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44. 진솔한 대화
“끄으으으······”
여긴 어딜까? 유선이 눈을 뜬 곳은 이상했다. 분명히 고깃집에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와 있을까?
“일어나셨나요?”
아름답게 웨이브를 넣은 검은 생머리, 창백하다고 여길 정도로 뽀얀 살결, 그것에 잘 어울리는 장밋빛 드레스······. 그녀는 분위기 있는 음악과 조명에 어우러져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반응을 보니 물 한잔하셔야겠네요. 아직 정신을 못 차리신 것 같으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유선은 그런 진부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아직 술이 깨지도 않았고, 눈앞의 여인을 보고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아름다우시네요.”
“어머, 고마워요. 우선 물이나 마시고 이야기하죠.”
여인은 능숙하게 받아넘기며, 유선에게 얼음물을 건넸다. 유선은 그 물을 의심 없이 받아마셨다.
“정신은 어느 정도 깨셨나요?”
“네, 덕분에.”
그렇게 말했지만, 몽롱한 정신은 여전했다. 유선은 그녀에게 물었다.
“여긴 어디죠?”
“여긴 바예요. 조용히 이야기하도록 외곽에 자리한 바랍니다.”
“외곽이라······. 2차라도 왔나요? 아니지, 2차를 왔다면 주혁이랑 도연이가 있어야 할 텐데······ 윽.”
정신을 깨우고 생각하려 하자, 머리가 지끈 아파졌다.
“굳이 따지자면 유선 씨에게 2차가 될 만한 자리지요.”
유선은 그 여인이 부르는 호칭이 마음에 걸려 물었다.
“유선 씨라······ 저를 아시는 것 같네요.”
“당연히 알죠. 유선 씨는 유명한 사람이잖아요. 유명한 테이머지요.”
“말이 테이머지요. 저는 제 사역수 마음도 모르는 놈입니다. 그런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어요.”
“그런가요?”
“네, 그러니 술을 좀 시켜 주시겠어요?”
“네, 알겠어요.”
여인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 주었다. 분위기 있는 바인 만큼 고급술을 줄 줄 알았지만, 의외로 생맥주였다.
“맥주는······.”
“유선 씨 상태에는 이런 술이 좋아요. 도수도 낮고, 배가 불러서 나중에 못 먹게 되는 술 말이에요.”
“더 취하고 싶어요.”
“그 이상 취하고 싶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복잡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요. 늘 풀어 오려고 했지만, 가끔은 벗어나고 싶군요.”
“생각하기 싫다고 해서 멈춰 버리는 건 좋지 않아요.”
“그런가요?”
“네, 그렇지요. 그러니 저와 함께 이야기하죠.”
“저는 술 마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이야기하다 보면 재밌을지도 모르죠, 안 그런가요?”
여인은 어떻게든 유선과 이야기하려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려고 했다. 유선은 가만히 그 여인을 보다 그녀에게 제안했다.
“좋습니다. 그냥 이야기하면 재미없을 것 같으니까, 게임을 하죠.”
“무슨 게임 말인가요?”
“진실 게임입니다. 진실을 말하거나, 술을 마셔서 넘기거나 둘 중 하나를 하죠.”
“재밌겠네요. 이 게임은 제게 많이 유리하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술을 안 마셨으니까요?”
유선이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아뇨.”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저는 진실만 말하니까요.”
장난스러운 분위기와 다르게 사뭇 진지한 기색이 강했다. 유선은 그 말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럼 취하신 것 같은 유선 씨가 먼저 하시죠.”
“좋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질문을 하죠. 우선 그쪽 이름부터 말씀해 주시죠.”
“음~.”
여인은 술을 홀짝 들이켰다. 유선은 그 잔에 다시 맥주로 채웠다.
“첫 장부터 안 좋은데요?”
“첫수가 좋다고 게임을 이기지는 않지요. 자, 그러면 제 차례인가요?”
“아뇨. 대답할 때까지 계속 마셔야 할 겁니다.”
“그런가요? 알겠어요. 자, 질문하세요.”
“제게 악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뇨. 전혀요.”
여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즉답했다.
“뭐 당연하겠죠. 그쪽 차례예요.”
“유선 씨에게 사역수는 몇 명이나 있나요?”
“세 명과 한 마리 있습니다. 하나 빼고 전부 인간처럼 생겼으니깐 명으로 해도 되겠죠?”
“네, 마음대로 하셔도 상관없어요. 그건 물음으로 치고 대답한 거로 할게요.”
