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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딜레마 (1) (9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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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딜레마 (1)

회사로 돌아오는 도중, 유선의 휴대폰이 울렸다.

-형님! 대체 왜 그러셨소?

차기율이었다.

“뭘?”

-인터뷰 요청했다는데 거절하면서 갔다고 전해진다고 나오는데!

“아, 그거?”

기율은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에게 물었다.

-티브이에 나와서 이러쿵저러쿵 한 다음에 ‘큐앤 헌터 컴퍼니 파이팅!’ 정도는 해 주셨어야지 않겠소? 아니 이러쿵저러쿵 안 해도 되고 그것만 해 줬어도······. 아, 했네. 역시 형님이오. 회사 사랑, 나라 사랑. 존경합니다, 형님. 충성! 충성!

뒤늦게 나오는 유선의 인터뷰 영상에 기율은 만족스러운 억양으로 바뀌며 손을 비볐다. 유선은 피식 웃었다.

엘레노어부터 시작해서 루데릭, 오르넵토스, 그리고 사역수는 아니지만 사실상 얻어 낸 거나 마찬가지인 세네타가 차례대로 큐앤으로 넘어오면서 유선에 관해서 묻고 싶은 기자들이 많을 것이 뻔하고, 그것들을 말해 봐야 입만 아플 뿐이지, 유선에게 별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다음번 인터뷰는 좀 더 늘려서 말하기를 간곡히 부탁하겠소이다.

“다음번 인터뷰는 할 생각 없으니까 그리 알아라.”

유선은 시시껄렁한 소리만 해댈 것을 알기에,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차피 안에 도착도 한 상태였고 중요한 일이라면 직접 올 걸 알기에, 더 통화하는 건 요금만 아까운 짓이었다.

“다녀오셨어요, 오빠?”

사무실로 돌아가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릴 때, 세네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레더 아머 차림으로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한 커피를 들었다.

“응, 뭐 하다가 올라가는 길이니?”

“훈련 좀 시켜 달라고 해서, 상대해 주다가 잠시 커피 사러 갔다 왔어요.”

“커피? 커피는 오르넵토스 방에 기계가 있을 텐데?”

“아, 그런가요? 그래도 다른 분들 방에 들어가는 건 실례 같아서요.”

스스럼없이 들어가던 유선이었기에, 설마 세네타가 그런 불편함을 겪는 줄은 몰랐다.

“그냥 들어가서 한 잔 타 마셔. 걔가 뭐라 하면 나한테 말하면 되니까.”

“이게 오히려 편한 것 같은데, 이대로 하면 안 될까요?”

“그러면 뭐 어쩔 수 없고. 내키는 대로 해야지.”

더는 권유하지 않고 그녀가 편한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세네타는 일이 없으면, 검사 클래스들이 부족한 부분을 알려 주려고 일했다. 남을 처음 가르쳐 보는 만큼, 전력으로 상대하는 일이 생기나 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힘 조절에 능숙해 검사 클래스들의 훈련을 생각보다 순조롭게 했다.

유선은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 회사 검사들을 상대해 보니 어때?”

“약해요, 전부.”

짧고 간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네타는 용사의 핏줄에 용사의 직속 제자이기도 했으니까. 검술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을 것이다.

“네 기준에선 어쩔 수가 없지. 다른 건 없었어?”

“음······, 기본적으로 베이스는 깔고 있지만······ 뭔가 다른 생각만 잔뜩 하는 게 잡념에 사로잡히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과 대결할 때는 아주 침착하게 하는데, 저와 할 때만은 그런 것 같아요. 그게 마음에 걸리는데, 어째서일까요?”

“그건, 음······.”

유선은 슬쩍 시선을 아래쪽으로 옮겼다. 그녀의 가죽 갑옷은 슬림한 몸매가 드러나게 했다. 골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옷인 바람에 타이츠나 다름없었다. 유선은 너무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아,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무래도 번뇌가 가득 차서 그런 것 같아.”

“번뇌 말인가요? 무슨 번뇌기에, 그들이 잡념에 사로잡혔을까요?”

“아무래도 머리에 요마가 끼었겠지.”

“요마? 요마······.”

