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49. 미지의 여인
그런 여자가 나무 한 그루에 기댄 채로 누웠다. 유선은 우연의 일치인가 하는 생각에 살짝 멍한 표정으로 그 여인을 보았다.
‘세네타와 닮긴 했지만.’
실제로 판박이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얼굴에 느껴지는 서양인의 느낌과 날카로운 이미지는 같은 혈육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빼박은 수준이었다.
그럼 그녀는 호문쿨루스 중 하나일까? 생김새가 거의 비슷한 호문쿨루스들의 특징을 생각하면, 이것도 세네타를 모방한 호문쿨루스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해 보지만, 양산적이었던 호문쿨루스들의 느낌이 강하지 않았다.
“왜 그래요, 오빠? 왜 그렇게 놀란 듯이 보세요?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여인을 관찰하려니, 세네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냐, 너랑 좀 닮았다고 생각해서······.”
그러자 세네타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저랑 말인가요?”
“응, 너랑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넌 안 그래?”
“······모르겠어요. 제 얼굴이랑 어디가 닮았다는지 잘······.”
세네타는 그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그 말이 공감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자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다는 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듯해 보였다. 어찌 됐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물······. 물······.
입이 바싹 타들어 가, 비몽사몽 물을 찾는 것을 보면 인간과 흡사해 보였다. 이게 사람의 탈을 쓴 인형일 뿐이라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겨우 그늘로 삼을 나무 한 그루 아래에서 지쳐 쉴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선은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준비해 놓은 물통을 꺼냈다. 그녀의 입안으로 조심스럽게 흘려보냈다. 가뭄의 땅처럼 갈라진 입술 사이로 물이 닿아 조심스럽게 입안으로 들어갔다.
물을 몇 모금 삼켰을까, 탈진으로 쓰러졌으리라 믿었던 여인이 다시 눈을 떴다. 번뜩하고 뜬 황금색 눈동자가 유선과 마주쳤다.
“!”
그리고 그 여인이 몸을 날리다시피 움직여 유선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가 사막 한가운데로 벗어나 경계하는 듯한 얼굴로 유선을 노려보았다. 검은색 머리 아래에 황금색 눈동자가 빛나듯 돋보였다.
-뭐지, 너희는? 그 녀석들과 닮았으면서도 안 닮았군. 그 녀석들과 다르게 옷도 제대로 걸치기도 하고······ 혹시 인간이라는 뜻인가?
여인은 입을 뻥긋하지 않고 뭔가를 말했다. 크리스털 리저드처럼 마음의 소리를 읽게 해 주는 유선의 능력이었다.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에 유선은 우선 자신들이 악의를 가지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당신들의 적이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와는 상관없습니다. 그저 목이 말라 보여서 물을 드린 것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도 안 했는데 어떻게 그걸······. 내 마음을 읽는다는 거지?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자, 여인의 목소리는 더는 들을 수 없었다. 의사소통을 명백히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유선이 아니었기에 한 번 더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믿어 주십시오. 그 적이란 것들과 우리는 관계없습니다. 전 당신을 도우려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유선이 한 번 더 대화를 원하는 의사를 밝히자, 그녀는 유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단해 놓았던 대화를 다시 열어 말했다. 말한다고 해서 다시 대화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래 봐야 너희는 인간들이다. 어차피 저것들이나 다를 게 없는 똑같은 인간일 뿐이야.
그녀는 그저 자신이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유선은 무엇을 가리키고 그것이 얼마나 나쁜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증오 어린 목소리, 그것 하나만큼은 제대로 알았다. 유선은 그 증오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거쳐서 나왔는지 만큼은 알았다. 그렇기에 유선도 더는 자신이 적이 아님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에선 어떻게든 경계를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세네타가 가만히 지켜보다 유선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어쩔 수 없지. 돌아가자. 믿어 주지 않겠다는데, 괜히 더 자극해 봐야······.”
이건 불필요한 충돌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설득하려다가 쓸데없는 교전이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유선은 도움이 필요 없다는데 굳이 오지랖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든 물통을 들어 보이며 세네타를 닮은 여인에게 말했다.
