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14층 (2) (83/148)

 # 83

38. 14층 (2)

유선은 세네타의 방이란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이름이 설마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 걔도 내 층에 있어?”

“원래 한 층을 내주는 게 맞지 않겠나 했는데······. 본인 지망인데 어쩌겠소?”

지크벨트가 유선에게 딸을 맡긴 후로는 세네타는 유선이 아버지나 다름없어졌다. 그렇게 유선과의 관계가 바뀌면서 세네타는 반강제적으로 큐앤의 헌터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세네타가 계약서를 쓰겠다는 말에 기율이 큰절을 올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미리 양해를 못 구해 죄송한데, 혹시 형님이 싫다면 지금이라도······.”

“아냐. 차라리 잘됐지. 번거롭게 또 뭐 할 필요는 없어.”

많이 불안한 애였으니 옆에 두고 보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유선은 세네타가 쓸 방들을 살펴보면서 기율에게 세네타에 관해 물었다.

“세네타는 어떻게 했어? 거주지 같은 문제는?”

웬만큼 큰일이 없다면 세네타가 한국에서 머물게 했지만, 세네타는 자신의 집을 가지는 것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그 점은 기율이 자랑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큐앤 호텔에 장기 숙박하기로 했소. 우리로선 새로운 홍보 대사를 뽑은 격이지요.”

“최근에 루데릭이 주가가 상당히 오른다는 말이 그 애 때문이었구나. 그게 그렇게 효과가 커?”

“당연하지. ‘고독한 늑대조차 발을 묶게 하는 서비스, 큐앤 호텔’이라고 한 번 광고를 딱! 해 주면! ‘세상에, 어떤 서비스를 받기에 한곳에 머무를 생각을 하지?’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방값이 계속 오르는데도 자기 돈 가져가라고 아우성인 사람들로 폭주하는 상태요.”

정체와 거주지를 숨기고 다니는 지크벨트의 방식을 떠나 유선의 방식을 시작했으니, 그녀도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는 비밀에 싸인 채로만 있진 않았다. 그래서 그 기회를 노려 큐앤 호텔의 홍보대사로 서 주겠느냐고 기율에게 물었고, 세네타는 기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여파로 적자 위기로 들어서려던 호텔은 기적적인 회생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이 있다는 듯이,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 은밀히 움직여서 호텔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덕분에 가족들이 저를 취급하는 것도 바뀌고, 회생시켜 준 큐앤 호텔 지분도 제가 상당히 잡아먹소. 거기다가 아버지 시선도 많이 바뀌고 얼마나 좋은지, 흐흐흐······.”

“그렇구먼.”

기율의 집 사정까지 듣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 이상은 흘려들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14층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면서 백금발 머리가 뒤돌아선 것을 보았다. 서 있는 자체도 모델처럼 느껴지고, 캐주얼 복장도 패션쇼에 나온 신상품처럼 살아나는 것 같았다.

세네타가 엘리베이터 너머 보이는 바깥을 보다 뒤늦게 층이 열린 걸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절도 있는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유선과 기율 앞에 섰다. 도도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표정에 기율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세네타는 기율을 먼저 보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아, 네······. 안녕하세요?”

반말만 하던 세네타가 조신하게 높임말을 쓰니, 기율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났을 때는 아직은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오러를 풍길 때였기에, 그녀의 말투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아, 아무튼 형님······.”

부탁하겠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눈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인사 한 번으로 끝났지만, 기율은 그 당황한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고분고분해지는 모습이 파격적이라 엘리베이터를 타며 올라가는 도중에도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기율과 인사를 마치고 나서 유선을 보며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응······ 안녕?”

유선은 따라서 존댓말을 하면 왜인지 다시 멀어질 것만 같아서 반말을 고수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세네타, 말투 바꿨네?”

“고쳐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저랑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반말한다고 하셨잖아요?”

