가 어떤 것을 물으려고 자신에게 왔는지 알았다.

“당신이 타깃으로 잡은 것들. 그것에 관해서 얘기하죠.”

역시나 여인은 입으로 중얼거렸지만, 그것은 내뱉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죽이고 싶은 것은 에고르트야. 너희가 싫어하는 악마 중 하나야. 그것뿐인데도 나를 막아서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이유야 있었다. 그녀가 남겨 놓은 기억의 파편이 없었다면, 단순히 포어셰크의 복수를 위한 목적뿐이니, 처음부터 이 추격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목적이라면 그녀가 에고르트를 죽이고 나서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에고르트가 죽는다는 건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다음 대상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러는 것입니다.”

“······.”

하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기에, 유선은 그녀의 뒤를 밟는 것을 선택했다. 유선이 무엇을 보고 따라왔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여인은 놀란 눈치로 유선을 보았다.

어떻게 알아냈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에서 꺼내기 싫었다. 그렇게 홀로 생각하면서 그녀의 생각은 깊어졌다. 그것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무언가는 깨달았다.

그녀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유선을 쳐다보았다.

“역시 당신을 만난 순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유선에게서 느낀 감정. 그것은 호의를 느꼈다고 착각했다. 그녀는 이렇게 위험한 유선을 그저 경계할 뿐이었다는 걸 호의로 여겼다.

그런 착각에 여인은 뭔가 풀린 것처럼 개운한 얼굴이었다. 찝찝한 문제가 사라진 여인이 다시 무표정해진 채로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나를 잡았다?”

여인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

“틀렸어. 나를 잡으려 했다면, 그 생각을 했을 거면 좀 더 빨리했어야 했어. 아니, 그래도 어차피 헛수고임을 알겠지만.”

말하는 어투가 궁지에 몰린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전혀 난감한 게 없다는 듯 말했다.

“도망갈 곳은 없어. 그리고 네가 싸운다고 해서 우리를 이길 방법도 없고.”

오르넵토스가 제 주제도 모르고 헛소리하는 여인에게 그렇게 말하자.

“어리석은 생각이야. 정령왕.”

“뭐야, 너 나 알아?”

놀란 듯한 얼굴로 보는 오르넵토스. 그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도 더는 묻지 못했다.

‘뭐지?’

‘저 여자가 왜 이렇게 커 보여?’

존재감. 압도적인 존재감이 그들을 일순간 짓누르며 의식하지 못하게 입을 막았다.

일반적으로 사냥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적절하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것이 생명이었다. 그렇기에 감지 능력에 최대한 피하며, 기습에 최적화한 모습으로 적응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했을 거면 좀 더 빨리했어야 했어. 아니, 그래도 어차피 헛수고임을 알겠지만.”

하지만 이 여인은 그 반대였다. 또렷하게 자신을 보였다. 푸른 도화지 위에 찍힌 붉은 점처럼 선명하고, 눈을 감아도 그녀가 보이고, 느끼게 했다.

“어차피 내 목적은 당신들이 이쪽까지 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 아무것도 아니야.”

마치 일부러 자신이 왔음을 알리는 듯한 행동이었다. 이 숲속 전체에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그녀를 쫓는 이들이 자신을 찾도록 아주 또렷하게.

그리고 그녀의 의도대로 돌아갔다.

세네타는 더는 그 여인을 볼 수가 없었다. 수십, 수백 구가 족히 넘는 호문쿨루스들이 순식간에 주위를 에워쌌다.

그것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라아아아아아!

-그라아!

하늘에서 언데드 드래곤의 포효성이 울렸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저마다 소리를 터트리는 것이 한두 마리 수준이 아니었다.

“내가 에고르트를 처리하는 동안, 그 녀석들의 자식들과 싸워 주길 바랄게.”

그리고 호문쿨루스들의 틈으로 도망쳤다.

