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41. 공방의 신 (3)
그래서 루데릭의 정신 연결을 끊은 것도 사실 조금 의도하기도 했다. 포어셰크가 이야기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은 의도했다.
그러자 포어셰크가 피식 웃으며 유선에게 말했다.
“그래도 뭐 더는 이야기하지 말자고. 나도 저 녀석한테 괜히 찍혀서 살기는 싫거든.”
같이 자리를 깔아 주니 슬쩍 내뺐다. 유선은 내심 기대하다 김이 팍 새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루데릭이 무섭습니까?”
“무섭지. 약해 빠졌지만, 책에만 푹 빠진 모습을 보면 보는 놈들이 소름 돋는 그런 애들 있잖나! 저 머리로 도대체 우리한테 언제 보복하나 싶은 그런 것 말이야.”
“그렇군요······.”
대충 루데릭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포어셰크는 꼭 그 이유가 아니라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통신을 끊은 것도 느긋하게 있으라고 한 거야. 내 작품을 만들려면 네가 절실하게 필요하니까.”
“제가 말입니까?”
“모든 정보가 필요해. 네 평소 생각이라든가, 버릇, 자세 등을 통해서 어떤 것을 쓰고 어떤 행동에 가장 맞는지 골라야 하니까 말이야. 그러려면 여러 면모를 관찰해야 하지.”
“관찰이라 그래서 처음에 그렇게 살펴보았군요.”
그러자 유선의 추측에 포어셰크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관찰은 계속했지. 그건 그저 과장된 제스처일 뿐이야. 네 반응이 보고 싶었거든, 끌끌.”
“······.”
포어셰크는 그렇게 말하며, 벽면에 놓인 쇠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는 커다란 쇠망치를 봉대로 삼아 몸을 풀며 유선에게 말했다.
“사람은 휴식할 때가 필요해. 여기서는 느긋하게 공방 구경이나 하라고.”
포어셰크는 신경 써 준다는 듯이 말하며, 루데릭이 준 코어 잔해를 보았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철광석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이것도 아냐, 이것도 아니고······ 벨제브 녀석의 힘에 견딜 만한······ 그래, 이런 거였어!”
포어셰크는 철광석 하나를 잡아서 들었다. 유선이 보기에는 그저 똑같은 철광석이었다. 그리고 그것 중에서 가장 작은 것에 불과했다.
“똑같은 철광석이라고 생각했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당연히 했겠지. 장인이 아니고서야 이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기대하라고. 이 작은 놈이 네 큰 힘이 될 테니까.”
포어셰크는 끌끌 웃으면서 그 작은 철광석을 들고 용암 강으로 향했다. 무기를 만들기엔 너무나도 적은 양이었다. 자신의 양손을 모아 틀을 만들며 그대로 용암 속으로 중탕시키듯이 했다. 손이 붉게 익어 가며 동시에 안에 든 철광석이 녹기 시작했다. 녹은 철광석은 한쪽 구석을 막던 코어를 먹었다.
부글부글! 부글부글!
철광석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벨제브야! 이 놀라운 힘! 정말 감출 수가 없을 정도로 파워풀하군! 아주 좋은 물건이 나오겠어!”
포어셰크는 완전히 녹은 철광석을 그대로 모루 앞으로 가지고 왔다. 입김을 한두 번 불더니 완전한 액체를 이루던 철광석이 점점 고체로 굳어 갔다. 포어셰크는 그대로 망치를 들어 쇳물을 부어 올린 모루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깡!
쿵!
깡!
쿵!
리듬을 타며 내리찍는 그의 손을 따라 철이 크게 울렸다. 매달아 놓은 무기들이 흔들려 차르릉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뜨거운 열기가 유선의 얼굴을 순간순간 덮쳐 와 살이 익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벨제브가 울부짖으며 부활하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뭔가를 만드는 게 맞아?’
유선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포어셰크는 미소 지었다.
“이봐, 형씨! 똑똑히 지켜봐! 네가 착용자임을 제대로 증명해 보이라고!”
지배욕에 찬 눈, 여유롭게 드러난 잇몸. 그의 망치 아래에는 어차피 그런 공명조차 의미 없음을 알기에, 주저 없이 내리찍었다. 유선은 그의 말에 그의 망치질을 똑바로 지켜보았다.
깡!
쿠우웅!
마지막이라는 듯이 큰 울림과 함께 포어셰크는 망치질을 멈췄다. 그리고 망치를 바닥에 던져 놓고 그가 만지던 철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한 손은 용암에 담가 뜨거운 그 형태,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아주 멀쩡하게 식은 채로 있도록 하여, 제련한 강철을 만지기 시작했다.
