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52. 원정 (3) 유선은 억지로 깨어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세네타를 보았다. 중간에 신경 쓰여 일어났는데, 세네타가 보이지 않자, 그녀를 찾으러 흔적을 따라 이동한 결과였다. “여기서 뭐 해?” “그게 적과 조우해서 제가······.” “적? 어디에?” 유선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세네타를 닮은 검은 여인과 교전하던 곳조차 누군가가 다녀간 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끔했다. 세네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여인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기에 유선은 그 적을 제대로 짐작하지 못했다. “적이라면 어떤 적이었어? 호문쿨루스들? 그 녀석들이 우리 위치를 알아차린 것 같아?” 유선은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캠핑 장소를 옮겨서 잠을 자야 했기 때문이다. 세네타는 여인이 말없이 사라진 그 자리를 보면서 유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나중에 얘기해 드려도 되겠죠?” “그래, 그렇게 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얼른 돌아가서 자자. 내일 다시 정신없이 쫓을 텐데 말이야.” 유선은 빙긋 웃으며 세네타의 등을 토닥여 주었고, 세네타는 더는 말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유선은 혹시나 뭔가 남겨진 게 없나 싶어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한 번 더 확인해 보았다. “응?” 그때, 유선은 뭔가를 발견해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원통형으로 생긴 플라스틱 물통이었다. 유선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이건 그 여자한테 주었던 물통이네······.” 무더운 사막에서 쓰러진 그 여인을 구하려고 놔두고 온 물통. 계속 몸에 지닌 게 티가 날 정도로 손때와 물때가 많이 묻었다. “몸에 계속 지녔구나.” 유선은 그 물통을 비우고서 버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가웠다. 유선은 그 물통을 들고 캠핑 장소로 돌아갔다.
***
여인은 유선이 등장하던 그때, 재빠른 발놀림으로 그 시야 속에서 사라졌다. 유선이 눈치챌 수 없는 장소로 멀찍이 떨어진 채로 유선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물통을 회수해 돌아가는 것까지 보고는 중얼거렸다. “······갔군.” 여인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한숨지었음을 알았다. 안도했다. 무엇을? 그 물통을 돌려주었다는 것을 안심이라도 하나? 혼란이 왔다. 그 호의에 대한 보답이라도 한 것이 그렇게 안심할 만한 일이었던가! ‘생각하지 말자.’ 여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서는 안 됨을 알았다. 그녀는 잡념을 버리려고, 세네타를 보면서 자신의 가슴이 두근거린 것을 다시 떠올렸다. “단순한 고동이 아님이 확실하네.” 그 울림. 미약하게나마 떨리는 그 감각은 지금 자신의 몸을 이루는 이 피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어째서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에고르트, 그다음 타깃은 세네타······라는 여자.” 그렇게 생각을 정립하고 다시 유선과 거리 격차를 벌리려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
그들은 앞이 어느 정도 보이는 새벽에 모두 일어나 배를 채우고 출발을 준비했다. 헌터들이 먹는 건식이었다. 열량과 활동량을 고려해서 만든 것인 만큼, 양은 생각보다 많은 편인 음식이었다. 헌터 초창기 시절에 먹은 이후로는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유선 님, 나면 먹고 싶어.” “평소에 가는 소풍이랑 조금 달라서 라면은 못 챙겨 왔어.” “부으······.” 라면도 휴대성이 좋지만, 먹는 방법까지 고려하면 아무래도 건식 쪽이 더 휴대성이 간편했다. 엘레노어에게 맞춰 주고는 싶었지만, 이 원정에서는 그래 줄 수가 없어서, 유선은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출발하려 했다. 오르넵토스가 물을 마시다 뭔가를 느끼고 유선에게 말했다. “계약자, 호문쿨루스가 와.” 숲속에서만큼은 오르넵토스의 감지력을 뛰어넘는 자가 없었다. 유선은 건식을 우물거리다 아쉽다는 듯이 건식 봉투를 내려놓았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저 녀석들은 자비가 없구먼.” “계약자 말이 썩 틀리진 않은 것 같아.” “엥?” 그냥 해 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오르넵토스. 그러자 세네타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 호문쿨루스들이 우리를 건드리러 온 것 같지는 않아요. 무기도 없고, 한 명뿐이에요.” “그래?” 그런 적은 숫자로 잡으려 할 리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를 전하러 온 것이 가장 들어맞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그냥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다른 어떤 호문쿨루스들과 다를 게 없는 개성이 죽은 형태의 사내와 얼굴을 마주했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그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유선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낯선 이방자여! 