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14층 (1) (8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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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14층 (1)

무너진 렛놈의 동굴, 악마가 죽음으로써 그 둥지가 무너지는 것이지만, 렛놈의 동굴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끈질긴 생명력에 남을 속여 넘기는 악마의 재주로 그의 본체에는 실낱같은 생명력이 남았다.

“커흡!”

렛놈이 두 동강 나다 힘차게 숨을 내뱉었다. 얼굴이 두 동강 났는데도 어느 정도 살아 있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여기서 죽을까······ 보냐······.”

그의 몸을 다시 이어 붙이려고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 꼬맹이, 그 꼬맹이가 날려 버린 몸이 이상하게도 복구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렛놈이 알기로는 두 가지뿐이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성검으로 베었거나 아니면 그에 필적하는 뭔가의 무기로 자신을 공격했거나. 하지만 그 꼬마가 든 것은 없었다. 그 주먹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주먹이 성검에 필적한다는 말인가! 우스운 소리였다. 여태 그런 생명체는 없었건만 왜 지금에서야 나오게 됐단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은 렛놈이었다. 이제는 현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죽는 게 끝······이겠군.”

코어도 모두 잃었다. 몸도 다시 붙을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 겨우 숨 쉬는 게 고작 곧 있으면 숨도 끊어질 게 분명했다. 가망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쿠그극-.

쿠그그그그그그그-.

뭔가가 후벼 파면서 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무너져 내린 동굴 틈을 해치고 이곳으로 왔다. 렛놈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반쪽만 남은 얼굴로 그나마 움직이는 것은 눈뿐이었다.

소리가 마침내 끝까지 도달해, 모습을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근육질의 남자가 돌무더기를 들어 올렸다. 그런 남자는 혼자만 있지 않았다. 몇 사람이 비슷하게 무너져 내린 것을 막았다.

마치 누군가가 안전하게 지나가도록 하는 것 같았다.

곧 렛놈의 시야에서 그 길을 걷고 나타난 것이 보였다. 허리 굽은 노인이었다.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천천히 렛놈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렛놈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허리 굽은 자가 가까이 다가와 렛놈의 상태를 보았다.

렛놈도 그를 보았다. 붕대를 얼굴로 칭칭 감아 눈 한쪽과 그 주변의 시야만 남겨 둔 채로 있는 그 모습.

“에고, 에고르트? 네놈이냐?”

그러자 그 에고르트라 불린 노인이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벌써······ 죽어 버렸······군.”

“크아아악! 이 망할 놈! 아직 안 죽었다!”

렛놈이 지팡이로 건드리는 그에게 소리치자, 그 허리 굽은 자가 화들짝 놀라며, 지팡이를 거두었다.

“아아······, 미안하네. 내 오랜······ 친우여, 살아 있을 줄은······.”

“그 거북이 같은 외모와 말투는 여전하군. 그대로 콱 뒈져 버리지 그랬나?”

“아직······ 죽을 수는 없는······ 운명······ 너와는 달라.”

“크크크······, 기분 나쁜 놈.”

렛놈은 웃음을 흘렸다. 느린 말투지만 그래도 한 번도 안 지려는 것은 여전하다 싶었다.

“나를 살리러 왔느냐? 아니면 죽음을 비웃으러 왔느냐?”

두 가지 선택지를 그에게 던졌다. 에고르트가 대답했다.

“둘 다······ 아니다.”

그의 선택지에는 없는 목적.

그리고 동시에 그의 등에 달린 수십 개 팔이 렛놈의 팔을 잡았다.

“네가······ 죽이려던······ 용사의 피가······ 필요하다.”

그 팔은 지크벨트의 몸을 찔러 넣었던 팔. 그렇기에 지크벨트의 피가 조금은 묻어났다. 에고르트는 그 피를 채취하려고 자신의 모든 팔을 동원해 팔을 싹싹 닦아 내었다.

“여전히 그 기분 나쁜 취미는 여전하군. 그거로 또 다른 생명체를 만들 생각인가?”

“역작······. 역작만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할지니······.”

그놈의 역작 타령. 지겹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렛놈은 에고르트의 요구를 알았기에,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 그 대가로 나를 살려라. 네 재주를 이용해 피를 가져가는 대신 얼른 나를 살려.”