붉게 익은 포어셰크의 손이 정교하게 형태를 조절했다. 아직 뜨거운 손으로 살짝 녹이고, 식은 손으로 형상을 재빠르게 만들어 냈다.
“후우······. 후욱!”
붉게 익었던 형태에 바람을 불어 완전하게 식혀 내었다. 그 색깔은 붉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무것도 없는 그저 고리 형태만 지닌 반지였지만, 그 속에 느껴지는 힘은 잔해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형씨.”
포어셰크는 그 반지를 손으로 튕겨 유선에게 건네주었다. 가만히 있던 유선은 얼떨결에 날아오는 그 반지를 겨우 잡았다.
“자, 한번 껴 봐. 반지 중에서는 내 인생을 통틀어서 최고의 역작을 만들어 냈으니까 말이야.”
반투명한 적옥을 둥글게 깎아 만든 반지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단순한 적옥 반지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이 감춰졌다.
니벨룽겐의 반지나 절대 반지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이 반지가 조금 맛보기 수준이라고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자태였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그 반지를 중지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즈가 딱 중지에 맞는 크기였다.
“아, 그리고.”
유선이 반지를 완전히 끼워 넣던 찰나, 포어셰크가 빙긋 웃으면서 유선에게 말했다.
“그걸 처음 끼면 좀 고생할 거야.”
쿵!
이 소리는 유선의 몸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그의 몸 안에서 잠자던 신경들이 모두 활성화해 피부를 간지럽히고, 눈에는 오색 형형 빛깔이 일그러진다. 미약하게 나던 쇳내가 이제는 그 안의 땀 냄새와 악마들의 냄새마저 맡았고, 시간은 한순간 느려지고 빨라지고를 반복했다.
“어······. 어어······.”
유선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 감각을 이겨 보려고 애쓰지만, 그 압도적인 후유증은 유선의 정신을 계속해서 먹어 들어왔다.
“어이쿠, 정신 차리지 말고 그대로 잠들라고, 형씨. 저항하면 그쪽이 손해니까.”
포어셰크는 능숙하게 그의 몸을 잡아 주었다. 어차피 그가 기절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라는 듯이 그의 몸을 잡아 들었다.
“몸이 적응하도록 기다리라고. 그럴 때는 잠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
두 시간이 흘렀다. 유선과의 정신 연결이 끊어진 루데릭은 바깥에서 얌전히 유선을 기다렸다.
“······.”
그의 표정은 불안감에 젖어 들며 입술을 수시로 깨물었다. 안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불안감은 끊이지 않았다.
‘허튼소리만 안 했으면 좋으련만······.’
루데릭은 얌전히 기다렸다.
“주인!”
루데릭은 유선의 몸을 가지고 나온 포어셰크에게 낚아채듯이 그의 몸을 잡아들었다.
“이거, 이거. 기껏 만들어 줬더니, 나만 역적 취급당하는 것 같네.”
“······ 주인에게 해코지는 하지 않았겠지?”
“당연히. 그것도 그냥 기절했을 뿐이야. 오감이 갑자기 열리면서 새로 태어난 기분을 느꼈을 테니까.”
루데릭이 그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단어를 지적하며 쏘아붙였다.
“갑자기? 그런 것도 미리 말 안 하고 그냥 끼게 했느냐?”
“워, 워. 화내지 말라고. 이건 결심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네 주인은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했잖아. 그리고 생각보다 별일이 없고 말이야.”
“부주의한 것은 결국 네 잘못이다, 포어셰크.”
“정말 정말 무섭게 나오는구나. 루데릭, 괜한 살기를 뿜지 마라. 나도 너한테 그렇게 대한 적은 없었다. 저 주인이 네 정체에 대해서 까발린 적도 없고 말이야.”
“당연하겠지. 그랬다면 너는 진작 목을 날려 버렸을 거다, 포어셰크.”
“하아, 무섭게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책벌레. 난 너한테 찍히는 건 사양이라고. 저것 봐. 깨어났잖아!”
포어셰크가 가늘게 눈을 뜬 유선을 가리켰다. 루데릭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 괜찮으냐?”
루데릭이 조심스럽게 유선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으으, 난 괜찮······.”
유선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유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와는 차원이 다르게 루데릭은 생각을 철저히 컨트롤해 자신의 내면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루데릭의 과거는 자신의 교감으로 파기가 힘들었다.
