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 살아 움직이는 검 (103/148)

 # 103

51. 살아 움직이는 검

그 기억에 유선은 잠긴 눈을 다시 떴다. 엘레노어가 나무를 타는 고양이처럼 올라와 얼굴을 만졌다. 얼굴을 만지던 엘레노어가 오르넵토스를 내려다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선 님이 대답을 안 해.”

“돌아왔어. 이 고양이 같은 녀석아.”

유선은 볼살을 만지작거리는 엘레노어를 내려놓았다. 평소라면 많이 웃어 주며 장난도 쳐 주겠지만, 그 기억이 가리키던 방향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안일할 수가 없었다.

-뭔가 보았는가? 그런 게 있다면 알려 주게!

포어셰크가 정보를 공유하길 원했다. 유선은 잠깐 그것을 생각하고 포어셰크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이건 함구할게요. 아무래도 이건 우리 일이니까요. 포어셰크 씨가 개입하시면 오히려 더 위험하실 수 있습니다.”

-이 몸이 얼마나 단단한데! 내가 나서면 그 어떤 놈보다 자신 있게 싸워!

포어셰크가 화염 숨을 내뱉으며 늠름함을 어필해 보였다. 유선은 표면상으로 보았을 때, 확실히 포어셰크가 무서워 보였다.

“기습 맞아서 싸늘하게 누웠던 악마 주제에 말이 많네.”

-······.

오르넵토스가 날카롭게 말하자, 바로 꼬리를 마는 포어셰크. 유선도 그 말이 하고 싶었지만, 오르넵토스가 대신해 준 격이었다.

“아무튼, 포어셰크 씨는 오지 마시고, 공방 물건들을 정리해 주세요. 혹여나 정말로 위험한 물건이 사라졌다거나 우리가 위험에 처할 상황의 물건이 있다면, 포어셰크 씨가 루데릭한테 알려 주셔야 하니까요.”

-끄응, 알겠네.

포어셰크도 그것이 합리적임을 알기에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포어셰크가 순순히 자신의 역할을 해 준다는 말에, 유선은 다시 세네타를 닮은 그 여인의 기억에 관한 문제를 생각했다.

“어떻게 된 건지 원······.”

유선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렇기에 더는 이곳에서 발이 묶인 채로 있을 수는 없었다.

“얘들아, 돌아가자. 이제.”

이 문제는 자신 혼자서 해결할 수 없음을 알기에, 유선은 그들에게 말했다. 쫄래쫄래 따라오는 엘레노어와 다르게 오르넵토스는 포어셰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음······.”

경계하던 오르넵토스가 포어셰크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뭔가가 생각날 듯, 말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봐?”

“저기, 너 말이야······.”

오르넵토스가 삿대질을 하며 생각이 날듯 말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아?”

그러자 포어셰크는 그 물음에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고 말았다.

-글쎄올시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흐음······.”

오르넵토스는 고개를 갸우뚱할 뿐, 더는 묻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악마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계약자, 나 얘 좀 때려도 돼?”

“······히끅!”

포어셰크는 순간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오르넵토스는 악마들은 모두 족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에, 그건 적의가 없는 포어셰크에게도 적용되었다.

유선은 그 섬뜩한 소리를 하는 오르넵토스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그러지 마.”

“흐음······.”

오르넵토스는 찜찜한 기분을 풀 수 없었지만, 그저 기분 나쁜 놈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포어셰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오르넵토스가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성격은 여전하다니까.

***

큐앤 헌터 컴퍼니 14층. 루데릭과 오르넵토스, 그리고 엘레노어가 유선의 방에 모였다. 엘레노어는 사건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유선의 무릎 위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그와 별개로 오르넵토스와 루데릭은 유선의 찜찜한 표정이 거슬려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 대화에 필요한 마지막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어요, 오빠?”

세네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들어와. 마침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차였으니까.”

“이번 사건에······ 저도 들어야 하나요?”