“이건 아까 당신의 입에 흘려 넣은 물을 담은 통이에요. 그건 알죠?”
-······.
“여기다 놓고 가겠습니다. 그 정도 물로는 이 사막을 돌아다니실 수 없을 테니까요.”
유선이 해 줄 마지막 배려였다. 그리고 유선은 다시 엘레노어가 펼친 날개를 이용해 이계의 틈으로 날아갔다.
***
여인이 바라는 대로 유선과 그 일행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흑발의 여인은 유선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에게서 눈을 뗐다. 그리고 자신이 기대어 쓰러졌던, 나무 한 그루 아래에 놓인 물통을 보았다.
아직 유선이 말한 대로 갈증이 모두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물이 필요했다. 이 사막을 지나려면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수분은 필수였다. 여인은 유선의 손길에서 벗어났던 그 움직임과 다르게 천천히 나무로 걸어갔다. 그리고 유선이 남겨 둔 물통을 들었다.
친절하게 열린 뚜껑과 그 안에 가득 든 미지근한 물. 여인은 주춤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이 입에 닿자, 의심했던 것이 무색하게 목구멍 뒤로 넘겼다. 해소하지 못한 갈증이 끝나기까지 숨도 쉬지 않고 마셨다.
꿀꺽꿀꺽 꿀꺽······.
물이 완전히 바닥이 날 때까지 들이켰다. 그리고 여인은 다시 일어났다. 비어 버린 물통이지만, 그것을 버리지 않고 손에 쥐었다. 아니, 그것도 잠깐이었다. 여인은 물통을 잠시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옴을 느꼈다. 맹렬한 속도로 접근해 오는 소리. 그것이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확신했다.
호문쿨루스. 에고르트의 하수인. 검에 깃든 악의로 무장해 목적을 위해서 살육하는 기계들.
그들의 목적은 뻔했다. 자신의 몸. 이 육신, 이 육신과 정신을 이루는 본질. 그것을 노렸다. 자신이 에고르트가 가장 바라는 이상이었고, 그는 그 이상을 가지려고 끈질기게 자신의 육체를 갈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인이 갈라진 목으로 겨우 입을 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난······.”
자신의 오른손으로 팔꿈치를 가져다 댔다. 마치 검 자루를 쥐듯이 굳게 말아 쥐었다. 그리고 팔꿈치에서 돋아나는 무언가가 그녀의 말아 쥔 손을 채웠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그리고 여인은 그 채워진 손잡이 따위를 힘껏 뽑아내었다.
차라랑!
팔꿈치 속에서 가녀리고 동시에 치명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그것은 검이었다. 그녀의 몸속에 검이 있었던 것처럼 기다란 검날이 모습을 보였다. 여인은 뽑은 검을 굳게 말아 쥐었다. 그녀의 검에서 느껴지는 악의. 하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짐했다.
비록 홀로 설지라도, 더는 자기 뜻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겠노라고.
***
-정유선 헌터님, 우리 공격대에 도움을 주셔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아뇨, 저는 구경만 했던지라······ 실질적으로 세네타가 다 했죠.”
난입 후에 받는 감사의 인사는 언제나 특별했다. 이런 식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음을 상기시켜 주면 얼마나 좋은지 모를 것이다.
-세네타 유 헌터님에게도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만, 그분께서는 통화를 거절한다고 나오는 탓에 제가 인사를 드리려 해도 할 수가 없더군요. 대신 전해 주시겠습니까?
“기꺼이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오늘 편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네, 정비 잘하시고, 편히 쉬십시오.”
유선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까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직 찬 공기가 가시지 않은 봄. 하지만 이곳은 유난히 뜨거운 날씨였다. 기계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루데릭의 방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방 안에서 오묘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
“커흡.”
“어허, 허리 똑바로 펴라. 무릎도 굽히게 해 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않겠나?”
“네, 넷!”
기율은 땀을 뻘뻘 흘리며 루데릭의 몸무게를 허리로 받쳤다.
“오늘은 뭘 잘못했냐?”
