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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원정 (1) (10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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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원정 (1)

“자, 체크해 볼까?”

“응!”

엘레노어가 무겁기 짝이 없는 가방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풍이 아닌 캠핑을 한다는 것이 들뜨는 모양인지, 소풍 전에 물건을 챙기는 초등학생처럼 들떴다. 유선은 차트를 하나씩 불렀다.

“빨간 물약 5병.”

“여기 이써!”

“좋아. 다음은······ 휴대용 식량.”

“밥 이써!”

“TC-N43 무전기.”

“어······ 어······ 잠깐만.”

엘레노어는 애써 아는 척 뒤적뒤적해 보지만, 그게 뭔지도 모르기에 찾는 게 불가능했다. 유선은 당황하는 엘레노어를 보며 풉 하고 웃어 버렸다.

“이제 됐어. 내가 어제 꼼꼼하게 챙겨 놨으니까, 엘레노어는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부으, 알았어.”

엘레노어는 볼을 부풀리며 오르넵토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유선은 한 번 더 목록을 보고 고이 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유선은 꽉꽉 채운 자신의 가방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엘레노어가 헤집어 놓은 곳을 다시 수습하고 지퍼를 완전히 잠갔다.

‘엘레노어랑 처음 던전에 들어갔을 때, 이렇게 많았나?’

아마 이것보다 더 많았겠지. 유선은 과거를 잠깐 회상해 보았다. 이제 희미해지는 추억으로만 남은 그것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가 버리니 참으로 기쁘면서 동시에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세네타가 레더 아머 차림으로 유선의 짐을 보며 말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셨네요.”

“응, 뭐······ 이것저것 필요할 것 같아서······. 너는 뭐 챙긴 거 없어?”

“저는 맨몸으로 항상 가 봤던지라 이제는 서바이벌에 익숙해져서요.”

“아, 그렇지······.”

짐은 거추장스러운 물건일 뿐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유선과 달리 서바이벌에 대한 자신감! 그것은 유경험자의 여유였다.

“꽉꽉 채운 가방은 근심이 가득하다는 말이 있지. 그 가방 주인이 얼마나 근심에 가득 찼는지 알겠구나.”

루데릭이 옆에서 유선의 짐을 보며 말했다. 유선은 루데릭의 말에 조금 발끈해 감정을 실어 변명했다.

“근심은 무슨! 이건 유비무환이야, 철저할수록 위험 부담이 덜하다고.”

그렇게 말은 해 보았지만, 루데릭이 말한 것과 다른 게 없었다. 결국, 그 유비무환이라는 것도 근심에서 비롯했으니까 말이다.

“정말 괜찮겠냐?”

루데릭이 말했다.

“마음 같아선 나도 그대와 함께 가고 싶지만······. 내가 그러지를 못하니 힘들구나. 힘이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주인.”

유선은 진심 어린 걱정을 해 주는 루데릭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괜찮아. 엘레노어도 있고, 다 있으니까. 분명히 네가 여기서 내게 뭔가를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래, 악마 주제에 별 이상한 걱정이나 하네. 안 어울리니까 그만둬.”

오르넵토스가 때를 가리지 않고 끼어들어 분위기를 초를 쳐 버렸다. 루데릭이 살짝 오르넵토스를 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답지 않은 짓이지. 이것 하나만 말하마. 무사히만 돌아와라. 나도 업무를 보러 갈 테니.”

유선은 가방을 들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지만 지금 몸으로는 그 짐도 이젠 버겁지가 않았다.

“다녀올게.”

“동생, 갔다 올게!”

유선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엘레노어도 따라서 루데릭에게 손을 흔들었다. 루데릭은 그 모습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으며 따라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세네타와 오르넵토스가 먼저 들어가고, 유선은 엘레노어의 손을 잡고 이계의 틈으로 들어갔다. 그 틈이 완전히 유선을 잡아먹고 없어지자, 루데릭은 그제야 흔들던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아으으······ 이제 우리도 가 보지요.”

물자를 준비하고 점검하는 데 도움을 준 현태는 기지개를 켰다. 현태는 하품하며 자신의 장비를 챙겼다.

이번 작전 자체에는 게키는 필요 없었다. 그저 유선이 필요한 장비를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그대로 철수하는 것이 그다음 일이었다.

