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46. 정령계 (1)
정령계로 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평소와 같이 이계의 틈 하나를 붙잡고 들어가는 것까진 평소에 헌터 일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선은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르넵토스는 자신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자, 원래 힘이 돌아와 다시 몸집이 성인만 해졌다. 마나가 몸에 도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좋아, 여기서 그다음엔······.”
그녀는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뭔가를 그렸다. 지휘하는 듯이 움직이던 손이 허투루 쓰지 않는 듯, 허공에서 반응이 일어났다. 빛이 일그러지고, 그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이계의 틈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이계의 틈은 공간이 깨졌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이것은 왜곡되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오르넵토스는 그 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해서 정령계로 들어갈 거야.”
유선은 그 방법을 보고는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어찌 됐든 상관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렇구먼. 그나저나 오르넵토스 님!”
“왜 그래, 계약자? 평소답지 않게 님 자를 붙이고 말이야.”
“평소답지 않은 건 너입니다만······.”
유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본 것에 대해 말했다.
“뭐 잘못 먹었냐? 왜 그렇게 걷는 폼이나 서 있는 폼이 왜 그래?”
그녀가 걷는 폼이 평소 같지 않았다. 잘난 척하던 녀석은 어디로 가고, 조신한 여자아이처럼 걸어오는 것을 보고, 유선은 자신이 꿈을 꾸나 싶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르넵토스가 성인 모습을 하면 그때는 풍기는 오라가 다르지만, 그걸 생각하더라도 그녀의 행동은 부자연스러웠다.
“아무것도······?”
“······.”
딴청을 피우는 모습에 유선은 뭔가를 숨김을 확신했다. 조심스럽게 교감의 반지를 꼈다. 그리고 그녀의 속내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라지만, 유선은 이미 그녀의 속내가 보였다. 그녀의 머리카락, 정확히는 머리카락처럼 나열된 붉은 나뭇잎 뒤에 와인을 숨겼다고 나왔다.
“그놈의 술이냐!”
“윽!”
오르넵토스는 한 방 먹었다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발뺌하려고 해 보지만, 유선의 표정이 너무 단호하기에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머리카락 뒤에 숨긴 와인 병을 꺼냈다. 유선이 매주 주던 와인이었다.
“이거 한 병이야. 고작 한 병이라고.”
그렇게 말하지만, 유선이 오르넵토스의 머릿속을 봤을 때는 전혀 아니었다.
“62병.”
“켁!”
“그 머릿속에 어떻게 62병이나 숨겼냐?”
“뭐야, 계약자 그걸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흡!”
자신의 입을 막아 보지만, 이미 모두 들통이 난 상태였다. 유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다기보다는 생각보다 별거 없어 안도했다.
“뭐 그런 걸 숨겨?”
“그렇지만 계약자는······ 그게······.”
말을 흐렸지만, 머리 위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으니까.’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술을 주는 데 엄격했을 뿐이지, 술을 마시나 가져가는 것까지는 뭐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제 발 저린 것을 보면 여태 받아먹은 게 섞여 그런 것이 분명했다.
“62병이라······! 마시는 거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을 텐데, 몰래몰래 받은 게 도대체 몇 개냐?”
“예전에 받았어. 최근엔 받은 적 없어. 정말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게 분명히 자기도 기억이 잘 안 나는 것 같았다. 유선은 그렇게까지 추궁하며 오르넵토스를 잡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손짓하며 와인 병을 도로 머릿속으로 집어넣게끔 했다.
“······알아서 해. 어차피 네 거지 내 게 아니니까.”
신줏단지처럼 매끄러운 유리면을 만지는 꼬락서니가 유선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자식들을 구해 낸 어미처럼 안심한 얼굴로 다시 머리카락 뒤로 와인 병을 숨겼다. 불쌍하게 짓던 표정을 거두며 유선에게 말했다.
“아무튼, 이제부터 계약자, 내 손 잘 잡아야 할 거야. 정령계로 들어가는 길은 상상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볼 테니까.”