“오늘이 아니라 지난 3년 전 일을 반성하라는 의미로 이러는 중이다.”
“뭘 했는데?”
“회수하지 않은 과거 일.”
두루뭉술한 말에 엎드린 기율을 향해 눈을 돌렸다.
“또, 또 다른 스캔들이 갑자기 오늘 터져서······.”
“아.”
유선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연예인 지망생들이라는 애들이 자주 꼬였다고 본인이 말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튼 스캔들이 멈출 때까지 이렇게 둬야 할 것 같다. 그래야지 CEO로서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하고, 처신을 잘해야 하는지 알 테니까.”
“뭐, 그래라.”
“커흑, 형님마저······.”
편이라도 들어줄 줄 알았지만, 유선은 루데릭의 훈육 방법을 나무라지 않았다.
“뭔가 사람을 발견했다는 보고는 미리 들어서 안다만, 그 사람도 호문쿨루스였느냐?”
“글쎄, 호문쿨루스인지, 사람인지······.”
유선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흐렸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그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에고르트라는 악마가 뭘 쫓는지 알아낸 것 같긴 해.”
루데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선이 자신도 모르는 것을 아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게 정말이냐, 주인?”
“응, 그런 것 같아.”
“설마, 그······ 인간이냐?”
유선은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데릭은 허······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율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그에게 나가라고 지시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땀을 뻘뻘 흘리던 기율은 루데릭에게 인사하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멀리 내던져 둔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 세계에 살아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터. 혹시 다른 헌터를 만난 게 아니냐?”
“다른 헌터라고 하기엔······.”
준비성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헌터라고 해도 쇠사슬이 있는 두꺼운 목걸이와 누더기라는 가벼운 차림을 한 건 말이 안 되었다. 어디선가 갇혔다 탈출한 몸이 분명했다.
루데릭도 그 물음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하자, 에고르트가 하수인을 풀어서 찾는 것이 인간 형태를 띠는 게 그렇게 말이 안 되지는 않음을 인정했다.
“그래, 어쩌면 주인이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에고르트는 인간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 아니 가장 완벽하게 강한 생명체를 만드는 욕구가 있는 놈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인간이야?”
수명과 날렵함은 엘프. 그리고 힘이라면 드워프. 그리고 모든 것의 정점에는 드래곤이 있었다. 그렇게 장점이 많은 종족을 내버려 두고 왜 인간을 선택했을까?
“에고르트는 최고를 생각한다. 그 최고라는 것에는 가능성이 가장 크지. 에고르트는 가능성을 생각해 인간을 선택했을 거야. 언제나 인간이 변수를 가져다주고, 악을 저지했으니까.”
용사들을 보면 여태 인간이었으니, 에고르트가 그런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인간을 닮은 뭔가를 만들어 냈다. 그 인간은 자신을 만들어 준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났고. 픽 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아무 대책도 없었다……. 자기가 만들었는데 자기가 컨트롤을 못 하는 건 좀 웃기지 않아?”
“어쩌겠느냐? 에고르트는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을 만들었다면 이성을 가졌을 것이고, 이성을 가졌다면 자기 의사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동의하는 말이었다. 에고르트가 쫓는 그 여인은 호문쿨루스들과 다르게 짧지 않은 생각, 그리고 방식이 다르지만 어떻게든 통하는 의사소통이 있었다. 자신의 주관이 있으니, 창조해 준 자신의 아버지 품을 거부하고, 그의 사상을 따르지 않았다.
세네타와 닮았지만, 사상은 아버지를 의심 없이 따라온 세네타와는 정반대였다.
“그 사람을 어떻게든 데려와야 했을까?”
그 반하는 이상이라면 자신과 어쩌면 맞지 않았을까? 유선은 일말의 가능성을 놓친 것 같아 후회하는 듯했다. 하지만 루데릭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주인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다. 그 탈주한 것을 잡으려고 호문쿨루스들을 바깥 세계까지 끌어낸다면 쓸데없는 위험이 주인에게 근심을 가져올 뿐이다.”
“······.”
루데릭은 키보드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