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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정령계 (2) (9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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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정령계 (2)

생각해 둔 곳이 있어 둘러보는 시늉도 하지 않고 자리를 찾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유선과 엘레노어는 그게 언제 나올지도 묻지 못하고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정령계를 구경했다.

오르넵토스가 발을 멈춘 것은 거대한 절벽이 나올 때쯤이었다. 발걸음을 멈추며 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절벽을 올려다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원래대로라면 여기서 공터가 나와야 하는데······. 이게 왜 여기 있어?”

공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산의 절벽이었다. 유선이 생각해도 완전히 다른 풍경에 오르넵토스에게 물었다.

“잘못 든 거 아냐?”

오르넵토스가 실수한 게 아닌가 하고 묻자, 오르넵토스가 유선을 노려보았다. 성인이 되어서 째려보는 그 눈빛이 상당히 강렬했다.

“내가 술 먹고 땡깡 부리는 그런 놈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나라의 지형도 모르는 바보인 줄 알아?”

“스스로 그런 놈이라는 것도 잘 아는구나. 좀 고치지 그러니?”

“내 인생의 낙인걸, 어째?”

오르넵토스는 한 번 더 키득 웃었다.

“자, 보자······ 제아무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내 나라에서 그럴 일은 없을 테고······. 이만한 덩치의 산이 갑자기 생겼다는 건······. 아하, 그놈이군.”

오르넵토스는 그 정체를 추측하다가, 누군지 깨닫고 절벽을 향해 거칠게 발로 찼다.

“이 녀석, 일어나라!”

쿵-!

그녀의 발로 강하게 걷어차자, 산이 울렸다. 꿈쩍하지도 않을 것 같던 태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그그긍.

압도적인 크기가 움직이며 떨어지는 잔해에 미약하게 바닥이 진동했다. 유선은 그것이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인간 같은 형상임을 보았다. 압도적인 크기였기에 그 일부만 보여서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온몸이 자연 일부로 이루는 거대한 노인이었다. 거대한 숲을 이루는 수염을 긁적이면서 화난 얼굴로 자신을 발로 찬 것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무서운 것이 그것을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엄하게 내 잠을 깨우는 자가 누구······ 오오, 오르넵토스 님······, 오셨습니까?

자신들의 왕이라는 것에 그것도 잠깐이었다. 위엄 있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급하게 공손해졌다. 오르넵토스는 빙긋 웃으며 노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잘 지냈느냐?”

-정령왕께서 없는 날을 어찌 우리가 잘 지내겠습니까?

“뭐, 당연하지. 안 그렇겠어? 이렇게 잠자면 세계수는 누가 지키나? 명색이 파수꾼인데?”

-잠깐 누웠을 뿐입니다. 늘 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요.

꿈쩍도 안 하던 주제에. 오르넵토스는 그 말을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

“현재 세계수 상황은?”

-모두 그대로입니다. 야생에 맡겨진 채로 모든 균형을 유지하다 보니, 진전도 없으며, 퇴보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모두 그 세계수가 무너지는 바람에······.

거대한 노인은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그러자 오르넵토스가 그에게 뭔가를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씨앗을 구해 왔으니까.”

-씨앗을······? 오오!

거대한 노인이 오르넵토스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느릿하던 움직임이 갑자기 빠릿빠릿해지면서 그녀가 보이는 씨앗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틀림없는 질서의 세계수! 썩어 문드러지면서 더는 세계에 없을 거로 여겼던 물건을 여기에서 보다니! 이걸 어디서 구해 오셨습니까, 왕이시여!

오르넵토스는 우쭐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직접 만들었지······만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이 인간이야.”

뻔뻔하게 공을 가로채려던 것이 찔리는 모양인지, 말을 돌리며 유선에게도 공적을 나눠 주었다.

“세계수의 가지는 인간이 가져다주었어. 인간이 없었더라면 아마 만들지도 못했을 거야.”

-인간? 아아, 혹시 옆에 계신 인간을 말씀하시는군요.

거대한 노인은 유선을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법은 다르지만, 진심으로 고마운 기색을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협력해 주어 고맙소, 작은 거인이여. 그대의 노고가 우리를 축복해 주는 씨앗이 되었소.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유선은 손을 흔들어 그 감사의 인사에 겸손하게 대꾸했다. 엉덩이 무겁게 앉았던 거대한 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울 생각이시라는데, 그렇다면 기꺼이 비켜 드려야지요. 정령왕께서 신이 버린 세계를 다시 일으키신다는데,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쿵-쿵-.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기며 다시 자신이 앉을 만한 장소를 모색하러 떠났다. 거인이 일어나서 자리를 떠나자, 빈 공터만이 남았다. 그녀가 말했던 그 공간이 확실했다.