우선 저를 이렇게 몸이 성한 채로 오게 하여 주셔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 예상치 못한 정중함이었다. 그렇지만 유선은 그에 똑같이 정중하게 말할 수 없었다. 계속 적으로 있던 처지인 데다 상대는 어디까지나 수많은 호문쿨루스 중 하나였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곳까지 왔는지 들어 보지.” 그의 말에 호문쿨루스는 정중하게 무릎을 꿇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주인님은 당신들이 그 물건을 쫓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방해하지 말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협박의 서신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우리는 그 물건을 회수하는 데 힘을 보태 드리겠다고 제안합니다.” “······.” 유선은 에고르트 쪽에서 그런 말을 하려고 호문쿨루스를 보낸 것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그쪽이 그 물건을 쫓는 이유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당신들에게도 곧 위협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맞았다. 유선은 위협일 수 있었기에 그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녀를 쫓았다. “그 물건의 목적은 당신들 이전에 곧 주인님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결손품이 세상에 나와 어지럽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구먼.” 유선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유선의 반응에 말을 전하러 온 남자가 물었다. “우리가 협력해 드리는 것에 응하실 겁니까?” 유선은 그 물음에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아니.” 거절이었다. 모든 말을 전한 호문쿨루스는 고개를 들어 유선에게 물었다. “어째서인지 이유를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유선은 그것도 순순하게 답해 주었다. “수상쩍기 짝이 없으니까. 만약 그 전언에 우리를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함께 했다면, 그나마 믿었을 거야.” 루데릭도 수상쩍은 협력을 요청할 때 맹세했다. 하지만 에고르트가 순수한 의도를 품지 않았기에 그 요청에는 맹세를 넣지 않았다. 악마 중 하나였기에 언제 배신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 하러 올 거라면 본인이 직접 와서 했어야지. 너를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오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이 악의인지 선의인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유선에게는 본인과 마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호문쿨루스는 유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주인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호문쿨루스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떠나나 싶었는데,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푸슈슉! 그리고 다른 호문쿨루스들의 죽음과 똑같이 가죽과 코어만 남긴 채로 사라졌다. 말을 전하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기에, 분명히 어떤 형식으로든 그 생각이 전해지리라는 건 확실했다. “빨리 찾아야겠네.” 에고르트의 손에 잡히기 전, 아니 에고르트에게 먼저 도착하기 전에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 그 전언을 들은 유선의 머릿속에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동굴 속. 스슥. 스스스슥. 실이 부딪치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실을 얽어매는 데는 많은 팔이 움직였다. 자신의 몸을 개조해서 만들어 낸 수백 개의 팔. 그 팔들이 실을 꿰는 바늘과 핀셋, 그리고 가위를 집은 채로 살을 엮었다.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은 사람의 형태와 유사했다. 개성이 없는 그저 사람과 닮은 탈이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로만 만족할 형태. 영혼도 없이 그저 자신을 따르는 인형일 뿐이다. 에고르트는 그 인형을 집어던졌다. 그 집어던진 방향에는 다른 호문쿨루스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인형을 잡았다. 그리고 코어를 안에 집어넣으면서 그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거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렇게 만들어 낸 인형 수만 수백 구가 넘었다. 제작할 때마다 시간은 달랐지만, 평균적으로 양산형으로 생긴 것들은 1분마다 하나씩 만들어 냈으며, 자신의 걸작과 비슷하게 모방해 낸 물건들은 20분을 넘기다가 양산형으로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 “아직도······. 아직도······ 오지 않았는가!” 