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40. 반응
유선은 오르넵토스에게 동기 부여를 심어 준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앞에 놓인 플라스틱 상자 한 개를 보고, 홀가분하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마지막이구먼.”
가구는 모두 직원들이 옮겨 주었지만, 짐에는 민감한 물건들이 섞일 수 있어서 유선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그는 플라스틱 상자를 개봉해 물건을 꺼내 들었다. 주로 서랍에 담아 놓은 물건들이었다. 그는 물건을 하나씩 꺼내면서 문득 아르젤의 수정구를 떠올렸다.
“수정구가 어디······ 아, 맞다.”
혹여나 섞여 들어갔나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세네타에게 준 지 오래였다. 파괴하진 않겠지만, 그 대신 자신이 가져도 되겠느냐고 해서 유선은 건네주었다. 어차피 용도도 지금으로서는 필요가 없었기에, 세네타에게 건네주었다. 지크벨트처럼 파괴하려 들지 않고, 그냥 신줏단지 모시듯이 방 한곳에 보관해 두어서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잘 두었겠지.”
유선은 대충 물건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분류하려고, 마구잡이로 꺼내었다. 그러다가 작은 병 같은 것이 또르르 굴러떨어져 나간 것을 보았다.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 물건을 확인하고는 눈이 그 물건을 향해서 떨어지지 않았다. 유선은 손을 멈추고 그 병을 주웠다.
“이건······.”
루데릭이 주었던 발록의 코어 잔해를 담은 작은 병. 길쭉한 코어 부분은 인터뷰할 때도 썼던 물건이었다.
“참······.”
오랫동안 잊었는데, 이게 다시 나올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유선은 가만히 그 코어를 보면서 추억을 회상하자. 드득······.
“어라?”
드드드드득!
코어가 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덜그럭거리던 소리가 점점 심각하게 손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걸 가만히 쥐던 유선은 기습적인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파창!
병이 깨졌다. 격한 진동으로 깨진 유리 파편들이 사방팔방으로 튀면서 얼굴을 가린 손에 박히고 말았다.
“윽.”
살결을 뚫고 들어와 피가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손으로 유리 조각을 뽑으려 해 보지만,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반응해, 그의 손을 괴롭혔다.
“의무반으로 가야겠네.”
유선은 양손을 최대한 감추며 눈에 띄지 않게 가려 몸을 옮기려 했다. 그때, 하필이면 그 상황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다.
“주인, 방금 이상한 기운이 이곳에서······.”
루데릭이었다. 루데릭은 소리를 들었는지 급하게 달려와 유선의 손 상태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루데릭은 얼른 그 중요한 물건을 찾았다. 그리고 병에서 나와 바닥에 구르는 코어의 잔해를 발견했다. 바닥에서 요란하게 진동했다.
“이런······.”
루데릭이 코어의 잔해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뻗어 나가는 기운이 코어를 들어 올리더니, 잠시 후, 드드득거리던 코어가 잠잠해졌다. 코어가 진정한 것을 보고, 루데릭은 유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이 얼마나 엉망인지 루데릭은 알았다.
“주인, 괜찮은가?”
“괜찮은 것 같은······.”
“괜찮기는 뭐가 괜찮으냐! 다치지 않았느냐? 얼른 손을 내밀어라.”
루데릭은 그 손을 잡아당기며 강제로 펼치게 했다. 손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저릿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엉망진창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꼴을 보고는 혀를 쯧 하고 찼다. 그러자 루데릭의 등 뒤에서 또 다른 손들이 튀어나와 조심스럽게 손에 박힌 유리 조각들을 긁어냈다.
“조금 아플 수도 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거로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버틸 만한 수술을 진행했다. 그의 날카롭고 뾰족한 손으로 정교하게 움직이자 손쉽게 박힌 가시를 빼내었다. 그가 정교한 작업을 하는 동안, 유선은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코어가 갑자기 왜 울렸어?”
“공명하다······. 대악마 하나가 죽는다면, 그 여파가 우리에게 온다. 풀어서 말하자면, 자신이 죽었다고 광고를 하는지. 이게 경고를 보내는지, 복수해 달라는지 해석하는 건 결국 자기 나름이지만······.”
그 현상에 대해서는 대충 뭔지 이해했다. 하지만 대악마가 죽었다고 하는 말이면 분명히 그건 렛놈을 가리켰다. 하지만 렛놈을 처리한 지 열흘은 넘었을 터, 유선은 어째서 지금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인지 이해를 못 했다.