“살짝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이쪽이 가장 적절한 것 같은데.”

야구장 하나를 지어도 될 만큼 넓은 공터에서도 좁은 모양인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령왕다운 얼굴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괜찮겠지. 다른 곳이랑 멀지도 않고.”

“정말 안일하게 구는구나. 그런데 다른 곳이 어디야?”

“어디긴, 세계수가 꽂힌 곳이지.”

세계수? 유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의 눈에는 똑같은 풍경뿐이었다. 세계수라고 할 만큼 거대하고 묵직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어디에 있는데, 세계수가?”

“여기까지 왔는데도 안 보인다고?”

오르넵토스가 조금 놀란 듯이 물었고,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이지만, 그런 것 같은데······.”

“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계약자라면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계약자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구나.”

유선은 묘하게 비웃는 어투 같아서 살짝 심기가 거슬렸다. 유선은 오르넵토스를 째려보며 물었다.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

“당연하지. 원래라면 계약자가 볼 세계수는 저거야.”

오르넵토스가 서쪽 허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선은 뭔가를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했다. 완전히 안 보이나 했는데, 그 순간 유선은 뭔가 시야에서 굴절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면적은 저 멀리 있는데도, 시야의 절반을 차지하는 크기였다. 가까이 갔다면 그걸 눈치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것만 있는 게 아냐. 눈치 못 챘겠지만, 하늘에도 세계수가 있고, 그리고 하늘과 땅을 이어 주는 세계수도 있고, 땅에 생명력을 불어 주는 세계수도 있지. 그 종류는 아주 많고,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는 모습들로 아주 가득하지.”

“우리는 세계수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말 같네.”

“당연하지. 절대로 벗어날 수 없어. 무너지면 세계의 종말을 불러온다니까 그 모습을 확인할 방법도 없지. 그런 의미로 질서의 세계수는 그중에서 아주 뚜렷하게 보이는 세계수 중 하나야. 평범한 인간들도 눈만 있다면 볼 수가 있고, 대담하게 스태프 재료로도 쓰기도 하지.”

“그렇구먼.”

그녀가 들고 있는 세계수의 씨앗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터 한가운데에 서서 유선은 바닥을 신발로 벅벅 긁으며 오르넵토스에게 물었다.

“아무튼 이제 그 씨앗을 바닥을 파고 안에 넣으면 되지?”

“그래. 이걸 이제 심기만 하면 돼.”

오르넵토스는 자신의 줄기를 이용해 바닥을 파 씨앗을 심으려 했다. 그러자 엘레노어가 오르넵토스의 시야에 끼어들며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심어도 돼?”

“엘레노어가?”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키가 커진 오르넵토스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좋아! 한번 심어 봐.”

씨앗 심기가 어렵지도 않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지도 않기에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오르넵토스는 미소 지으며 그 씨앗을 엘레노어에게 건네주었다. 엘레노어는 자신의 두 주먹만 한 씨앗을 양손으로 잡아 보다가 유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떻게 심어야 해?”

유선은 친절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글쎄, 우선 바닥을 파야 하지 않을까?”

“바닥! 알 것 같아!”

엘레노어는 씨앗을 내려놓고, 아기자기한 손으로 바닥을 팠다. 딱딱한 바닥이라 모종삽이 필요하지 않을까 했지만, 바닥은 그녀의 손에 자비 없이 갈려 나갔고, 땅을 파던 엘레노어는 방실방실 웃으며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농사짓는 거 같아.”

“엘레노어는 그럼 농부겠네?”

“농부 같아?”

“세상에, 이런 귀여운 농부가 있을까 싶은걸?”

“히히.”

엘레노어는 거침없이 바닥을 팠다. 어느 정도 씨앗이 들어갈 만한 구덩이가 만들어지자, 유선은 그녀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될 거야.”

“이 정도면 돼?”

“응, 이제 심어 주자.”

엘레노어는 그 안으로 주먹만 한 씨앗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파낸 흙을 정성스레 다시 덮었다. 파낸 흙을 다시 덮어 주니 주먹만 한 씨앗이 들어간 게 티가 나게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엘레노어가 씨앗이 혹여나 빠져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손으로 흙을 꾹꾹 눌러 주며 마무리 지었다.

“유선 님, 배고파.”

“벌써 배고프니? 한 것도 없는데?”

“씨앗 심기도 했고, 일 많이 한걸. 새참 먹을래.”