“안 가십니까?”

현태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게이트가 열린 그 자리, 그 앞에서 루데릭이 간이 의자를 깔고 가만히 앉았다.

“먼저 가게.”

“어차피 이 작전에 이렇게 기다리는 건 의미가 없으실 텐데.”

“알아.”

루데릭은 현태에게 그렇게 말했다. 현태는 더는 말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루데릭을 내버려 둔 채로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루데릭은 현태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아.”

기다림이 무의미한 만큼 시간을 버리는 행동이었다. 루데릭은 그것을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루데릭은 그 생각에서 조금 이기적이고 싶었다. 루데릭은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현태가 사라진 곳 앞에 서서 다시 돌아오는 상상을 하며 그 자리를 지켰다.

***

“웃차.”

유선은 안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들어 자신이 제대로 왔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예정했던 대로 포어셰크의 공방 쪽으로 건너왔다.

공방 쪽이지만, 공방 안은 아니었다. 영원한 잠이라는 화산의 바깥이며, 그렇기에 유선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얀 구름이 하늘과 땅을 잇듯 이어진 멋진 장관이 펼쳐졌다. 영원한 잠이라는 화산에서 나오는 구름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멀지 않은 곳에서 사막이 펼쳐진 것이 보였다.

“모든 게 생각대로네.”

세네타를 닮은 그 여인의 기억과 아주 똑같았다. 그렇기에 유선은 헷갈리지 않고 방향을 바로 정했다.

“계약자,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

오르넵토스의 물음에,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면 예정대로 한다?”

“그래, 부탁할게.”

그러자 오르넵토스의 주위에 뜬 입자가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오르넵토스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새로운 형상을 만들었다.

날렵한 눈, 매서운 외모, 하늘을 위협할 듯이 퍼덕이는 커다란 날개. 그것은 하늘과 땅 아래 모든 것을 통치했다는 것과 모습이 흡사했다.

물론 흡사할 뿐이었다. 그녀가 형상을 만들어 낸 것은 드래곤이 아닌 드레이크였다. 풀 줄기와 원소들이 얽혀서 만들어 낸 드레이크의 형상이었다.

-역시 뭔가 날아다니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니까.

오르넵토스는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자신의 몸을 보며 뿌듯해했다.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뭐 잠깐이니까. 만약 이대로 계속 이동한다면 큰일이겠지만, 사막을 지날 때만큼은 빠르게 가야지 않겠어? 그리고 드레이크라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거로 봐도 의심하지 않을 테고.

맞는 말이었다. 오르넵토스도 나름대로 생각하고 하는 일이었기에, 유선은 더는 군말하지 않고 오르넵토스의 등 위에 올라탔다. 다음으로 올라갈 세네타가 올라타기 전에 오르넵토스에게 양해를 구했다.

“제 미천한 몸뚱이로 감히······.”

-미사여구는 모두 빼기로 하지 않았나? 상관없으니까 얼른 타.

따분하다는 듯이 세네타의 말을 끊은 오르넵토스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그녀의 등 뒤에 올라탔다.

그리고 드레이크 오르넵토스는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했다.

***

파캉!

푸슈슉!

우거진 숲속에서 울리는 검이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동시에 뭔가를 가르며 바람이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 검을 든 적이 완전히 불능이라는 소리였다.

“하아······. 하아······.”

여인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30명, 자신을 잡으러 온 호문쿨루스 무리의 마지막이었다. 그전에 다가온 것들과 차원이 다르게 강해졌다. 30명이 동시에 덤비면서 그녀는 그 검을 피하려고 계속해서 몸을 날렸고, 공격할 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엔 승리를 쟁취했다.

여인은 누더기 속 살갗이 베인 자국이 많았다. 그녀는 맨몸이었다. 몸을 덮고 하반신을 덮는 검은 철 장식 따위를 제외하면 그녀의 몸을 보호해 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상처 따위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상처는 금방 치유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기 치유 능력을 알기에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다.

“콜록. 콜록.”

그녀는 갈라진 목에서 쉰 기침을 내뱉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었다. 고통보다 갈증이 더욱 괴로웠다. 여인은 급하게 물통을 열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들이켰다. 이 갈증이 해소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여인은 급한 불을 끄자 물통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숨을 다시 한 번 더 고르며, 자신의 움직임을 다시 기억하고 떠올렸다. 숨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긴박한 검의 궤적들. 그 속에서 현란하게 춤을 추는 자신의 모습.

