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45. 세계수의 씨앗
“요즘 뒤숭숭해서 미칠 것 같소.”
기율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유선을 보며 말했다. 유선은 뜬금없이 시작되는 말에 가만히 멍멍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 예의상이라도 그에 대한 이유를 물어봐야 할 것 같아 그에게 물었다.
“왜?”
“업무는 업무대로 늘어나고, 미팅도 늘어나고, 뭐 그것까지는 제 일이니까 어떻게든 버티겠는데, 이놈의 미디어 정치질들이 너무 짜증이 나서 못 견디겠소! 이것 좀 보시오!”
기율은 말 잘했다는 듯이 재빠르게 화면을 띄웠다. 그 화면 문구에는 이렇게 적혔다.
-Q헌터 컴퍼니 이사, H사 그룹 회장 딸과 열애설!
“요즘 일 때문에 정신없는데, 뜬금없는 열애설이 터져서 기사 전문에 나오고 난리요.”
“······.”
기율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탄하듯이 그에게 말했다.
“정말 미쳐 버리겠소. 아버지도 갑자기 이게 뭐냐고, 평소 행실이 어떠니 그러고, 또 저쪽 H사에서도 내 딸한테 무슨 개수작을 부리느냐고. 네가 진정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망나니 새끼야, 라면서 막 욕도 하고······. 그리고 막내딸은 존나게 못생겨 가지고 ‘댁 따님께서는 짚신도 짝이 있으니 메주와 결혼하실 겁니다.’라고 하고 싶어도 꾹 참아야 하는 게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어, 음······.”
유선은 그 출처를 확실하게 알기에 이걸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해 주었다. 물론 회피하는 쪽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네.”
“진짜 기자 놈한테 물어보니까 이건 확실한 정보라면서 막 떠들지 않소! 헌터 회사 내부에서 누가 떠벌리고 다녔다는데, 그 헌터 이름을 안 대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오.”
기율은 그 헌터 앞에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표출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유선은 철저히 관전 모드로 돌입해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니? 그 헌터를 알아서 어떻게 하게?”
“어떻게 하긴! 추궁하고! 왜 그딴 소리를 했는지 물어보고! 확 잘라 버려야지!”
“······그거 정말 너한테 안타까운 일이겠구나.”
“당연······ 어째서 내가 안타까운 일이오?”
“글쎄, 헌터들은 귀중하니까 그렇지 않을까?”
그러자 기율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요즘 지천에 널린 게 헌터요! 유니콘이 망하면서 이제 회사가 얼마나 귀해졌는데, 그런 헌터 따위 알게 뭐요! 루머나 퍼트리고 다니는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은 우리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 거요! 이렇게 말이오. 크흠흠······. 야, 나가.”
영화에나 나올 법한 망나니 대기업 회장 아들내미의 카리스마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크흡, 그렇구먼.”
유선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평정을 되찾으며 기율에게 말했다.
“기율아, 그 헌터 이름 알게 되면 나중에 나도 알려 주라.”
“형님도 조지게요?”
“아, 음······ 내가 조지면 내 손이랑 몸만 아플 것 같으니까, 내 앞에 끌고 와서 직접 조져 줘.”
“알겠소!”
유선은 기율이 활기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그가 이름을 듣는 날이 기대되었다. 그 루머를 퍼트린 것이 자신임을 알고, 했던 말에 어떻게 변명할지 궁금했다.
유선은 멍멍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계속 이렇게 한가롭게 머리나 쓰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유선은 오늘 아침, 루데릭에게 사과했던 만큼 결심했다.
‘애들의 다른 모습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보였다. 유선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었다. <교감의 반지>. 본래 이름을 가진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교감 특성을 강화해 주는 능력이 있어, 유선은 그 반지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유선은 반지를 꼈다. 증폭되는 오감, 그리고 평소보다 더욱 강해진 듯한 힘. 그리고 시끄럽게 울리는 목소리들. 그 목소리들을 떨쳐 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에 집중해서 듣는 연습을 많이 해 능숙해졌다.
유선은 그대로 엘레노어의 방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방에서 크레파스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문이 열리자, 노래를 흥얼거리던 엘레노어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반겼다.