에고르트는 쉰 목소리와 다르게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면목 없습니다.” 그 호문쿨루스 중 하나가 고개 숙이며 대표로 말했다. 에고르트는 그런 말을 뻔뻔하게 내뱉는 호문쿨루스를 마음 같아선 찢어 버리고 싶었다. “쫓는 그 걸작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희생당한 우리 형제들의 기억들이 우리를 성장시켰고, 우리는 그 여인을 잡으려고 다시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수백 구의 시체를 통해서 얻은 기억이 그 인형들의 전투를 더욱 강력하게 해 주었다. 에고르트는 그 소리를 듣고 재빠르게 반응했다. 그 보고를 하는 호문쿨루스의 머리를 향해 수백 개 팔이 뻗어 나갔다. “그럼······ 이것도······ 기억하여라.” 에고르트는 더는 참지 못했다. 그 어리석은 주둥이를 향해 수많은 메스와 가위를 찔러 넣어 그 형태를 잃어버리게 했다. “너희가 강해지는 시간 동안 그 여자는 더욱 빠르게 성장해 너희 위에 서 있을 것이라고 말이야.” 걸작으로 인정한 것이 단순히 미형체여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거야, 에고르트의 손으로는 얼마든지 만들었다. 그녀가 전투에 대한 학습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에고르트는 그녀를 만들면서 확신했기 때문이다. 에고르트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만들든 간에, 그 걸작을 뛰어넘을, 그녀를 이길 작품은 더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너희의 그 무능함 덕분에······ 나는 확신했다.” 에고르트는 새로운 인형을 만들어 사내들이 있는 곳으로 던졌다. “그 아이는······ 스스로 온다.” 제 발로 이 동굴이 있는 곳으로 다시 걸어오는 것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그리고 내게······ 반기를 들 테지.” 그리고 자신의 몸속에 있는 수천 자루 검으로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그것은 예정된 수순. 그렇기에 더는 그 여자를 잡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를 잡는 시늉을 하는 아이들을 보내는 것 이외에 지금 제작하는 것들은 그 걸작을 잡으려고 만들어 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정령왕과 수상한 아이. 그들이 그 걸작을 쫓는다는 것을 알고서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녀는 에고르트, 자신을 찾아올 것이고, 그런다면 정령왕과 그들 또한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인형······ 그 망할 인형들은······ 이제 몇 개냐?” 그러자 다른 인형이 나와서 대답했다. “이제 자그마치 1천하고 282구가 있습니다. 대규모 병력으로 무기도 하나씩 쥐면 딱 맞는 숫자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더는 숫자를 늘려 봐야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정령왕과 그 수상한 아이에게 단숨에 죽는다면, 인간 형태로 된 것들 그 어떤 것을 만들어도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만에······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 봐야겠군.” 재료와 형태는 모두 구상해 놓았다. 그 물건은 이 넓은 동굴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물건이었기에, 이 안에서는 만들 수가 없었다. 에고르트는 그 물건을 만들려고 거북이 같은 자신의 몸을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 107
53. 언데드 드래곤 (1)
“이번이 열 번째네, 이게 찢겨 나간 건 겨우 6시간 전이야.”
혀를 쯧 하고 차는 오르넵토스. 그녀의 말대로 지금 이게 열 번째였다. 난잡하고, 정신없는 숲속에서 물을 묻힌 휴지 조각처럼 찢겨 나간 가죽이 널브러졌다.
유선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진짜 이건 내가 다른 곳에 왔다고 믿고 싶다.”
유선은 차라리 시간과 공간이 얽혀서 쫓는다고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믿고 싶었다. 그녀의 흔적이 며칠 전에 있었고, 유선은 시간이 얽힌 곳에서 빙빙 돈다고 여기고 싶었다.
흔적만 찾고, 쫓는 꼴이 이런 깊은 숲이라면 방향 감각을 상실해 전혀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쫓아도, 쫓아도 쫓는 게 아니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세네타가 밤에 그녀와 접촉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았다. 유선은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유선과 세네타, 그리고 그의 사역수를 시차를 두고 이끌었다.
“함정으로 인도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오르넵토스가 조심스럽게 추측하며 유선에게 말했다.
“뭔가 악의를 품는 게 아닐까? 계약자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잖아.”
“그건······ 아냐.”
유선은 오르넵토스의 추측에 자신한다는 듯이 그녀에게 그런 의도가 있지 않음을 알았다.
함정으로 떠나보내려고 하기엔 너무나도 확고한 신념이었다. 깊숙하게 파고들어 그녀의 정체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선은 그녀가 악의를 품고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건······ 아닐 거야.”