“아, 응.”
유선은 오르넵토스가 건네는 손을 잡았다. 오르넵토스의 반질반질한 손을 꽉 잡자, 그녀는 구멍 안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상상 이상을 볼 것이라는 말에 유선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동식물, 주변을 이루는 세세한 배경마저도 제대로 상상할 수 없는 기괴함과 신비로움 사이를 오갔다.
정령계로 들어가는 곳은 흐물흐물 녹으며, 동시에 딱딱하게 굳었고, 환하게 빛나며 동시에 형상이 어둠에 묻혔다. 모순이 공존하며, 대립이 화합을 이루었다.
“계약자, 정신 차려야 해.”
“아······.”
유선이 정신을 놓고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와중에도 발은 계속 움직였다. 오르넵토스가 가는 방향의 반대로 가다가 그녀의 팔에 걸리며 멈춰 섰다. 오르넵토스가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어디로 떠내려갔는지도 모르는 채로 있었을 게 분명했다. 제일 길을 헤맬 것 같은 엘레노어는 의외로 한눈팔지 않고 그를 잘 따라왔다.
“여기가 아니고······ 여기는 함정이고······. 여기다!”
한참을 걷던 오르넵토스는 마침내 출구를 찾았다. 감각이 부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정령계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기자기한 것들도 있지만,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것도 있으며, 상식을 뒤흔드는 가지각색의 볼거리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푸르고 뜨거운 강, 차가운 불, 무른 철, 단단한 털······. 모순적인 것도 모두 허용해 주는 공간이었다. 이상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들어올 때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누가 왔어.
-누가? 누가?
아기자기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고목들 사이에서 놀던 작은 정령들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유선과 오르넵토스를 보았다. 그러자 모습을 보이던 작은 정령들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오르넵토스 님이다!
-왕이 왔어?
-왕만 온 게 아니야!
-뭔데? 뭔데?
아기자기한 정령들이 총총걸음으로 뛰어와 그들의 입장을 반겼다. 성인 폼인 오르넵토스는 특유의 왕 같은 진중함을 보이며 그들을 반겼다.
“다들 잘 있었느냐?”
-네!
-심심해 죽는 줄 알았어요!
-얘가 막 정령왕님 욕하고 그랬어요!
-얘는 오줌 지렸대요!
정령들이 텐션이 높았다. 끊임없이 오르넵토스에게 재잘재잘하며 이야기했고, 오르넵토스는 그걸 받아 주었다. 그걸 다 들을지 의문이었다.
-우아, 인간이야!
관심 많은 정령들은 오르넵토스에게만 관심이 쏠리지 않았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인간이 왔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유선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리고 유선의 뺨을 꾹꾹 누르며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보들보들해. 신기하다.
-나도, 나도 만져 볼래.
“으어어······ 그만해 줘.”
-그만 해 달래.
-재밌어!
호기심에 뺨을 꾹꾹 누르는 정령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맬 뿐이었다.
-인간만 있는 게 아니야!
-우와앗, 도마뱀까지 와 버렸어!
유선을 만만하게 보는 건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엘레노어에게 향하는 시선만큼은 조심스러운 게 확실하게 보였다. 다만 언행은 다른 드래곤이 들었다면 확실히 화날 만한 호칭이었다.
“나 도마뱀이래!”
하지만 엘레노어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기에 재미있다는 듯이 까르르 웃으며 넘어갔다. 하지만 그건 권위와도 상관있는 일이었기에, 오르넵토스가 그 실언한 정령을 무섭게 째려보았다. 실언한 정령은 그 눈빛을 피해 달아났다.
유선은 그것을 보고 오르넵토스에게 말했다.
“정신이 없네.”
“정령계가 이런 곳이니까. 그래도 계약자는 잘 버티는 편이네. 다른 사람들이라면, 아주 싫어했을 텐데.”