“유선 님, 왜 와써?”
“그냥, 엘레노어 보고 싶어서 왔지.”
“옆문으로 보면 되는데, 바보~.”
엘레노어는 배시시 웃으며 그를 반겼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엘레노어를 가장 먼저 살펴보았다.
그녀의 숨겨진 이면이 아마 가장 궁금했다. 등급은 EX. 그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세계관의 강자, 드래곤! 루데릭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데, 엘레노어에게는 뭐가 숨겨졌을까, 하는 마음에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음······.”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대충 그녀의 상태를 요약하자면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 기껏 해봐야 ‘나면이 제일 좋아.’라는 문구가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월등히 많은 것뿐이었다.
꼭꼭 숨겼다고 보기보다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의미 같았다.
‘막상 하고 보니 김이 엄청 새네······.’
없으리라고는 믿었지만, 확신하고 나서는 안심했다.
“왜 한숨을 부으~ 하고 내시어?”
“아니야. 그냥 우리 엘레노어는 참 밝은 아이구나 생각했어.”
“엘레노어, 밝은 아이야!”
엘레노어가 양손을 들며 기뻐했다. 유선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잠깐 놀아 줄까 하는 생각에 그녀가 그리는 그림에 관심을 가졌다.
“지금 그리는 게 뭐야?”
“가족사진. 여기에 유선 님이랑, 나랑, 멍멍이랑······ 동생은 지금 그리고 이써!”
“그렇구나. 근데 한 명이 빠진 것 같네?”
“한 명? 누구지······?”
엘레노어는 자신의 그림을 들어 보며,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정답을 알려 줄까 하며 입을 떼려던 찰나.
“드디어 완성이다아아아!!”
그 정답이 뜬금없이 소리쳤다. 오르넵토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면서 동시에 유리문을 박차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쾅!
그리고 오르넵토스가 한 번 더 유리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뛰어나오면서 엘레노어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뭔가를 든 채로 유선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계약자, 계약자 이것 봐! 100일 만에 드디어 완성했어!”
“이게 뭔데?”
오르넵토스가 뭔가를 만든다고 들은 적도 없었고, 그녀의 손에 들린 돌멩이 같은 것은 준 기억도 본 적도 없던 물건이었다.
“뭐기는! 지난번에 계약자가 나한테 준 스태프 가지 있잖아! 그거야!”
“아, 이게 그거냐? 씨앗으로 만든다는 거?”
아르젤의 지팡이 원목. 그게 필요하다고 해서 유선은 오르넵토스에게 세계수의 가지를 거의 뺏기다시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거로 씨앗을 만든다고 했는데, 설마 정말로 씨앗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유선은 오르넵토스가 들고 있는 물건을 보았다. 질서의 세계수로 만들어진 스태프로 만든 세계수 씨앗. 그 크기는 한 손에 쥘 만한 돌멩이 수준이었다.
“이거로 이제 다시 질서를 위한 세계수를 만들 수 있어!”
“그렇구나.”
그 세계수의 씨앗이 만들어진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유선은 반지도 끼고, 그 틈에 다음 타자로 지목하려 했던 오르넵토스를 관찰했다. 그녀에 관한 정보가 정신없이 떠올랐고, 유선은 그것을 빠르게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유선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계약자?”
“흠······.”
전부 다 훑어본 결과, 오르넵토스에게도 충격적인 소식 같은 건 없었다. 그녀는 애초에 숨김없이 모두 보인다는 듯 그녀의 속내 정보들은 대부분 유선이 아는 거였다.
‘하기야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계약했겠지.’
“뭐야, 갑자기?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해?”
오르넵토스는 살짝 기분 나쁘다는 듯이 물었다. 유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런 걸 만들 만큼 아주 유능해서 그랬어.”
“당연하지. 좀 더 찬양해도 된다고!”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유선은 다시 오르넵토스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건네주었다.
“그래서 이제 이걸 어떻게 할 건데?”
“심어야지. 나무가 자라도록 여건도 만들어 주고 말이야.”
“바로?”