유선은 그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에 대한 정보가 얼마 없어서 싹수없는 듯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오버랩이 되었다.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선 그것부터 고쳐 볼래요. 앞으로 사람도 많이 만나니까 사람한테 불쾌감을 심어 주는 게 좋지도 않고, 무엇보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날 테니까요.”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고? 유선과 자신을 의미하는지 유선은 세네타에게 물었다.

“세네타 너 나이가 몇이니?”

“23살이요.”

“······.”

“이번 연도에 들어서 23살, 맞을 거예요.”

어리다고는 생각한 얼굴이었지만, 자그마치 5살이나 차이가 나는 ‘아기’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압도적인 분위기 때문에 적어도 20대 중반이거나 동갑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 그렇구나.”

여유롭다고 생각한 유선도 그녀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세네타는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담담하게 자기 할 말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응.”

“호칭으로는 부를 때, 오빠라고 할게요.”

“······오빠?”

유선은 한 번 더 기습 공격을 받았다. 유선은 무표정한 얼굴에 감춘 아름다운 목소리로 오빠라는 단어를 언급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세네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 아냐, 있을 리가 없지.”

“유선 오빠라고 하면 되죠?”

“마음대로 하렴.”

“네, 유선 오빠.”

세네타는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유선은 그녀가 들어간 방을 멍하니 보면서 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오빠라······!”

선배, 형님, 주인, 계약자, 유선 님. 멍멍이의 호칭까지 합하면 주인님까지······.

그의 인생을 통틀어서 오빠라고 불려 본 횟수는 극히 적은 편이었다. 그 오빠라는 말도 영업용으로 사람을 꼬드길 때 부르는 거라면, 유선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오빠라는 게 이렇게 좋은 호칭이었나 생각했다.

“주인.”

“응?”

“고작 여자 하나에 오빠라고 불렸다고 헤실거리지 마라. 꼴사나워 보인다.”

“······.”

유선은 깜짝 놀라 고개를 거울로 돌리며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거울을 보면 확실히 숨기는 편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루데릭이 씩 미소 지었다. 루데릭이 한 번 떠본 것이었다.

“정말 헤실거렸다는 거냐?”

“아, 아냐. 내가 무슨 속물적인 사람도 아니고······.”

유선은 손사래 치면서 그의 말을 부정했지만, 감을 잡은 루데릭이 은밀하게 파고드는 것처럼 귓가에 대고 말했다.

“뭣하면 나도 주인을 오빠라고 불러 주느냐?”

“······됐어.”

무심코 그녀의 중성적인 보이스에 끌려서 고민하고 말았다. 루데릭은 그 몇 초의 정적에 히죽 웃으며 유선을 놀렸다.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 한 명 더 느는데? 주인이면 좋아할 거로 생각하는데, 아닌가, 오빠?”

“윽······.”

중성적인 목소리로 오빠라고 부르니, 루데릭이 한층 여자에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단발머리에 평소에 위압적인 기운을 풍기니 사내대장부의 기운이 강했다면, 지금은 어린 외견과 다르게 어른다운 요염함이 눈 속에 녹여졌다. 요망하기 그지없던 루데릭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뭉개 버렸다.

“쓸데없이 놀리려고 하지 마.”

“으엑······, 알겠다······.”

그의 말을 듣고는 유선은 루데릭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루데릭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재미없다는 듯이 궁싯거렸다. 유선은 그의 악마다움에 혀를 내둘렀다.

“이제 내 방만 남았구나.”

유선은 그렇게 남은 마지막 방으로 발을 옮겼다. 사역수들과 세네타의 방이 상당히 개성에 맞춘 휴식처를 마련해 주었던 만큼, 유선에게는 어떤 식으로 해 놨을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기대를 해선 안 됐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방 하나를 보고 유선의 얼굴이 처참하다 못해 무표정해진 채로 그 공간을 보았다.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내 방······.”