“응, 혹시 싫다거나 그렇다면 안 들어도 되긴 하는데······.”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세네타는 얌전하게 그 자리에 앉아 유선의 말을 들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루데릭이나 오르넵토스만의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세네타를 닮은 여인이 주목적인 만큼, 세네타도 그 사실을 알아야 했다. 주역들이 다 모이는 것을 보고, 루데릭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주인이 말했던 것을 다시 종합해 보자면, 이 용사의 딸을 닮은 여자를 사막에서 처음으로 발견했고,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반지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호문쿨루스들과 동일하게 생각을 읽었지만, 그 생각이 인간과 흡사함과 포어셰크의 공방에 침입해 공방의 주인에게 칼침을 놓고 수천 자루의 무기를 강탈해 갔다······. 이 말이었지?”

“그래.”

유선은 루데릭의 요약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데릭은 그의 말을 다시 상기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신경 쓰이는 것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포어셰크의 공방에 쳐들어갔다는 것은 공방에 관한 정보를 안다는 의미로군. 처음부터 그 사막에서 발견된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어. 행선지는 정해졌다는 말이니까.”

루데릭은 그가 아는 사실을 중얼거렸다.

“그 공방이 사막 쪽에 있어?”

“그 사막을 지난다면, 화산이 하나 있긴 하다. 영원한 잠이라고 부르는 그 거대한 화산 속이라면 포어셰크가 자신의 몸을 숨기면서 동시에 침입자를 막을 열기가 있지. 그거로 자신의 몸을 지켰나 보군.”

“영원한 잠? 악을 봉인했다느니 뭐니 하면서 불가침 구역이라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곳에 그 악마가 있었단 말이야?”

오르넵토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관리하는 이들이 허술하니, 포어셰크가 그곳을 노리지 않았겠나?”

“하여간 악마들은 약아빠졌어.”

오르넵토스는 투덜거렸다.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건 인정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약자, 그 여자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 유선은 어쩌자는 생각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리고 유선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여인을 찾자.”

유선의 말을 들은 오르넵토스와 루데릭은 꺼림칙한 얼굴이었다. 그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주인, 설마 또 오지랖이라도 부릴 생각이냐?”

“이번 건 나도 반대하는 편인데······ 아무리 그래도 계약자가 위협이 심한 일이야. 이미 한 번 경계했다며? 정령들을 풀어서 그 여인의 동선이나 능력 정도를 파악하는 게 좋다고 봐. 그리고 우리에게 해를 가한다면 그때 처리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고.”

유선은 그들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기에 미소 지으며 우려하는 그들에게 말했다.

“굳이 살리자는 그런 말은 나도 하고 싶지 않아.”

유선도 그런 오지랖을 앞세울 만큼 지금 문제가 그렇게 작지 않다고 여겼다. 단순히 그녀가 검을 강탈해 갔다는 사실도 큰일이었지만, 유선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에 그녀를 찾는 것도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해야 함을 알았다.

“그 여자의 첫 타깃은 거북이 같은 노인이었어. 그리고 그 사람을 에고르트라고 부르더라고.”

“에고르트······.”

루데릭은 그의 특징을 잘 알아, 에고르트가 거북이 같은 모습을 가졌음을 알았다.

“악마가 죽는 게 뭐가 문제야? 우리 처지에선 그러는 건 좋은 건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처음에 그 생각이 흘러왔을 때는.”

유선이 본 것이 그게 끝이었다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다음으로는 인간이었어.”

오르넵토스는 바로 다음 타깃에 관한 것을 듣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세계에 남은 인간들은 없잖아!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오르넵토스는 자신이 한 말이었지만, 바로 이해했다. 그것은 단순히 이세계의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 세계, 그리고 좁게 나아가면 유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루데릭은 심각한 얼굴로 유선을 보며 물었다.

“그 말은······. 그 여자의 목표는 단순히 악마의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것으론 그래. 지금 확신하는 것은 누구 하나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유선은 관절을 파고드는 기억을 되살렸다. 수천 개 무기가 그녀의 몸에 반응해 끌려들어 갔던 그 광경이 생생했다.

“수천 자루 무기가 그녀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 그것뿐이야.”

“······.”

적이라는 것은 유선이 인간인 이상, 이미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수천 자루 검을 지닌 그 여인이 더욱더 막강한 힘을 얻으려 들기 전에 재빠르게 막아야만 했다.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모조리 벤다. 말 그대로 완전히 검이로군. 살아 움직이는 검이야.”