하지만 그것도 예전의 일이었다. 유선이 불안감을 버릴 수 없는 것은 그 시체들의 훼손 상태였다.
감정의 격앙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력이 점점 늘어남과 동시에 그 실력에 주체하지 못하고 잔혹하게 인형을 도륙했다.
그것은 포악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악의가 없더라도, 그 의도를 순순히 따라 주는 게 점점 위험해져 가는 것만 같았다.
‘방법을 바꿀까?’
그녀가 더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완전히 기척을 숨긴다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과감하게 접근을 시도하는 것을 고려해 보았다. 리스크가 큰 단거리, 아니면 리스크가 없는 장거리 길이었다.
쿵!
그에 이어서 땅이 크게 울렸다. 유선은 가만히 서 있다 한순간 중심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괜찮아?”
“괜찮긴 한데, 방금 뭐야?”
“모르겠어요. 도대체 이게 뭔지······.”
대지진이 일어난 듯이 땅이 울린 후, 이어서 후폭풍이 그들에게 찾아왔다. 거대한 풍압이 한곳에서 몰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윽······!”
유선은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를 데리고 재빠르게 나무 뒤로 숨었다.
유선은 그때, 뭔가 시큼하고, 역한 냄새가 한순간에 몰려 코를 찔러 옴을 느꼈다. 그 냄새를 맡자, 유선은 본능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뭐야, 이 냄새는?”
더는 맡으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유선은 재빠르게 기관지를 보호했다. 세네타는 말하지 않아도 바로 그 위협을 느끼고 두건을 두른 상태였다.
2초 동안 불어오는 돌풍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덩달아 그 냄새도 더는 유선을 위협하려 들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장소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 분명했다.
“뭔가 익숙한데, 설마······ 계약자!”
오르넵토스는 다짜고짜 유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엘레노어와 세네타를 내버려 두고 단숨에 날아올랐다.
“세네타, 그 애를 부탁해. 그곳에서 기다려!”
“유선 님!”
엘레노어가 손을 뻗으며, 동시에 날개를 펼쳤다. 오르넵토스는 그것을 보고는 바로 엘레노어를 향해 소리쳤다.
“안 돼. 오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 그 자리에 있어.”
오르넵토스의 강한 한마디에 어리광을 부리려던 엘레노어가 다시 날개를 접었다. 그리고 팔을 내려놓았다.
오르넵토스는 순순히 따라 주는 엘레노어의 모습에 유선의 팔을 잡고 급하게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녀가 오지 못하게 했느냐?
유선은 그 한마디를 묻지 못했다. 오르넵토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기에, 그녀에게 감히 물음을 던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르넵토스의 손에 이끌린 채로 날아갈 뿐이었다.
유선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뭔가를 발견했다.
“시체다······.”
사람의 시체였다. 물론 그 시체만 있었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헌터로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는데, 그 정도의 시체도 하나 못 보겠는가!
문제는 시야를 넓힐 때부터였다. 그 시체가 발견된 장소, 그 일대가 모두 초토화되었다. 날카로운 뭔가에 찢겨 나간 자국. 거대한 것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쓸어버린 흔적이었다.
그 시체들을 멀리서 봐도 죽은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건 대체······.”
어떤 몬스터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만큼 거대한 몬스터들에 대한 자료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코드 헌터에 불릴 수준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주인.
그 흔적들을 살피던 중, 루데릭답지 않은 급한 목소리로 유선에게 말했다.
“뭔데?”
-지금 전 세계 동시 중계 중인 특급 속보인데, 이계의 틈, 그 안에서 거대한 괴수가 출몰했다는구나. 예고도 없이 숲속에서 나타나 헌터들을 벌레 짓밟듯이, 모두 눌러 죽여 버리고, 괴성을 질렀다고 보도된다. 그 인간도 제정신을 못 유지하고 횡설수설하는데······. 이게 도저히 무엇인지, 나도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다만 꺼림칙한 느낌이 드니, 그것을 만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루데릭은 뭔가 말할 틈도 주지 않으며 유선에게 말했고, 그는 그 이야기를 이해할 틈도 없이 정보를 머릿속에 틀어박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모든 정보가 귓속으로 들어왔을 때는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님을 알았다.