그의 물음에 오르넵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세상을 저 지경으로 둘 수는 없으니까. 빨리 원상태로 만들어서 새로운 생명이 조화를 맞추도록 해야지.”
“하지만 그걸 지금 심는다면 누군가가 그 씨앗을 노리고 오지 않을까?”
악마들은 세계수를 가장 먼저 무너트렸다. 그만큼 세계수가 중요할 텐데, 다시 자라게 만들려는 속셈이라면, 그들 중 일부는 분명히 눈치챌 것이다.
“세계수는 폭발적으로 자랄 거라서 그 녀석들은 모를 거야. 세계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다른 세계수와 얽히고, 일주일 만에 한 번에 솟아올라서 하늘을 꿰뚫을 거야. 그렇게 질서의 세계수가 자리를 잡거든.”
“그렇구나.”
뿌리부터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다음에 성장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자란다면 아마 유선은 평생 싹도 못 볼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건 인간들이 사는 곳에다가 심을 게 아니라 정령계에 심을 생각이야. 아무래도 그게 가장 안전하니까.”
“현신을 풀어서 바로 갈 거야?”
마나의 공급이 끊기면 강제적으로 자신의 세계로 소환되었다. 그렇게 해서 돌아가나 싶었지만, 오르넵토스는 고개를 저었다.
“현신을 풀어 버리면, 몸만 저쪽으로 가는 거라서 씨앗을 못 가져가. 이계의 틈, 그 너머로 들어가서 가져가야 해.”
“게이트 너머로 가서?”
“정령계로 가야지! 나의 나라로 돌아가!”
유선은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감탄했다.
“호오, 그렇구나. 그러면 그 방법대로 나도 들어갈 방법이 있다는 말이겠네.”
“당연하지. 인간도 들어가겠지······만······ 어째서 그런 걸 물어?”
오르넵토스가 불안한 눈치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유선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같이 가자.”
“같이 가자고?”
오르넵토스의 말에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들의 세계에 한번 가 보고 싶기도 하고. 그 정도는 계약자한테 해 줄 거잖아!”
“무슨 정령계를······ 아무리 그래도 허락도 못 받은 인간을 들여보낼 수는 없어!”
“그 허락 권한은 누구한테 있는데?”
“······나.”
정령왕인 만큼 모든 권한을 지니는 걸 생각해 보니 자신이었다. 유선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허락 안 해 줄 거야?”
“그, 그러니까······ 계약자는 아직 자격이······.”
말을 더듬더듬, 뭔가 묘책을 떠올리려고 하지만, 떠오르지 않는지 말이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오르넵토스는 상당히 꺼리는 얼굴이었다. 슬슬 머리가 아파지는 탓에 반지를 빼 버려 마음을 읽는 것도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유선은 조금 치사한 방법을 사용했다.
“엘레노어.”
“응?”
“같이 소풍 가는 거 좋아?”
“소풍? 갈래, 갈래! 누구랑 같이 가는데?”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엘레노어. 유선은 오르넵토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쟤랑.”
그러자 엘레노어는 들뜬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칭구랑? 응, 갈래, 갈래! 유선 님이랑, 칭구랑 같이 가면 재미쓸 거야!”
엘레노어는 양팔을 들면서 기뻐했다.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가 둘이서 같은 던전에 들어가는 건 아마 처음이니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오르넵토스는 영 좋지 않다는 듯 살짝 인상을 썼다.
“윽, 비겁하다, 계약자······.”
“뭐가 비겁해?”
“아니야! 으으, 내 계획이······.”
오르넵토스는 고개를 휙 돌리며 돌아갔다. 유선은 그가 왜 비겁하다고 하는지 알았다. 엘레노어가 있으면 분명히 거절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말에 계획이라는 것은 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해 봐야 어쭙잖은 짓이라는 것만큼은 확신했다.
“정령계라······ 기대되네.”
유선은 정말로 소풍 떠나는 어린애가 된 같아 기대되었다.
“유선 님, 유선 님.”
“응?”
엘레노어가 자신의 그림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안 그린 한 명 누군지 모르게써.”
답이 나왔다고 생각한 유선은 아직 헤매는 엘레노어의 말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