“영악하군요.”
“저는 뭔가 알고 싶은 게 매우 많아서요. 그리고 그럴 때는 급한 사람이랍니다. 후후.”
교태를 부리는 웃음을 흘렸다. 유선은 비위를 맞추는 듯한 눈웃음을 항상 싫어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웃음은 너무 매력적이었다. 눈동자 색깔 때문인 듯했다.
“여자 친구가 있나요?”
“없습니다. 다시 제 차례군요. 저를 이 바에 끌고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실 가장 먼저 물어봐야 할 질문이었다. 여인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진솔한 대화가 하고 싶어서요.”
“진솔한······ 대화 말인가요?”
“그 이상은 다음 질문으로 주시죠. 이젠 제 차례예요.”
여인은 자신의 주도권을 잡을 때 놓치지 않으려 했다. 사소한 개인 정보를 묻던 처음 모습과 다르게 본격적이라는 듯이 테이블 위에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최근에 관계 때문에 서원한 게 있으신가요?”
“······.”
유선은 입을 닫고 술을 마셨다.
“그쪽도 한 잔 마셨네요.”
“이건 어쩔 수 없어서요.”
“알겠어요. 다음 질문을 하죠.”
다음 질문이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상처 준 적 있나요?”
“······.”
유선은 그녀의 말에 다시 한 번 더 마셨다. 다시 맥주를 채우고 게임은 재개되었다.
소중한 사람이 미워지기라도 했나요?
미워지는 게 아니라 무서워지나요?
턴은 여인 쪽으로 묶였다. 유선은 대답하지도 못하고 그저 술만 마실 뿐이었다. 몇 잔을 마셨을까, 그녀가 유선의 행동을 보며 물었다.
“8잔째, 연거푸 마시기만 하시네요. 술이 그렇게 좋으신가요?”
“······.”
이것도 대답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여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 말 못 할 사정이겠죠? 이해한답니다.”
“아뇨······.”
“네?”
“말 못 할 사정이라는 게 아니라 제가 한심해서 그럽니다.”
다시 빈 잔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마시며 대답했다.
“한심해서 잊어버리고 싶어서 그냥 마시는 거예요.”
“······.”
여인은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한심한 것도, 불쌍한 것도 그 어떤 감정을 보이지 않으며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유선은 다시 빈 잔을 채웠다. 그리고 마시려 잔을 들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다가와 잔을 내려놓게 했다.
“아직 게임 중이에요. 유선 씨, 이제 질문을 하실 차례예요. 제 질문에 대답하셨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유선이 대답한 것 같았다. 술을 마시려던 유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죠.”
질문.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머리가 핑 돌았다. 질문이라면 이것뿐인 것 같았다.
“최근에 말이죠······, 한 꼬맹이가 있어요······. 루데릭이라고 하는 애인데······.”
유선은 첫 문을 열자, 그 이후로는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율의 연애사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와 로맨스를 꾸린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진솔한 루데릭과 자신의 이야기였다. 믿는 후배들과 있으면서도 하지 않던 말을 처음 본 여인에게 했다.
그렇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굳이 이유를 꼽으라면 그녀는 이상하게도 편했다. 그녀의 몸짓, 표정, 그리고 눈동자가······. 무슨 이야기든지 간에 다 받아 줄 것만 같았다.
뭔가에 홀린 듯이 처음 본 여인에게 자신의 가정사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유선은 취기가 돌아 그런 우스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할 뿐이었다.
유선은 여인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여인은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더니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네, 정말 바보 같죠?”
“바보 같네요, 정말.”
“하하······.”
“그런 거로 고작 자기 마음도 몰라서 이야기도 못 하고 쩔쩔매는 게 참 바보 같아요.”
묵직하게 말하는 여인. 유선은 그녀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상처를 주는 거잖아요. 애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하나요?”
“조금 주면 어떤가요? 어차피 세상은 고통스럽게 돌아간답니다.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아 버린 것은 그 아이 마음에도 탐탁지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유선 씨가 그 사실을 피하시면 그 아이는 뭐가 될까요?”
고통만 남겠지. 묵언에서 나오는 수많은 의심이 자신의 가슴을 찔러 괴로울 것이다. 유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네요······.”
“그럴 때는 유선 씨가 제대로 말해 줘야만 해요. 그리고 그걸 풀어야지요. 관계가 언제까지고 좋을 순 없어요. 상처를 받으면서 서로 보듬는 것······ 아닐까요?”
“······.”