그렇게 생각하다가 세네타는 눈을 번뜩 뜨며 유선을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악마의 농간이로군요!”

“으, 응?”

비유적인 표현이었던 유선은 그녀의 반응에 당황하고 말았다. 유선은 정정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야.”

“비유적인 표현······이요?’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

“음······.”

세네타는 잠깐 고민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은 알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래도 오빠 덕분에, 악마에게 놀아나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어요.”

“그, 그러니?”

“아버지가 악마들은 언제나 은밀하고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 온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네요. 그분들도 언젠가는 악마와 한 번씩 마주할 텐데, 그러면 과연 버틸지······.”

그녀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은 뭔가 위험한 발상이 시작되는 것 같아서 세네타가 조금 두려워졌다. 그녀는 뭔가가 생각났는지, 유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잡념을 털어 내려고 했던 수행 방법을 써 봐야겠네요.”

“한 번 들어나 보자.”

생각보다 흥미로운 방식이어서, 유선은 그녀의 수행 방법이 뭔지 들어 보기로 했다.

“기마 자세를 한 상태로 머리, 어깨, 팔꿈치, 손등, 그리고 허벅지에 총 9개의 잔을 올려놓고 정신을 가다듬는 수행 방법이에요. 저 같은 경우에는 잔에 물이 흔들리면 처음부터 다시 했지만······. 아무래도 그만큼 버틸 수 없을 듯하니 좀 더 기준을 낮게 잡아야 할 것 같네요.”

그녀가 궁리할 때, 유선은 슬쩍 세네타를 거들었다.

“잔에 물이 심하게 흔들리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건 어떨까?”

“음, 그 정도면 될까요?”

“그래도 강화 인간이니까, 쏟거나 그런 정도로는 좀 그렇지. 한 시간······ 아니, 세 시간 정도 제대로 버티게 하는 거야. 어때?”

“세 시간이라······! 짧지만 적당할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생각이에요, 오빠.”

세네타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화색이 밝은 얼굴로 유선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오빠 덕분에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아니야, 그러면 사실 나보다는 기율이가 제일 좋아하는 거니까 뭐 상관은 없어.”

더 좋은 양질의 코어를 뽑아 오는 사람이 느는 것은 언제나 경영자의 처지에서 좋은 일이었다. 14층에 도착했지만, 세네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리지 않았다.

“바로 하러 가려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한 게 기억나서요. 바로 실행하죠.”

세네타는 그렇게 대답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유선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검사들도 갈려 나가는구먼.”

유선은 정령술사에 이어서 검사들의 곡선 그래프가 내심 기대되었다. 세네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앙증맞은 발 네 개가 구르는 소리는 안 돌아봐도 뻔한 두 명이었다.

“유선 님, 유선 님! 이것 바 바!”

“계약자! 어때?”

오르넵토스와 엘레노어가 야심 차게 뭔가를 만든 모양인지 들뜬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선은 그 부름에 답하며 그녀를 보았다.

“왕관 만들어써!”

엘레노어의 머리에는 화관이 씌워졌다. 풀줄기가 자연스럽게 얽혀서 꽃이 풍성하고 아름답게 배치된 것이 엘레노어의 센스라기엔 아름다움이 성숙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거의 모든 것이 오르넵토스가 이뤄 낸 것일 것이다.

“이뿌지?”

“되게 예쁘네. 어디서 공주님이 온 줄 알았어. 오르넵토스랑 재밌는 거 만들었구나.”

유선은 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그리고 무심코 그녀에게 물음을 던지고 말았다.

“내 건 없어?”

“유, 유선 님 거?”

“······.”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충격받은 얼굴로 유선을 보았다. 엘레노어는 오르넵토스의 얼굴을 슬쩍 보다가 다시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잠깐 더듬더니 뭔가 묘책이 떠올랐는지, 해맑게 웃으며 달려갔다.

“자, 잠깐만!”

엘레노어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유선의 시야 밖을 잠깐 벗어나더니 몇 초 뒤에 화관을 손에 쥔 채로 돌아왔다.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있는 화관을 벗겨서 가져왔다.

“유선 님 거!”