검은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그것을 누군가가 쥐지 않는 이상, 피아를 가리지 않고 그 누구에게나 향하는 날카로운 검임은 변함없었다.

“물건을 찾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찾는 거라······. 긴 여정이겠네.”

“그렇군. 긴 여정이니만큼,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이 있는데······.”

루데릭은 요즘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그것을 떠올렸다.

“그 여자를 찾을 구체적인 방안은 있나?”

“동선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아. 너한테도 말했을 때, 충분히 이끌어 줄 위치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찾는 것 정도는 쉬울 거야.”

어차피 밖으로 나간 것은 포어셰크의 공방에서부터였다. 좋아도 싫어도 그곳에서 나가고 다시 들어오는 것을 할 것이다. 유선은 그 발자취를 따라 그녀를 추적하면 되었다.

“검을 든 여인을 바로 찾는다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이야?”

“주인은 그 세계에서 조난해서 이세계로 넘어오지 못하는 게 두렵지 않나?”

“······.”

루데릭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루데릭은 유선의 안전을 걱정했다. 유선도 조금 두려웠다. 다시 이세계로 넘어오지 못하고 표류하면······ 자신은 어떻게 될지 잘 몰랐다. 다시 발견되는 사람들은 모두 미쳐 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였기에, 제아무리 강한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가 있더라도 자신이 온전히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 점에선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자 세네타가 그 걱정이 필요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버지에게 그 세계에서 갇히는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을 많이 들어 봤어요. 거기다가 몇 번이나 그 세계에서 탈출해 봤으니까······. 오빠를 다시 안전하게 이세계로 데려오는 방법은 제가 많이 알아요.”

세네타는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사실 유선이 세네타를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3년 차에 온갖 역경을 거쳐 봤으니, 유선과는 남다른 대처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유선은 세네타의 말에 우려하는 루데릭을 보며 물었다.

“이 정도면 될까?”

“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세네타의 능력을 인정하는 듯 보였다. 루데릭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오르넵토스가 끼어들어 유선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계획이야?”

유선은 그 물음에 바로 대답해 주었다. 그 계획을 얘기할 때부터 이미 날짜는 잡힌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일.”

느긋하게 뭔가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위험 요인이 있다면 그 여인보다 발 빠르게 앞서가 막는 게 최선이었다.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자.”

“내일이라······.”

원정치고는 준비 시간이 너무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엘레노어는 가만히 앉았고, 세네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끝냈다. 하지만 루데릭은 계획이 완전히 잡히지 않아 불안했고, 오르넵토스는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그 계획에 조금 불만을 가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선의 계획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더 의견이 없는 것을 알고 유선은 손뼉을 쳐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동안 제대로 쉬어 놔.”

“오늘 술이나 많이 마셔놔야겠네. 으, 몇 박을 할지도 모르는 그곳에서 노숙해야 한다니 끔찍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오르넵토스는 투덜거리며 가장 먼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루데릭은 심각한 표정으로 유선을 슬쩍 보다가 자신의 방으로 갔고, 세네타는 공손하게 인사하고 돌아갔다.

남은 것은 앉은 엘레노어뿐이었다. 엘레노어가 얌전히 책을 읽다 둘만 남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유선 님.”

“왜?”

“그 사람 보러 가? 뜨끈뜨끈한 곳에 누워 있던 사람?”

안 듣는 줄 알았지만, 책을 읽으면서도 그 대화에 참여한 상태였다. 유선은 엘레노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사람 만나러 가. 왜? 별로 안 좋아?”

“아니, 좋아!”

엘레노어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왜? 그 사람이 좋아서 그래?”

그러자 엘레노어는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그 사람 늘 외로워 보였으니까. 엘레노어가 칭구해 주고 싶었어.”

외롭다. 그리고 친구로 삼고 싶다는 말에 유선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유선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엘레노어에게 깊게 파고들어 묻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엘레노어에게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그 사람 친구로 삼을 수 있을까?”

“될 수 있으면 좋겠어.”

할 수 있다, 없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엘레노어의 말에 유선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할 수 있으면 좋겠네.”

과연 그렇게 될지가 의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