당신의 말이 맞는다, 당신의 말이 틀렸다. 유선은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머릿속에서 불현듯이 뭔가가 떠올랐다. 루데릭에게 느낀 불안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떠올랐다.
“걱정되는 게······ 뭔지 알 것 같아요.”
“뭐가 말인가요?”
“언젠가는 그 아이가 말한 적 있어요. 절대로 그 아이와 저는 함께 행복해질 수가 없다고 했거든요.”
“······그런 말을 했군요.”
여인은 뭔가 슬프게 미소 지었다. 유선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게 떠올랐어요. 당시에는 별로 생각 안 했는데······ 막상 마왕의 자식이라니까, 불안해지더라고요. 최근에 렛놈이라는 놈 때문에 큰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모든 걸 쿨하게 넘겼다고 여겼는데······. 그게 제 머릿속을 괴롭혀요. 떠올리려 하면 부정했고,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만들었던 게 분명······하네요.”
“그렇군요. 유선 씨는 없는 걱정을 만들어서 하셨군요.”
“그런 것······ 같아요.”
여인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감쌌다.
“상처받을 거로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은 충분히 자상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매 순간 자상할 필요 없어요. 그저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것, 그것을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니까요.”
유선은 채워진 잔을 비웠다. 그리고 더는 마시지 않고 그 여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뜬금없지만, 한 번 더 말해도 될까요?”
“말하세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름다웠다. 특히 그 두 눈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조명 아래, 루비처럼 빛나는 그 붉은 눈동자가.
“후후, 그렇죠? 유선 씨가 좋아할 줄 알았어요.”
“제가······ 말인가요?”
여인은 성숙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저는 유선 씨에 대해서 많은 걸 알아요. 유선 씨가 좋아하는 여자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식으로 차려입으면 좋아할지, 또 어떤 곳에 점이 있으면 좋을지도 말이에요.”
“그것 완전 스토커 같은······ 행동이군요.”
“그렇죠? 어찌 됐든 간에, 그렇지만 저도 막상 이런 차림을 하면 부끄럽답니다. 그리고 막연하고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상상의 공포에 몸을 맡기기도 하지요.”
여인은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감각에 유선은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유선 씨가 이렇게 좋아해 주면서 저는 비로소 그 불안함에서 해방했어요.”
“만일 하나······ 제가 싫다면요?”
“상처는 받겠지만, 이렇게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서 다른 한편으로 안심했겠지요.”
유선은 눈이 점점 감겨 오는 것이 느껴졌다.
“말해서······ 말이군요.”
“네, 그렇지요.”
유선은 여인의 몸에 기대었다. 몸에서 은은히 퍼지는 라벤더 향. 유선은 그 향기에 취해서 천천히 잠에 빠져들어 갔다.
“마지막 질문을······. 좀······.”
“게임 룰에 어긋나지만······ 해 보세요.”
“당신의 이름······ 가르쳐 주세요.”
이름. 맨 처음에 물었던 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술을 들이켜면서 그에 대한 대답을 피했다. 여인은 조심스럽게 유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지금 상태를 보면 어차피 기억하지 못하실 거예요. 그 흔히들 말하는 필름이 끊기는 상황이 올 테니까요.”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이름을 듣고 싶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 은은한 빛 아래에서 밝게 빛나는 보석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 그 특징을 가진 것은 오로지 하나뿐인데,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지 궁금했기에 그녀의 이름을 듣고 확신하고 싶었다.
“그래도 알고 싶다면, 알려 드릴게요.”
앵두 같은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제 이름은······.”
그리고 유선은 확신했다.
***
삐비비빅-.
삐비비빅-.
모든 것이 꿈이라고 여길 정도로 빠르게 장면이 바뀌었다. 분위기 있는 바는 어느새 자신의 집 천장으로 변했고,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이 자신의 몸을 덮은 것을 알았다.
덤으로 좀 더 무거운 물체가 자신의 배 위를 올라타는 게 느껴졌다. 유선은 고개를 숙여 그 배 위에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엘레노어가 위에 누웠다. 유선은 가슴팍에 잠든 모습을 보고 어제 일을 살짝 떠올렸다.
“하하······.”
술 취해 들어온 것을 보면서 엘레노어가 잠에 취하면서 동시에 화를 냈던 것이 생각났다. 가슴팍에 매달리면서 부으거리던 그녀가 떠올랐다. 딱 그게 끝이었다.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고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 일······.”