그저 생각 없이 나온 물음이었는데, 왜인지 코 묻은 물건을 탐하는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아이고, 고마워라! 잘 써야겠네······. 그런데 이건 내가 받으면 막 다뤄서 나중에 망가질 것 같은데, 엘레노어가 보관해 줄래?”

“보관? 응! 내가 보관할게!”

유선은 적당히 엘레노어에게 칭찬해 주며 그녀의 머리에 다시 씌워 주었다. 엘레노어는 해맑게 웃으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주었다.

“하나 더 만들자. 이번에는 더 큰 거로!”

“응! 유선 님, 나 갈게.”

“재밌게 놀아.”

“응!”

뭔가를 만들려고 오르넵토스와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유선은 재밌게 노는 모습에 저절로 흐뭇해졌다.

“주인.”

루데릭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귀신처럼 은밀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가 다가온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루데릭은 따라서 깜짝 놀란 얼굴로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깜짝 놀랐느냐?”

“아, 조, 조금······.”

“정말 칠칠맞지 못하게 왜 그러느냐?”

루데릭이 얼빠진 유선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게, 하하. 요즘 내가 왜 이러는지.”

“힘든 게 있다면, 본인에게 말해라. 정령왕이라고 자칭하는 놈이나 엘레노어 같은 애보단 본인이 잘 알 듯하니 말이다.”

“그래, 고마워. 신경 써 줘서······.”

유선은 루데릭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루데릭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유선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붙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쳐 버리겠다······.”

스스럼없이 대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도 속일 수 없을 만큼 루데릭을 대하는 게 어색함을 자각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를 토닥이는 거로 바꿔 버렸다. 어깨를 토닥이고 나서야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상기하고 말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그렇진 않았다. 문제는 반지를 만든 그 이후, 정확히는 루데릭이 마왕의 자식임을 안 후였다.

악마라는 것까진 루데릭이 스스로 증명해 보인 부분이 많은 데다 나쁜 녀석이 아님은 잘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 대할 때는 분명히 그도 엘레노어만큼은 아니지만, 살갑게 대해 주었다.

유선은 그가 마왕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숨기고 싶어 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걸 직설적으로 물을 수가 없었다. 증오 대상인 아버지를 둔 루데릭이 그 사실을 아는 것에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그가 정말로 진실만 말한다는 그 맹세에 빠져 버려 대답을 회피하지 못하고 대답을 받아 내더라도 상처를 안기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숨기고 내색하지 않는 게 답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자신의 행동이 계속해서 부자연스러워졌다. 진실을 감추면서 의심이 늘어나고, 루데릭을 다루기 어려워졌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 루데릭을 향한 배려인지, 관계를 밝히면서 찾아올 또 다른 갈등에 대한 우려인지,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를 보호하고 싶은 이기심인지, 어쩌면 그 셋 다가 아닌지······.

딜레마였다.

‘일단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니까······. 좀 더 생각해 보자.’

언젠가는 이야기해야만 했다. 이렇게 서먹해지는 걸 두고만 볼 수 없기에, 루데릭이 눈치채기 전에 이야기해 봐야 했다.

똑똑.

그렇게 머리를 싸맬 때, 누군가가 문에 대고 노크했다. 유리창 너머로 누가 왔나 슬쩍 올려다보니, 하얀 정장을 입은 차기율 사장이 그 너머에 서 있었다. 그가 들어오라고 손짓하자, 기율은 뮤지컬을 하듯 과장된 몸짓을 하며 들어왔다.

“우리 큐앤 헌터 컴퍼니의 보배! 정유선 헌터님, 평안하신지요?”

“얼굴 보면 모르느냐?”

“아주 근심에 가득 찬 얼굴이구려. 무슨 일 있소?”

하이 텐션으로 들어온 것을 받아 주지 않는 유선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이었구나. 뒤늦게 안 유선은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 얼굴을 감추며 기율에게 물었다.

“별거 아니야. 근데, 내 방에는 왜 들어왔어?”

단순히 놀러 왔다고 하면 바로 쫓아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기율은 뭔가 할 말이 있었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그게······ 요새, 우리 악마 전하께 무슨 일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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