그 사항은 루데릭도 놀라운지 중얼거렸다.
“일부러 공명을 늦추려고 손을 봤기는 했다만······ 한참 전에 일어나야 할 것이 어째서······. 그리고 거의 다 죽은 코어가 반응을 일으켰다는 건 대체······.”
그러면서 루데릭은 슬쩍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뭔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보면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인, 그 병을 집자마자 그런 현상이 일어났나?”
“응? 음······, 그런 것 같은데?”
“그렇다는 말은 주인의 손에 반응했다는 말······인가?”
추측할 만한 것은 그런 것뿐이었다. 유선은 루데릭이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기······ 괜찮은 건 맞지?”
“······걱정하지 마라. 가벼운 상처니까 몇 분 지나면 완전히 아물 거다.”
루데릭이 마법을 걸어서 치유 속도를 높여 주었다. 유선의 육안으로도 새살이 돋아나는 게 보였다. 고통이 더뎌지자, 유선은 루데릭이 쥔 코어를 보며 한 번 더 물었다.
“코어 쪽은?”
“코어 쪽도 걱정하지 마라. 주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일은 아닐 테니까······.”
확신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루데릭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확신하고 싶었는지, 유선이 들었던 코어 잔해를 가져갔다.
“코어는 잠깐 본인이 회수해 가마. 혹여나 불편하거나 문제인 게 있나?”
“없어.”
“알겠다. 그럼······.”
루데릭은 오른손 손바닥 위에 그 코어가 든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고, 그 자리를 나왔다. 유선은 손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유리가 깨져 튄 파편을 치우려 청소기를 들었다.
“루데릭.”
“왜 그러느냐?”
그가 문 앞을 떠나가려던 찰나, 유선이 루데릭을 불러 세웠다. 유선은 미소 지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 이렇게 바로 달려와 줘서.”
“······잠깐 딴짓하다가 신경 쓴 것뿐이다. 이건 옆방 아이도 감지 못할 만큼 작은 거였으니까. 그저 악마이기에 빠르게 느꼈던 거였으니······.”
“그래, 알았어.”
신경 써 준다고 솔직하지 못하게 말하며 가는 모습을 보고 미소 띠었다.
‘귀여워 죽겠단 말이야.’
유선은 청소기를 켜, 튄 유리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찾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유선니이이임!”
한창 청소하던 중, 엘레노어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문 너머로 다 들리도록 소리 지르면서 달려오는 것은 필히 책을 같이 읽자고 하려는 것이었다.
“책 읽자.”
역시나였다. 평소처럼 거리낌 없이 유선의 방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유선은 엘레노어가 발을 들이는 것을 막았다.
“엘레노어, 들어오면 안 돼!”
“응, 왜?”
“지금 청소 중이니까. 책은 나중에 읽자, 알았지?”
“에? 왜애?”
엘레노어가 인상을 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리 조각이 사방팔방 다 튀어서 엘레노어가 혹시나 다칠 수도 있으니까 그래. 정리하고 엘레노어 방으로 갈 테니까, 그때까지는 착하게 혼자서 읽자, 알겠지?”
“부으······ 알았어. 빨리 끝내야 해?”
“알았어.”
엘레노어는 약속을 받아 내고야 다시 얌전하게 물러났다. 유선은 그동안 천천히 튄 유리 조각들을 청소했다.
***
서버가 돌아가는 소음, 어두컴컴한 내부, 열기를 식히려고 냉방기를 가동하지만, 그 열기는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업무 이외에는 절대로 이 찜통에 들어올 일이 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런 열대야 같은 곳에서 루데릭은 땀 한 방울을 흘리지 않았다. 어두운 곳에 집중된 조명 아래에 놓아둔 인형처럼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유선이 가졌던 코어 잔해를 들어 보았다. 모니터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반사되어 붉은빛을 내는 코어였다.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원수, 벨제브, 여기서는 코드 네임: 발록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이루던 코어의 잔해였다.
“이게 주인에게 반응했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또 다른 성장을 겪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죽음이라는 반응이 있었고, 우연히 그걸 만졌기에 가능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불안한 징조가 아니었다. 이것이 호재라는 사실, 아니면 평범한 일이라는 사실, 그 두 개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더는 위험을 생각할 필요는 없어졌다는 말이다.”