엘레노어 방이 소박하다면, 유선의 방은 절박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전형적인 회사원들의 자리처럼 느껴졌다. 아직 풀지 않은 플라스틱 박스가 고스란히 놓인 게 신입인 것 같았다. 더 좋은 점이라면 공간이 좀 더 넓고 수납할 공간이 더 많으며, 쉴 기다란 소파가 있었다. 만약 유선의 방을 먼저 봤다면 충격이 덜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사역수들이 각 방을 가졌지만, 유선은 혼자 쓰는 방도 아니었다. 다른 사역수들보다 방이 더 작은 것도 모자라 2인용이었다. 멍멍이 전용 쿠션이 모서리에 놓인 것으로 봐선 틀림없었다. 여기는 정유선과 멍멍이의 방이었다. 기율을 찾아 물어보면 어떤 식으로 변명할지 궁금했지만, 차기율은 이미 도망간 지 오래였다. 유선은 픽 웃으면서 쫄래쫄래 따라오는 멍멍이를 안아 들면서 말했다.

“멍멍아, 나랑 같은 방인 것 같다.”

-주인님, 좋아! 다른 주인님보다 주인님이랑 같이 있는 거 좋아!

멍멍이가 자신이 개인 것처럼 혀를 내밀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밥을 챙겨 주고, 씻겨 주고, 스트레스를 관리해 주는 것은 정유선이 거의 다 했기에 멍멍이는 유선을 잘 따르는 편이었다. 사육 방법도 전투 요원보다는 강아지와 흡사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서 갈수록 강아지화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멍멍이는 얌전하게 쿠션 위에서 제 냄새를 묻혔고, 유선은 개인 공간이 생겼음을 만끽하려고 발을 책상 위로 들어 올리며 의자를 젖혀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제대로 뭔가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똑똑.

그때, 앙증맞은 손으로 누군가가 노크해 왔다. 유선은 화들짝 놀라 얼른 책상에 다리를 내려놓고 유리창 너머로 노크해 오는 사람을 확인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건 엘레노어였다. 그녀가 문을 살짝 열어,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로 그를 불렀다.

“유선 님.”

“응?”

“여기서 책 읽어도 돼?”

엘레노어가 책 한 권을 뽑아 한 손에 든 상태였다. 소파에 혼자 앉아서 읽기는 따분한 모양인지, 유선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응, 여기서 봐.”

“응!”

허락이 떨어지자, 옆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천천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있자, 곧 다른 한 명이 유선의 방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 엘레노어. 여기서 책 읽어?”

“응, 유선님이랑 같이 읽어.”

“같이 읽는 것도 아닌데? 나랑 같이 읽자. 계약자, 나 여기 있어도 되지?”

“한 명이 들어왔는데, 두 명이 들어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들어와. 흙만 제대로 털고.”

유선은 당연히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오르넵토스까지 소파에 안착하며 함께 책을 나눠 보았다. 이제 올 사람 없겠거니 생각할 때, 불청객이 한 번 더 들이닥쳤다.

루데릭이었다. 그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자연스럽게 유선의 방으로 들어왔다.

“너는 왜?”

“서버를 너무 돌려서 그런지 발열이 심해서 잠시 컴퓨터를 식혀야 할 것 같다. 장기간 혹사하면 큰일이니까.”

“······그렇구나.”

‘그런데 왜 굳이 이곳에 왔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루데릭은 뭔가가 찔리면 스스로 솔직해지는 편이기에 가만히 있어도 충분했다.

“나도 열이 올라오는 후덥지근한 곳에 계속 있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래, 그렇지.”

“그런 장소를 물색하다가 우연히 이곳이 가장 좋아 보여서 그렇다.”

“아, 네······. 크흠, 그렇겠지.”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애써 변명하는 루데릭에게 웃음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말하면서 루데릭은 소파 한 곳으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자리를 차지했다. 유선은 차례대로 앉아 소파를 차지하는 사역수들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공간에 놓인 소파도 사실은 사역수들을 위한 물건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유선은 그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와 동시에 한숨이 지어졌다.

“내 금쪽같은 개인 시간은 결국 없는 거나 마찬가지구먼.”

참으로 안타까우면서 행복한 인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