“나도 여기가 썩 좋다고 생각하진 않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흔들리는 배경들이 면역이 없다면 어지러워 미쳐 버리지 않을까 생각하게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오르넵토스가 뭔가 생각났는지, 정령들을 보며 말했다.
“아, 너희한테 줄 게 있어.”
오르넵토스는 자신의 몸을 이루는 일부 줄기를 이용해 머릿속에 숨겨 놓은 와인 병을 꺼내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륵-.
와인 병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머리 뒤에 그만한 공간이 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총 62병이나 되는 와인과 고급 양주들이었다.
-술이다!
-정령왕님께서 술을 가져오셨어!
-으아아, 보기만 해도 냄새가 막 저릿저릿 떨려오는 거 같아.
정령들도 술을 상당히 밝히는지, 오르넵토스의 와인 병을 받고는 코르크 마개를 문질문질하며 따 버리고 싶은 욕구를 보였다. 물론 오르넵토스도 그들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거 내 방에 가져다 놔.”
-우리 건 없어요?
-우리도 마시고 싶어.
-마실래, 마실래!
금방이라도 한 병을 따서 마실 것 같은 기색을 보였다.
“마시기만 해 봐라.”
그러자 오르넵토스는 싸늘한 눈동자로 그들에게 엄포했다. 다른 한편으로 왕다운 기세였다.
“코르크 마개가 조금이라도 뜯겨 나간 흔적이 있거나 병에 침이 살짝이라도 묻어 봐. 운반하는 너희에게 책임을 묻겠다. 너희가 아주 좋아서 죽는 영겁의 간지럼 형에 처할 테니까, 알아들었지?”
-히이이익!
-알겠슘돠!
-임무, 임무!
아까 전만 해도 풀려서 와인을 탐하던 정령들은 빠릿빠릿한 움직임으로 와인을 들고 이동했다. 뒤틀린 공간 속에서 잘 뛰어다니며 그들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오르넵토스는 겁먹은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가만히 듣던 유선은 그 형벌이 도대체 정령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영겁의 간지럼 형이 뭐야? 뭔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 듯한 이름인데······.”
“음, 그러니까······ 새끼발가락을 모서리에 찧는 거 있지?”
그거로 예시를 들려는 모양인데, 형벌의 이름과 영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일단은 수긍해싿.
“어, 그런데?”
“그거에 수천 배 정도 더 아프고, 지속적인 형벌로 생각하면 될 거야. 죽지도 못해서 강인한 놈이라 해도 5분만 있으면 죽여 달라고 아우성인 극형이지.”
“어우······.”
어중간한 고통이면 상상이 잘되지만, 강렬한 고통은 전혀 와 닿지 않는다는 게 맞는 말인 듯했다. 죽지도 못하고 그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하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오르넵토스는 그 믿지 못하는 유선의 얼굴을 보고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키득거렸다.
“맛보기로 한 번 보여 줘, 계약자? 신경이 타들어 가다 못 해 한순간에 녹는 경험을 할 거야.”
“됐어. 뭘 시키려고······?”
유선은 오르넵토스의 섬뜩한 제안을 거절했다. 오르넵토스는 키득 웃으며 유선에게 말했다.
“아무튼 술은 맡겼으니까, 이제 씨앗을 심으러 가야겠네.”
본래 목적인 씨앗 심기를 할 차례였다.
“그러고 보니 정령계에도 세계수들이 있다고 했지?”
“응, 그 세계수가 뭔지 보고 싶어서 그래?”
“뭔지 볼 수 있어?”
세계수가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큰지 궁금했다. 막상 정령계로 들어서니 세계수라 할 만한 커다란 나무들이 없으니 그 궁금증은 더욱 증폭했다. 그런 유선의 마음에 오르넵토스가 대답했다.
“나중에 보여 줄게. 지금은 몇 번을 말해 봐도 잘 모를 거야.”
“그래? 그렇다면야.”
그녀의 말대로 조금 더 인내하기로 했다. 오르넵토스는 씨앗을 심으려고 터를 찾으러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