유선은 표정 없는 인형들 사이로 들어가 자신의 몸을 감추는 것을 보고 섣부르게 그녀를 잡으려 움직이고 말았다.

팅!

유선의 귓가에 들리는 검이 튕기는 소리. 유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자신의 머리를 향해 단검이 날아온다는 것과 그것을 세네타가 간신히 막아 주었음을 알았다.

“조심하세요, 오빠.”

“고마워.”

호문쿨루스들은 더는 그 여인을 쫓으려 들지 않았다. 그것들이 더는 타깃이 아니라는 듯이 굴었다.

그들의 본 목적은 에고르트가 만들어 낸 피조물을 회수하는 것. 그녀가 제 발로 돌아오는 것은 목적과 같기에 그녀를 막으려 들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에고르트의 사정을 알 수 없기에, 그 광경이 기묘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어찌 됐든, 눈에 보이는 것처럼 호문쿨루스들의 적은 오로지 유선과 그 무리뿐이었다.

‘도대체 이 많은 것이 어디서 나왔지?’

이제는 깔짝거리며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총 병력이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진에 가까워졌다는 소리구나.’

그렇다는 말은 그 여인이 했던 말처럼 좀 더 빨리 생각했어야 했다. 유선은 그저 그녀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검은 머리의 여인은 결국 에고르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 에고르트라는 악마와 싸울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타깃을 잡고, 무슨 일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계약자.”

난감해하는 유선에게 말을 건 것은 오르넵토스였다. 그녀는 서서히 좁혀져 오는 호문쿨루스들을 보며 유선에게 말했다.

“내가 길을 열어 줄게. 세네타랑 함께 쫓으면 충분히 가지?”

“쫓으라면······ 분명히 가능할 거야.”

유선은 자신의 능력 내임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선이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오르넵토스, 너 혼자서 이것들을 상대할 생각이야?”

“혼자서는 힘들어. 그러니까 엘레노어도 같이 남아서 상대할 거야.”

그 말에 엘레노어를 보았다. 엘레노어는 전투에 참여할 준비가 만반인 표정이었다.

유선의 생각은 처음에는 함께 호문쿨루스와 언데드 군단을 처리하고 가는 것이었다.

“지금은 돌아서 갈 때가 아니야, 계약자.”

하지만 오르넵토스의 단호한 눈을 보자, 그러는 생각도 싹 사라지고 말았다.

오르넵토스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 그 여인이 우선이었다. 에고르트를 멋대로 죽이고, 사라진다면 어떤 재앙으로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유선은 오르넵토스에게 이런 말밖에 하지 못했다.

“충분해?”

“당연하지. 엘레노어랑 같이 있으면 계약자의 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 내가 애 같다고만 생각하지 마. 나는 한때 왕이었던 몸,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던 존재야.”

오르넵토스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철없이 굴어도 정령들의 왕이었다. 그리고 유선의 힘과 비교하면 하찮은 미물 따위밖에 되지 않았다.

“너희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가야 할 때야. 기회가 잡혔을 때 얼른 가.”

오르넵토스의 확고한 말에, 유선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서 이 자리를 빨리 뜨는 것이 도움임을 알기에, 유선은 등을 돌린 오르넵토스를 보다가 세네타와 함께 여인의 뒤를 쫓았다.

호문쿨루스들이 유선을 호락호락 내보내 주려 하지 않았다.

“너희 상대는 그쪽이 아냐.”

하지만 보내지 않는다면 어쩌겠는가! 유선의 뒤에는 오르넵토스가 있었다. 그녀는 마법에 능숙했고, 그들을 쫓지 못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숲속에 거대한 불기둥이 세워지며 그들이 지나가는 길을 막았다. 그 불기둥을 무시하고 뛰어드는 호문쿨루스들은 그 불길에 휘말려 그대로 터져 버렸기에 더는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유선 님!”

그때, 엘레노어가 소리쳤다.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양손을 번쩍 든 채로 말했다.

“슈퍼맨!”