그 상황에서 벌어진 자신이 했던 것, 자신이 저지른 실수, 상대의 급습을 통한 이점, 그 모든 것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여인은 다시 검을 들어 허공을 겨누었다.

슈슈슈슉!

자신이 발견해 낸 난전에 쓰이는 최적의 검법. 아직 제대로 다지지 못했지만, 그것도 다음 전투를 통해 극복하면 되었다.

여인은 검을 자신의 손바닥에 찔러 넣었다. 공방의 무기를 흡수할 때처럼 그녀의 손에는 상처 하나 없이 검을 흡수해 내었다. 그 검뿐만이 아니었다. 호문쿨루스들이 가지던 검들로 손을 뻗었다. 검의 크기, 형태와 관계없이 여인의 몸으로 빨려들어 왔다. 심지어 그녀는 부서져 파편이 된 것들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흡수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자, 공허한 숨을 내쉬었다. 수천 자루나 되는 검들을 가져올 때는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단, 갈수록 공허해지는 그 기분은 어떻게든 풀 수가 없었다.

여인은 물통을 보았다. 처음 본 남자가 남겨 두고 간 플라스틱으로 된 물통. 그리고······.

“호의······.”

여인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허황한 꿈. 목적을 잃은 짓이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이 질긴 악연, 그것을 끊어야만 했다. 오로지 그 목적만을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흐음······.”

같은 장소, 다른 시각. 유선은 터져 나간 가죽들을 들어 올려 보았다. 우거진 숲이었기에 자칫하면 방향을 잃어버릴 곳이었다. 그것은 호문쿨루스들이 죽은 흔적이었다.

“이것들이 대충 언제 죽었는지 감이 와?”

오르넵토스는 그 흔적들을 보며 대충 시간을 예측해 보았다.

“열두 시간은 된 것 같은데? 이걸 죽일 만한 녀석이 열두 시간 안에 이곳을 벗어났다는 의미겠지.”

“이걸 죽일 만한 녀석에 열두 시간이라······.”

전자는 분명히 세네타를 닮은 검은 머리 여인이 분명했다. 포어셰크를 발견한 시간과 출발한 시간을 생각해 보면 격차가 좁혀져 가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지는 않았다.

“대단하네요. 그 여자는 어떻게 된 게 제대로 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동하는지······.”

세네타가 주변을 훑어보다 감탄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격전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검을 회수해 간 것만 보였다. 그 이외에는 추적자의 눈을 따돌리려고 가짜 흔적들을 뿌리고 간 것만 보였다.

유선은 그것이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발 속도가 얼마나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선은 그녀를 추적하는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또 있다.’

유선은 그 자리를 좀 더 탐색해 보자, 반지를 끼면서 보는 기억의 흔적이 남은 것을 발견했다. 뭔가를 흘려버린 것이 피와 흡사하게 남겨졌다.

가짜 흔적과 다르게 진실만을 남기는 그 기억들. 유선은 그곳에 손을 뻗어 그녀가 갈 곳을 보았다.

“저기구나.”

유선은 그 여인이 모습을 감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도 의미 없는 발자국이 조금 남아 가짜 흔적처럼 보이게 했지만, 유선은 그곳이 가야 할 길임을 확신했다.

“음······ 네, 이 흔적이 맞는 것 같아요. 빨리 찾으시네요.”

세네타는 유선을 보며 감탄했다.

“생각보다 그 여자를 빨리 찾을 것 같지?”

“네, 오빠가 이렇게 잘 찾아주신다면 분명히 가능할 거예요. 다만······.”

세네타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보았다. 그리고 기적을 이용해 자신의 검을 뽑았다.

“훼방꾼이 우리 발을 얼마나 잡는가에 따라서 또 다를 거예요.”

그것은 오르넵토스와 엘레노어도 감지했다. 다수 호문쿨루스가 자신의 동족들이 죽은 자리를 향해 달려왔다. 검을 뽑아 든 채로 달려오자마자 바로 싸울 준비를 마쳤다.

유선도 뒤늦게 알아차리고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리고 자신도 준비해 온 검을 뽑아 들며 중얼거렸다.

“제발 늦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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