루데릭은 이제 확신했다. 주인을 위해서 하려 했지만 안전 때문에 주저했던 일 중 하나를 실행할 시간이 왔음을 말이다.
***
다음 날 아침, 유선은 평소와 같이 출근했다. 다 같이 가야 할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오르넵토스가 먼저 떨어져 나가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계약자, 나는 먼저 다른 곳으로 빠질게.”
“오늘도 훈련해?”
“당연하지. 약해 빠진 비실이 녀석들 제대로 된 인간 만들려면, 아침도 빠듯하다고!”
오르넵토스는 어울리지 않는 매우 성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뭐 알아서 잘할 거야.’, ‘열의가 있어서 금방 할 거야.’라는 흔해 빠진 과외 선생의 단골 멘트를 우려먹었던 여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진보된 발언이었다. 유선은 그 발언뿐만이 아니라 몸도 직접 움직여 마음에 들었다.
“그래, 부탁한다.”
정령술사들에게 살살하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유선은 그녀의 열의가 얼마나 사람의 한계를 끌어내는지 보고 싶었기에, 일단은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의욕이 가득한 얼굴로 옆 엘리베이터 앞에 서며 소리쳤다.
“자, 그러면 오늘도 제대로 조져 볼까!”
오르넵토스가 활기찬 얼굴로 또 다른 곳에는 지옥이 펼쳐질 거로 예고했다. 살벌한 예고를 들으며 유선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우으응······.”
엘레노어는 평소보다 몸을 못 가누었다. 한 손으로 눈을 비비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면서 피곤하다고 온몸으로 표현했다. 유선은 한 손으로 꽉 잡으며 그녀를 이끌다 쪼그려 앉아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자고도 졸려?”
“웅······.”
“어이구, 잠팅이. 잠팅이이이.”
“헤헤헤······.”
엘레노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쓰다듬어 주었다. 엘레노어는 배시시 웃지만,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14층에 도착하고 나자 루데릭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인도했다.
“소파에서 잠 좀 자라.”
“그럴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엘레노어는 취한 사람처럼 비틀걸음을 걸으면서 소파로 몸을 던졌다. 그것도 얼굴만이었다. 유선은 얼굴만 소파에 걸친 채로 자는 모습을 보고 제대로 그녀를 눕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오늘따라 되게 잠이 많네.”
“그럴 수밖에. 이거로 아마 7시간은 얌전하게 잠만 잘 거다.”
“7시간······. 그만큼이나 잔다고?”
정확한 시간을 대면서 말하는 폼이 루데릭이 뭔가 아는 듯했다. 유선은 경악하며 그에게 물었다.
“엘레노어가 그만큼 잔다는 건 좀 말이 안 되는데······. 뭔가 알아?”
“잘 알지 않겠는가? 본인이 어젯밤에 마법으로 잠을 설치도록 꿈을 꾸게 했으니 말이다.”
루데릭이 섬뜩한 소리를 태연하게 말했다. 유선은 잠을 설치는 것에 관해서 상당히 민감했기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큰 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을 알지만, 유선의 표정이 사나워 루데릭은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혹시나 해서 묻지만, 악몽을 꾸게 한 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생각 없진 않다. 잠을 제대로 못 자게 자극을 줘서 오히려 너무 좋은 꿈만 꿔서 잠을 제대로 못 잤을 거다······.”
악몽이 강하면 그 자극에 꿈에서 깨듯, 마찬가지로 좋은 꿈도 계속 꾸면 깬다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자는 엘레노어가 침을 흘리며 잠꼬대했다.
“으헤헤······, 나면 조아······. 유선 님도 조아······.”
유선은 허우적허우적하는 모습에 꿈 내용이 어떤지 새삼 궁금했다. 루데릭은 시계를 한 번 더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이쯤이면 됐겠군······. 주인, 외출하자꾸나.”
“외출?”
유선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야 할 데가 있다.”
“가야 할 곳이라니? 오늘 출장이라도 가나?”
“업무라면 업무지. 그러니까 저 아이를 재우지 않겠느냐?”
그녀의 잠을 방해한 것은 찰싹 달라붙는 엘레노어를 떼어 내려고 벌인 마법이라고 충분히 유추할 수는 있었다. 중요하지만 엘레노어가 개입하면 안 될 만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자아, 얼른 가자.”
“아, 응······.”
유선은 무슨 일을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로 루데릭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