루데릭의 정보는 그저 이곳이 위험함을 알려 주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이해함과 동시에 유선의 눈에는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밟혔다.
생존자였다. 다만 반만 생존한 생존자였다. 그 절반은 죽어 저 멀리 나가떨어졌기에, 반만 생존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어왔다. 공포에 삼켜진 그 얼굴이 유선과 마주했다. 유선은 그의 눈을 보자마자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았다. 살려 달라는 진부한 말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산 자들을 향해 경고하려고 마지막으로 남은 생명을 쥐어짜 내는 숨결이었다.
“도, 도망쳐······.”
쿠웅!
그리고 그 남자는 유선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돌 파편이 날아오른 유선과 오르넵토스를 덮칠 만큼 큰 울림이었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육중한 무게로 짓누른 거대한 뭔가가 서 있었다.
유선이나 오르넵토스나 그것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형상은 아주 예전에 한 번 보았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드래곤?”
엘레노어와 같은 드래곤이었다. 다만 엘레노어와 비교해서는 크기가 조금 작았고, 특유의 위협적인 느낌이 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상쩍게 초록빛 안광을 내뿜었다.
그 초록빛은 눈에서뿐만 아니라 살짝 벌린 입속에서 증기처럼 흘러나오고, 몸 틈새에도 빛을 내었다.
“아냐.”
오르넵토스가 그것을 올려다보며 가증스럽다는 듯이 이빨을 깨물었다.
“아냐. 저건 드래곤이 아냐, 계약자. 그저 그냥 드래곤인 척하는 시체일 뿐이야. 그러니까 감히 드래곤이라는 말을 하지 마.”
오르넵토스의 증오가 강하게 느껴졌다. 유선은 그녀의 감정에 그 존재가 악마의 산물임을 알았다.
드래곤은 엘레노어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그는 그 시체를 새로운 호문쿨루스 같은 존재로 창조했다. 바로 언데드 드래곤을!
호문쿨루스와 다른 것이라면, 생각보다 단조롭지 않게 자아를 조금 가진다는 것. 그리고 광폭하며, 초록으로 물들었다.
-그르르르.
언데드 드래곤이 입을 살짝 벌려 위협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의 입에 머금던 초록 증기가 바닥으로 내려앉아 부서진 나뭇조각에 닿았다. 그러자 재생 속도를 배속으로 높인 영상을 보는 듯 빠르게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부패한 살점들이 독이 되어 주변을 시들게 했다.
치명적이었다. 만약 그대로 싸운다면, 유선의 몸도 저 나뭇조각 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건 나 혼자 해결해보도록 할게. 물러나.”
그렇기에 오르넵토스는 그 싸움을 홀로 치르길 바랐다. 유선은 어째서 엘레노어에게 소리치면서 오지 말라고 했는지 조금 이해한 것 같았다.
“엘레노어를 데리고 와서는 안 된다는 게 이런 거였어?”
자신의 동족이었기에, 그 동족들과 조우하는 것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르넵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노어, 에브레라티오스가 이 싸움에 개입해선 안 돼.”
“······.”
그녀의 뜻이 얼마나 확고한지, 평소에는 잘 언급하지 않는 엘레노어의 진짜 이름을 말했다.
오르넵토스는 말없이 자신의 몸을 부풀려 갔다. 몸집이 점점 커지고, 처음에 보았던 드레이크 따위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몸집이 완성되었다.
그녀도 똑같은 드래곤의 형상이 되어 그것과 마주했다.
-그르르르르······.
언데드 드래곤은 호적수를 만났다는 사실에 경계하기 시작했다.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그녀를 탐색했다.
드래곤 오르넵토스는 그런 탐색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빠르게 언데드 드래곤을 제압하고 그 자리를 뜨기를 바랐다.
거침없이 공격하는 오르넵토스에 대항하며, 언데드 드래곤은 앞발로 그녀를 위협했다. 드래곤 몸을 이루는 나무줄기 따위가 떨어져 나갔다.
-크윽.
오르넵토스는 그 발톱 공격에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이대로 당할 성싶으냐, 그 생각에 오르넵토스가 똑같이 발톱으로 반격을 가했다.