에고르트라면 코어가 부서져도 자신의 목숨을 이어 가게 해 줄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 한 번 목숨만 부지한다면, 분명히 코어를 복구하는 일은 시간문제일 뿐. 대가가 확실하다면 그에 대한 보상도 철저한 합리주의이기에 에고르트가 자신을 살려 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수십 개 팔로 렛놈의 팔을 채취하는 에고르트는 그의 예상을 빗나가고 말았다.

“그럴 수는 없다.”

“뭐라······?”

렛놈은 자신의 예상에 반하는 행동을 하자 놀라고 말았다. 에고르트는 그에게 느릿느릿하게 대답했다.

“만물의 왕······ 세계를 지배할······ 그분에게 반기를 든 것은······ 중죄······. 용서받지 못할 일이지.”

“무슨 헛소리를 하는······ 설마?”

렛놈은 무슨 말인지 짐작했다. 하지만 에고르트는 그것에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너는 아직도 섬기느냐? 그 얼간이를?”

“얼간이가······ 아니다. 그분은······ 마왕······이지.”

마왕. 수십 년 전에 용사의 성검에 박혀 봉인된 채로 다른 차원에 가둬졌다. 마왕의 지배 아래 이루어지던 마계는 자신들의 지배자가 사라짐으로써, 새로운 지배자가 되려고 힘을 과시하거나, 살육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혼란 끝에 결국 갈라섬으로써 일시적인 분란을 멈추었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잠잠한 상태였다. 그리고 제 욕구를 실현하려고 많이 떠났을 것이다.

렛놈은 그 무리 중에서 권력 놀이에 싫증을 느끼며 용사를 찾아 떠난 한 악마였다. 그들을 몰래 추종하는 이도 있겠지만, 설마 에고르트가 그런 족속인지는 차마 렛놈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 마왕을 위해서 기다리겠다고?”

“그분은······ 오신다······.”

느릿한 말투에 늘어지는 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확신에 찼다. 팔의 피를 채취한 에고르트가 작은 병 하나의 분량을 건져 내고는 자신의 몸속 어딘가로 숨겼다. 그 병을 숨김과 동시에 그는 허리춤에 차던 단검을 뽑았다. 렛놈은 무슨 의도인지 알았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그거로 나를 죽이겠다고?”

“원망······하진 마라······.”

에고르트는 사심 없는 눈으로 렛놈을 내려다보았다. 렛놈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 지었다.

“그래, 틈이 보이면 서로 죽이는 것이 우리란 족속이겠지. 안 그러느냐?”

싸구려 동정이나 구걸은 그들의 인생에 어울리지 않았다. 에고르트는 두 손으로 움켜잡은 단검을 내리찍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렛놈은 놀라고 말았다. 죽기 전의 주마등이 한순간 자신의 오감을 증폭시키는가! 느릿느릿한 말만 내뱉던 에고르트의 입속에서 난생처음으로 늘어지지 않은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은 그분 뜻대로.”

***

“우와아아아······.”

유선은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큐앤 헌터 컴퍼니의 증축 계획이 마침내 끝나 원래 큐앤 헌터 컴퍼니의 건물로 향하던 중이었다. 유선은 2층짜리 건물이 단숨에 15층까지 올라간 외관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말이 증축이지, 거의 새로 지은 거나 다름없었다. 유선은 외관까지 리모델링한 데다 주변 환경까지 말끔히 바꿔 버리니 이게 원래 다니던 회사인가 싶었다.

지반이 좋은 데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서 건축 허가가 더 떨어지면 40층까지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올릴 필요는 없다고 느꼈는지, 지금은 멈춘 상태였다.

유선은 당혹감을 감추며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큐앤 헌터 컴퍼니’라고 멋들어지게 로고를 적은 대리석 벽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정유선 헌터님.”

“아, 네······.”

안내 데스크에 깔끔하게 입은 미소 짓는 여직원이 인사를 건넸다. 유선은 드라마에서 볼 법한 대우에 당황하며 무심코 손을 살짝 흔들었다. 스마트폰을 볼 줄만 알았던 루데릭이 유선을 보며 한숨지었다.

“주인은 왜 이리 아마추어같이 구느냐?”

“그러게. 큐앤 헌터 컴퍼니에서 이런 대접을 처음 받아 봐서······.”