유선은 꿈처럼 지나간 어제 일을 떠올렸다. 그녀의 이름을 듣기 직전, 그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복잡했던 생각들이 잡혀갔다. 그리고 유선은 확실히 결심한 얼굴로 침대를 벗어 나왔다. 큰 걸음으로 루데릭의 방을 향했다. 노크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문을 잠그지 않는 그이기에 문고리를 돌려 바로 열어젖히며 외쳤다.
“루데릭!”
“까, 깜짝이야. 왜 그러느냐, 주인?”
정신없이 움직이는 동영상과 기사 글줄들. 여섯 개 모니터를 달아서 그걸 다 어떻게 보나 했는데, 그만의 방법이 있었다. 거미처럼 여섯 개 붉은 눈이 그의 얼굴에 달렸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평범한 사람이 봤다면, 기절할 것이다.
“너 눈이······.”
“아, 아앗······.”
루데릭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감추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유선에게 말했다.
“보지 마라. 악마의 눈은 아무래도 흉측하니까. 그대에게 보이고 싶진 않다.”
유선은 그가 피하는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더 다짐하고 말했다.
“아냐.”
유선은 얼굴을 가리려 드는 루데릭의 팔을 거두어 내며 말했다.
“똑바로 보여 줘. 부끄럽지 않다면 그 얼굴로 똑바로 마주해 줘.”
“······.”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팔을 거두며 그 얼굴을 보였다. 그의 여섯 개 눈동자가 유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몇 초 동안 그렇게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루데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이상하지 않으냐?”
그는 대답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
“무슨 그런 낯 뜨거운 소리를 서슴없이······.”
“아니, 빈말이 아니야. 정말로 아름다우니까. 이 붉은 색깔. 내가 아는 것 중에서 가장 밝고 티 없이 아름다운 색깔이야.”
“······.”
그 말을 듣고 루데릭은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그를 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은 옅은 홍조를 띠었다.
“그, 그런 말이나 하러 오진 않은 것 같고. 무슨 말을 하러 왔냐?”
“그렇지.”
유선은 다시 한 번 더 심호흡했다. 그리고 루데릭을 보며 똑바로 말했다.
“왜 나한테 네가 마왕의 자식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숨겼어?”
“그야, 그건 주인이 묻지 않았으니······.”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 줄 알아? 그런 걸 숨기다가 나중에 알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응? 그 뒷일을 수습하느라 머리를 싸매라 이거야?”
“······잘못했다.”
“그야 당연하지. 너 때문에 이렇게 폭음한 채로 술도 못 깨는데 잘못했다고 해야지!”
루데릭은 그의 말에 위축되어 고개 숙인 채로 살짝 올려다보았다. 숙취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으니 머리가 띵하게 울려왔다. 유선은 고개를 저어 다시 정신을 깨우며 그를 보았다.
“루데릭, 나는 네가 마왕의 자식임을 알았어.”
“······.”
“그쪽 세계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우리 세계까지 침범해서 개지랄을 떨어 놓은 마왕 자식 말이야. 난 그런 놈이 가장 싫어. 평화를 어지럽히는······ 그런 놈들. 그러니까······ 경고할게.”
유선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에게 말했다.
“나랑 엘레노어, 오르넵토스, 멍멍이, 기율이, 세네타······.”
유선은 루데릭의 볼을 잡으며 끊었던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자신도.”
그가 쓸데없이 우려하고 마음속에만 담았던 말을 내뱉었다.
“모두 배신하기만 해 봐.”
거칠기 짝이 없는 그의 말투. 루데릭이 그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때는 내가 정말로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너를 찾아내서 내 손으로 응징할 거야. 알아들었어?”
숨 쉴 틈 없이 거칠게 내뱉는 말에 루데릭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제야 루데릭은 유선의 말을 들은 것에 안도했다. 루데릭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다. 절대로 배신하지 않으마. 끝까지 그대만 따라가마.”
뭔가가 위태로워 보이는 그 표정에 유선은 얼른 그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감추었다. 감정을 내뱉으면서 감정이 가라앉고, 본래 그의 모습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해. 이딴 말도 제대로 못 했던 못난 놈이라서······.”
“곧바로 사과하지 마라. 이러면 정떨어지지 않느냐?”
루데릭은 그런 유선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리고 살며시, 애틋하게 꼭 안았다.
“정이 떨어져야 할 텐데······. 어째서 그런 것마저도 밉지가 않은지 아이러니하구나.”
유선은 의문을 품은 루데릭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야 가족이니까.”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스쳐 지나갔다. 포근한 감각, 어디선가 느껴 본 포근한 감각도 함께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