슈퍼맨. 그 울림이 얼마나 청아한지,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유선은 엘레노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엘레노어의 미소가 유선의 발걸음을 오히려 재촉했기 때문이다. 세네타와 유선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엘레노어는 다시 몸을 돌렸다.

“자, 이제 일하자.”

오르넵토스가 엘레노어에게 말했다.

“이것 또한 우리의 일. 지키지 못한 세상의 순환을 다시 바로잡아 보자.”

“응!”

오르넵토스가 바닥을 향해 뿌리를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이루던 입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라졌다. 그것은 소멸이란 의미는 아니었다. 호문쿨루스들의 감각 범위 속에서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작아져 퍼졌다. 땅과 나무, 그리고 그들의 눈을 피해 숨은 뿌리들.

그렇기에 그 사라짐은 동시에 가장 크게 몸을 부푼 것과 다름없었다.

쿠궁!

피뷰뷰뷰뷱!

수많은 나무 가시가 땅속에서 돋아나, 호문쿨루스의 몸을 찔렀다. 일부 호문쿨루스들은 땅에서 떨어지며 그 공격을 피해 냈지만, 앞에 선 호문쿨루스들은 그대로 찢긴 풍선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너희가 밟는 땅은 더는 너희의 것이 아니다.

자연의 어머니의 경고. 더는 대지를 밟으면 안 된다는 경고에 나무 위로 올라가 그 가시 뿌리들을 피해 냈다.

하지만 그렇게 피한 호문쿨루스들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우그그그극!

나무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만 개 잎을 단 가지가 팔이 되어 자신의 몸에 올라탄 호문쿨루스들을 응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나무들도 너희의 영역이 아니다.

꼼짝없이 잡힌 채로 오르넵토스가 다시 풍선 형태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말했다. 오르넵토스는 자연과 하나. 자연이 곧 그녀의 상태이며, 그 일대를 완전히 지배했다.

-너희가 설 곳은 이 땅에는 없으니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라!

그렇게 천 명이 넘는 호문쿨루스와 싸움을 시작했다. 그것의 한계라면 그녀의 말대로 지상에 발이 닿는 것들뿐이라는 점이었다. 하늘을 누비며 썩은 내를 풍기는 언데드 드래곤에게 무언가를 할 만큼,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죽음을 안겨 주자, 동포들이여!

-지상을 썩히고, 주인님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여라.

호문쿨루스들이 고전하는 것을 보며, 그들은 나무들을 모두 썩혀 버리려고 자신의 몸에 깃든 독을 내뿜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단순히 생각일 뿐,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크롸아아아!

하얀 비늘을 지닌 드래곤이 숲속에서 나타나 그들 중 하나의 목덜미를 물며 하늘 위로 올라갔다.

우두둑!

단 일격에 질긴 목을 끊어 내며 언데드 드래곤을 추락시켰다. 그들은 자신의 적이 있음을 알고 그것에 집중했다.

-우리 동포들을 죽인 녀석이다.

-저 붉은 피를 타락시켜 하나가 되게 해라.

정신을 공유 중인 언데드 드래곤은 의문의 하얀 비늘 드래곤에 대해서 알았다. 그렇기에 그 독 브레스를 뿜기보다 그를 먼저 제압해야 함을 알았다.

지상에 위는 오르넵토스, 그리고 하늘 아래에는 엘레노어가 주도권을 잡으며 에고르트의 자식들에 맞섰다.

입자의 오르넵토스가 엘레노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하겠지?

엘레노어는 대답했다.

-응!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뭔가 두려움에 갈팡질팡하던 소녀의 얼굴이 없었다. 가장 걱정은 엘레노어가 유선을 향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푸른 눈동자에는 성숙해 가는 빛깔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용감한 표정으로 그들 앞에 서며 말했다.

-무섭지 않아!

크롸아아아아!

거대한 싸움을 알리는 포효가 울리며 수많은 언데드 드래곤과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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