언데드 드래곤과 오르넵토스의 육탄전은 장관이라면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리고, 발톱을 휘두를 때마다 돌풍이 생겼고, 소리칠 때마다 유선의 몸이 전율했다.
‘이길까?’
상대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 유선의 눈에 보였다.
힘이 밀린다고 해서 그 육탄전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
오르넵토스는 정령왕. 마법을 쓸 줄 알았다. 그것은 땅속에 뻗은 뿌리들을 들어 올려 언데드 드래곤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그 감싼 뿌리들을 이용해 언데드 드래곤의 공격을 방해했다.
-그르르르!
언데드 드래곤이 입을 벌려 뿜어낸 초록 증기가 나무뿌리에 닿자, 급속도로 썩어 가기 시작했다. 그 탓에 나무뿌리로 그 몸을 엮는 것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모두 생각한 일이었다. 오르넵토스는 그 찰나의 틈을 이용해, 재빠르게 목을 향해 날카로운 주둥이를 벌렸다. 당황하며 서 있던 언데드 드래곤은 오르넵토스의 공격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쿠웅!
땅이 한 번 더 울렸다. 언데드 드래곤의 날개가 퍼덕이고 양발로 그 짓누르는 것을 밀어내려 하였다. 하지만 오르넵토스가 그런 자잘한 것까지 허용해 줄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그녀는 힘이 들어갈 부분들을 모조리 짓눌러 버려 힘을 쓰지 못하게 해 버렸다.
그리고 그 틈에 재빨리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투둑-.
바동거리던 언데드 드래곤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 눈에 일렁거리던 초록 안광이 사라졌다.
-휴우······, 사라졌어.
만신창이가 된 오르넵토스는 너덜너덜해진 목덜미 살점을 뱉어 놓으며 말했다.
-뭣도 아닌 시체로 장난을 치는 망할 악마들 때문에 미쳐 버릴 뻔했군. 이 정도로 했으면 분명히 죽었을 테니, 이제 돌아가자.
언데드 드래곤의 발톱이 닿은 몸이 썩어들어 갔고, 오르넵토스는 그걸 떨쳐 내려고 자신의 몸을 감싸던 입자를 모두 떼어 내 본래 몸으로 돌아왔다.
그때였다. 오르넵토스가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해, 방심한 찰나였다.
-주인님의 명령.
목덜미가 뜯겨 나간 언데드 드래곤의 입에 나오는 말이었다. 그것은 죽지 않았다.
-그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초록 안광이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일어나 숨을 들이켰다.
그것의 목적은 오르넵토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선을 노렸다. 다시 죽더라도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오르넵토스가 다시 그것을 상대하려 하지만, 이미 상대는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전신에 있던 마나를 모두 끌어모아 그 브레스에 담아내었기에, 오르넵토스가 보호막을 펼친다고 해도 그 공격을 완전히 막기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브레스가 유선의 몸에 닿는다면 녹아내리며 점점 퍼져 잠식할 것이다.
유선은 최대한 할 만한 것을 생각해 보았다.
유선의 신체적인 조건으로는 불가능했다. 아마 더 빠르고, 일찍 눈치챘더라도 그 브레스의 범위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했으리라.
‘여기서 죽나?’
유선은 그렇게 절망스러운 순간이 왔으리라 믿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한순간 모든 것이 멈춰 버린 듯 고요해졌다. 시간이 멈춰 버린 것이 아니었다. 모든 오감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결과였다.
언데드 드래곤이 장면을 한 개 건너뛴 것처럼 브레스를 뿜으려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 멈춘 시간의 대가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쿠그그그극!
콰가가가강!
“우와앗!”
“조심해, 계약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속도가 만들어 낸 그 돌풍은 유선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오르넵토스가 재빠르게 유선의 몸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휘말렸을 것이다.
오르넵토스가 애써 몸으로 막아 주는 동안, 유선은 조심스럽게 눈을 떠 폭풍을 일으키며 지나간 것을 눈으로 좇았다.
모래 먼지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 형체. 눈으로 인지하기보다 귀가 먼저 그 정체를 파악했다.
우레같은 흉악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크롸아아아아!
유선은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생각나는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일직선으로 경로에 있는 모든 나무를 부수며 날아들었다. 그녀가 드래곤의 모습으로 언데드 드래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