그런 유선은 난생처음 루데릭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 말았다. 불과 몇 초 전에 포어셰크와 루데릭, 둘 간의 대화에 이루어진 그녀의 정체에 관한 것. 그것을 듣고는 유선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
루데릭이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 유선을 보며 한 번 더 물었다. 유선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반지를 빼 버렸다.
“아, 미안해. 그냥 어지러울 뿐이야. 그것 빼고는 괜찮아.”
“괜찮은 것 맞느냐? 안색이 좋지 않다.”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알겠다.”
유선이 그렇다기에 추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유선은 몸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그녀에게 슬쩍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보았던 것을 다시 떠올리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냐,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유선은 계속해서 자신이 본 것을 부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되었으니까. 아니 말이 돼도 그게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야 받아들이면 안 됐기 때문이다.
루데릭이 마왕의 자식이라니······.
그런 건 말이 안 되잖아.
***
불명예 퇴역 헌터.
사건 사고를 저질러 헌터 협회 측에서 자격을 박탈할 경우에 붙여지는 칭호였다. 사회에서도 범죄자로 취급했다. 정말 돈이 급한 불명예 퇴역 헌터들이라면 이름을 숨기고 막노동판이라도 뛰어드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대부분은 방치된 채로 삶을 보내게 했다.
대부분 벌어들인 돈이 있기에 그 돈으로 어떻게든 조용히 살지만, 문제는 그럴 돈도 없는 이들이었다. 흥청망청 쓰는 것이 인생의 모토여서 남은 돈이 없는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냥 본능을 주저 없이 사회로 돌려 버려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현재 한 은행이 아주 조용하게 직면했다.
“자, 지금부터 모두 입 다물고 제 지시에만 맞추신다면 여기서 살아서 나가실 겁니다. 알겠습니까?”
“······.”
복면을 뒤집어쓴 3인조 강도 사건이 벌어졌다. 배치된 경비들은 죄다 제압되거나 사살된 상태. 출입구를 완전히 봉쇄하고 직원과 손님을 모두 한곳으로 모아 관리하는 단계까지 접어들었다. 활을 든 사내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직원과 손님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말들 잘 들으시네. 고마워라.”
“야, 이제 된 거 아니냐? 빨리 돈이나 담아 오자고!”
“기다려 봐. 하여간 새끼, 성질 급한 건 여전하다니까.”
덩치 큰 남자가 재촉하자, 검을 든 사내가 돈 가방으로 쓸 지퍼 백을 들고, 은행 금고로 몸을 옮겼다. 흉기로 틈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떠드는 사이 기회를 잡았다. 한 직원이 재빠르게, 경찰에 연락을 취하려고 휴대폰을 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사라졌다.
파직!
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날아온 화살과 함께 꿰뚫려 정확히 고간 바로 앞에 꽂혔다.
“히이익!”
직원은 그 화살의 위치를 보고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채로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헌터들의 감각을 좆으로 아나 본데, 진짜 허튼짓을 또 하는 순간, 주저 없이 미간에다가 꽂아 준다. 알았지?”
“네, 네!”
좁은 양손 사이로 정확하게 파고드는 그의 실력을 확실하게 봤기에 이게 절대로 단순한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엄마, 무서워.”
“그래. 조금만 기다리자, 눈 감고······. 곧 끝날 거야.”
누구 하나를 바로 죽여 버릴 분위기. 그들은 빨리 이 상황이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컸다. 그것보다 더욱 큰 바람은 이 상황을 타파해 줄 히어로의 등장이었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인간들이라니까······. 응?”
그때, 활을 쓰던 강도가 한 곳에서 움직임을 느끼고 재빠르게 활을 겨누었다.
“야.”
“어······, 응!”
덩치 큰 사내도 뒤늦게 느꼈는지, 쇳덩이 같은 주먹의 관절을 풀면서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활을 쓰던 강도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실수다.’
방향은 화장실 쪽, 정확하게 그 안에서 나왔다. 직원들과 손님을 통제한다고 화장실 쪽은 신경 쓰지 않아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은, 화장실에 있는 것은 한 명. 그리고 이 사태를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비명 한 번 못 지르게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신고하지 않은 건 큰 다행이었다.
그 안에 있는 남자는 자연스럽게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태연하게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내를 보는 순간, 한 줄기의 희망을 보는 듯했다. 구원해 줄 용사를 기다리던 이들에겐 하나의 호재였고, 강도들의 입장에선 곤란해진 존재였다.
“저, 저 사람 정유선 아냐?”
“정유선 헌터다!”
“우리를 구하러 와 주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