자신의 흙투성이 손을 보여 주면서 말했다. 그래서 씨앗 심기를 자기가 한다고 했나? 그리고 새참이라는 건 어디서 들은 말일까? 유선은 그녀의 생각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우리 씨앗한테 물을 주고 그 남은 물로 라면 끓여 먹자.”

“나면!”

엘레노어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가져온 물을 조심스럽게 부어 주며, 씨앗 심기를 마무리했다.

***

정령계에서 볼일을 마치고, 오르넵토스가 다시 틈을 열어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만들었다. 그 틈을 나온 유선은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밖으로 나온 현실이, 정말로 현실인지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는 머리를 잡으면서 오르넵토스에게 말했다.

“어우, 다시는 정령계 못 들어가겠다. 토할 것 같아.”

“그래도 계약자 정도면 강한 편이야. 보통 다시 나와서는 걷지도 못한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유선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유선은 매스꺼운 속을 다스리려 심호흡했다. 그러다가 그의 시야에서 뭔가 잡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있네?”

사람들이 모여서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 보였다. 분명히 들어온 것은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 그리고 자신까지 합쳐서 3명이었다. 그리고 증원할 이유도 없었기에, 자신의 회사에 있는 헌터들이 이계의 틈 너머로 올 일이 없었다.

“우리 말고 다른 헌터들이 왔나?”

이계의 틈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른 헌터들과 조우하는 것은 흔하진 않지만 가끔 있는 일이었다. 사냥 루트를 짜고 일직선으로 달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유선은 그런 상황 중 하나라고 여기려고 했지만, 곧바로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뭐지? 이 불안감은······.’

유선은 그들에게서 좋지 않은 낌새를 느꼈다. 차림새는 시대착오적인 옷을 입었고, 헌터들의 장비라고 해 봐야 마땅히 부를 게 무기 한 자루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십 명 병력이 행군하듯 걸음마저 서로 맞추었다. 그들의 눈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헌터들이 모두 전사이니 감정을 보이는 것은 자제하겠지만, 지금처럼 불안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들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인형이나 박제 같은 죽은 느낌이 강했다. 움직이는 인형이란 말이 어울렸다. 그들이 고개를 돌려 유선의 일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 그 사내를 따라 유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그 자리에 섰다.

유선은 그들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단어를 보았다.

-적.

한 글자다. 딱 한 글자가 모두 공통으로 떠올랐다. 같은 동물이더라도 제각각 성격이 있지만, 그들은 전부 똑같이 생각하듯 한 글자만 띄운 채로 유선을 보았다. 그들이 천천히 유선을 향해 다가왔다.

뭔가 빼기에는 이제 늦어 버린 상황이었다. 유선은 일차적으로 구두로 경고했다.

“멈추세요. 지금, 당장.”

유선이 경고해 보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으로 들고 있던 제각각인 검을 양손으로 말아 쥐며 싸울 자세를 취했다. 명백한 적의를 보였다.

“계약자, 뒤로 물러서.”

오르넵토스는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알고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오르넵토스는 그들의 존재를 확신했다.

“요새 잠잠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잠잠한 날이 있을 수 없나 보네. 또 악마 녀석이 기어 나와서 심복을 뿌려 이런 행패를 부릴 줄이야.”

그것은 악마의 하수인들이었다. 공허한 눈동자에 비치는 악의가 마음을 읽지 않아도 물씬하게 풍겨 왔다.

“우으으······!”

엘레노어는 그들을 향해 살기를 뻗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명확한 신호였다. 하지만 그들은 물러서지도 않고, 그 살기에 대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유선은 지금도 그녀의 살기가 아프기 짝이 없는데, 그들은 그 살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르넵토스는 흘깃 유선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할까 하는 물음이었다. 유선은 그녀가 생각하는 방법은 안 물어봐도 뻔했다.

“부탁할게.”

적을 완전히 섬멸해 버리는 것. 계약자의 동의를 얻은 오르넵토스가 그들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몸을 풀었다.

“마법은 이제 좀 질리기 시작했고, 인간같이 생긴 놈들이 나왔으니까 오랜만에 재미를 좀 보자고.”

오르넵토스가 양손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몸을 이루던 입자들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몸의 형태를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르넵토스의 몸이 완전하지 않은, 입자 형태의 발로 박차고 뛰어가 재빠르게 그 인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입이 길쭉하게 늘어나면서 위아래로 갈라졌다.

오르넵토스, 정령왕을 이루는 인간의 몸이 늑대의 형상으로 탈바꿈했다. 붉은 등 갈기를 지닌 커다란 늑대가 되어 포효성을 내질렀다.

-크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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