워낙 가족같이 한곳에서 머물던 것이 컸다. 유선도 머쓱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형님, 오셨구려!”

때마침 하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반겼다. 기율이었다.

“자, 새로 지어진 큐앤······ 창립 멤버로서 소감은 어떻소?”

“아주 좋네. 딴 곳이라 해도 믿겠다.”

“뭐 이게 다 제 덕분······인 건 아니니까 가능하지요.”

기율은 무심코 자만하며 말하다가 루데릭이 째려보자 얼른 말을 돌렸다.

“크흠, 크흠. 아무튼 갑시다.”

기율은 카드를 꺼내 중앙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에 찍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가자 14층과 15층뿐이었다. 기율은 14층을 눌렀다.

“이게 그 사장 전용 엘리베이터 같은 거냐?”

“정확히는 사장과 그 창립 멤버 전용 엘리베이터이지요. 자, 여기 형님 것.”

기율은 다른 카드 한 장을 유선에게 건넸다. 멋들어지게 디자인한 카드를 보고 한 번 더 감탄했다.

“내 층은 14층이냐? 그러면 바로 위층은?”

“꼭대기는 제 층.”

“사장이라고 다 해 먹는다 이거구먼!”

“크크크······, 저만 일하는 게 아니라서. 걱정하지 마시오. 사실상 형님만 14층을 다 해 먹는 거니까.”

헌터 회사 특성상, 사무직원이 많지 않고, 헌터들의 트레이닝에 특화되어야 했기에 효율적인 공간 분배를 위해선 한 공간을 독차지하고 싶은 기율도 양보해서 핵심 직원들과 함께 한 층에서 업무를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선은 특권을 제대로 누렸다.

띵-.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엘리베이터 안내판이 14층을 알리고 문이 열리자, 테마 파크에 온 듯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유선은 배치된 물건들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다 해 먹는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사역수들을 위한 물건이 많았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각 방은 사역수들의 심신을 정화해 주려고 만들어진 특급 대우들이 그대로 보였다.

“이것 봐, 계약자! 아주 푹신한 흙들이 있어! 밑에는 아주 단단해서 좋다고!”

오르넵토스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방에 들어간 곳은 자연의 방에 가까웠다. 거의 바닥 전면이 자연스러운 흙바닥이었다. 땅에 대고 뿌리 뻗는 오르넵토스는 온천에 들어간 할아버지처럼 기분 좋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가 그녀를 위한 드링크 머신에 취향에 맞춘 방이 틀림없었다.

루데릭의 방은 케어보다는 그를 위한 개인 서버 룸이나 증권 회사들이 아닌 이상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비들이 압도적인 숫자를 차지했다. 집 컴퓨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고, 아마 예산의 절반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엘레노어의 방이 소박하다면 가장 소박한 편이었다. 읽을 책과 푹신한 소파, 그리고 가끔 먹을 간식거리들이 있으니 말이다. 엘레노어가 자신의 방을 둘러보더니 다시 유선과 기율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불만이라면 가장 많은 얼굴이었다.

“왜 그래? 뭐 마음에 안 들어?”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문제야?”

“그렇지만 나면이 없는데?”

“······라면?”

엘레노어가 기율과 유선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그러자 기율이 모두 생각해 놨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식당에 가면, 일본에서 데리고 온 라면 장인이 있어요. 점심시간에 진짜 제대로 된 라면을 보여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면······.”

엘레노어의 불만족스러운 표정이 확 사라졌다. 그리고 유선의 소맷자락을 잡으면서 그에게 재촉했다.

“유선 님, 배고파.”

“아침 먹은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나면 먹으러 가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침을 흘리는 엘레노어의 얼굴. 사족을 못 쓰는 얼굴에 유선은 귀여운 나머지, 무심코 그녀의 볼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오르넵토스도 술 없다고 투정 부리지 않잖아. 엘레노어도 착한 아이처럼 조금만 참자. 알았지?”

“부으으······.”

불만족스러웠지만 유선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소파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 유선은 각자의 방을 둘러보고 남은 방 두 개 중 유독 트레이닝 룸처럼 꾸며 놓은 방 하나를 보며 물었다.

“여기가 내 방이야?”

그러자 기율은 고개를 저었다.

“거긴 세네타 양, 방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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