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37. 새로운 희망
엘레노어가 남은 코어마저 씹어 먹어 버림으로써 렛놈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졌다. 그 의미로 발록을 처리할 때처럼, 동굴 전체가 흔들렸고, 무너질 거라는 징조를 보였다. 유선은 세네타와 지크벨트를 데리고 빠르게 그곳을 탈출했다.
세네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풀이 죽은 얼굴로 지크벨트를 보지도 못하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긴급 환자인 지크벨트는 병원으로 옮겨져 오랜 시간을 걸쳐서 수술을 받는 중이었다. 위중한 상황이었던 만큼 많은 의사가 지크벨트의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 이후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수술실을 나오며 유선에게 다가와 말했다.
“겨우 고비를 넘겼습니다. 기적이다 싶을 정도로군요.”
그저 듣기만 하던 유선이 다 안심되어 멎을 듯했던 숨을 내쉬었다. 렛놈이 심장을 향해서 찌르기는 했지만, 그 심장을 애써 오르넵토스가 수복하려 들었고, 그러는 덕분에 심장은 크게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유선은 의사에게서 상황을 듣고 세네타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세네타가 앉았다. 특별히 큰 부상도 없었고, 용사의 피로 모두 자연 치유되었다.
다만 그녀의 마음에는 커다란 상처가 남아 치유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늘 무표정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시체처럼 싸한 느낌이 강했다.
“세네타.”
“······.”
유선은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들어 올린 얼굴을 보니 다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유선은 그저 조용히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침묵이 오갔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세네타가 먼저 입을 떼었다.
“나, 나는······.”
“······.”
“그,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아버지를······.”
아버지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은 언제나 아버지를 따랐고, 아버지를 존경해 왔다. 어머니란 존재도 한 번도 생각한 적 없고, 오로지 용사로서 길을 걷기만 했다. 그랬다. 하지만 렛놈이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혔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말을 더듬던 그녀가 손을 잡아 주는 느낌에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미소 지었다.
“천천히 얘기해. 아무 데도 안 갈 테니까. 하루든, 이틀이든 계속 기다려 줄게.”
“······.”
복잡한 감정. 소녀는 그것에 관해서 이야기해 본 적이 없기에 서툴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단순히 손만 잡아 주고 들어주겠다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세네타는 묘하게 안심했다. 복잡한 생각에 먼저 나가려고 하던 말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잘했던 걸까······? 아버지를 의심하고, 딴생각을 품었다가 아버지가 다치고······. 나는······ 용사로서 살 수 없는 게······. 용서받을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녀가 무서워하는 것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용사의 딸, 아니 아버지의 딸로서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녀의 걱정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끊임없이 단련하고, 강해지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훌륭한 인간이 되어 가기를 꿈꿔 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꿈에 반하는 가장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고, 그 첫 실수가 너무나도 큰 나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넌 그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살아왔어. 아버지의 딸로서 말이야.”
유선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조언과 위로가 머릿속을 채웠다. 지크벨트가 세네타를 구하려고 뛰어든 것은 언제나 딸을 생각한다는 의미였고, 그렇기에 이렇게 큰 상처 없이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용서될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말들을 그녀가 지금은 알아듣기는 무리이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기에 유선은 그녀의 손을 포개어 주며 따뜻하게 감쌌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쉴 새 없이 달려와서 고생 많았어. 그러니까 이제는 조금 쉬어도 돼.”
그것은 세네타가 쉴 새 없이 달려온 사실에 대한 격려였다. 아버지를 위해 포기했던 정체성과 삶. 몇 년을 희생해 가며 묵묵히 그의 말을 따랐던, 그리고 마음속, 보이지 않던 곳에 깊숙이 박아 놓았던 자신의 삶을 상기했다.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던,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존재.
세네타의 눈동자에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이 고이더니, 그 고인 물을 내뱉지 않으려 애써 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샘은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 샘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흐끅, 흐끄으윽······.”
자신의 추한 얼굴을 기댈 곳은 없었다. 그리고 그 눈물을 받아 낼 것도 없었다. 유선은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기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세네타의 몸은 자연스럽게 끌려와 유선의 가슴에 안겼다. 그리고 그대로 눈물을 쏟아 내며 난생처음으로 소리 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일주일이 지났다. 유선은 아침 일찍 병원에 들러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곤란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옆에 선 흰 가운을 입은 중년 사내는 울상을 못 지을 뿐이지,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유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게 우리도 중환자실에서 그렇게 급박하게 깨어나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쌩쌩한 사람처럼 나와서 떠나는 바람에······.”
“······.”
유선은 제대로 정리된 자리를 보면서 말을 떼지 못했다. 간호사가 건드리지 않고 순순히 지크벨트가 깔끔하게 정리하고 갔다고 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오는 사람들다운 깔끔함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떠나리라고는 상상이나 했겠는가!
‘세네타와 함께 다시 떠났겠구나.’
일주일 전에 자신의 품에서 울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크벨트가 깨어날 때까지 자신이 모르는, 그리고 많은 사람이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는 또다시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막강한 몬스터들을 처리하러 돌아다닐 것이다. 그것이 용사의 생이라고 했으니 그렇게 살겠지.
어떤 말도 듣지 못하고 떠나보낸 사실이 아쉬웠지만, 이것이 용사의 방식이라면 유선도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유선은 아이들이 탄 차로 돌아가 회사로 출근했다.
***
좁은 임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들은 플라스틱 박스에 물건을 넣었다. 유선은 완공 예정일이 아직 멀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곧 있으면 완공이래?”
그의 말에 기율이 대답했다.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는 듯하오. 이상하게 회사 몇 개를 잘라 버리고, 새로운 회사들을 영입했는데 일 처리가 더 빨라졌다는데······.”
비리를 저지르는 놈들을 단번에 정리하니, 효과가 직방으로 일어났다. 예상보다 더 빨리 진행된다는 말에 쓰지 않는 문서나 물품들은 다시 박스에 집어넣었다. 부실 공사가 아닐까 하고 걱정했지만, 그것은 루데릭이 진작 확인을 마친 상태이기에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형님.”
“왜?”
“······.”
기율은 어렵다는 표정으로 눈짓으로 어딘가를 향했다. 유선은 기율의 눈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곳은 휴게실 쪽이었다.
“어라?”
세네타가 앉아 있었다. 유선은 고개를 기율이 있는 곳으로 돌렸다. 기율도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유선의 시선을 피했다. 분명히 찾아온 것만 확인하고 세네타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은 게 분명했다. 아직 세네타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유선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갔다. 세네타는 그가 다가오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기다렸어.”
무표정에서 나오는 카리스마. 일주일이었지만, 그사이에 생각을 완전히 한 모양인지, 평소보다 살아 있는 느낌이 강했다. 유선은 안심되는 것 같았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어?”
그의 물음에 세네타가 편지 봉투를 건네주었다.
“아버지가 편지를 남겼어.”
“나한테?”
세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 봉투에 한글로 정유선 씨라고 또박또박 적혔다. 한국 사람이 아닌데도 능숙하게 쓰인 필체였다. 유선은 봉투를 뜯어 편지를 펼쳐 보았다.
***
정유선 씨에게
한글로 편지를 쓸 날이 올 줄은 저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를 할 거라는 건 더더욱 그렇고, 그것도 정유선 씨, 당신에게 보낼 거라는 것은 말입니다.
저와 아르젤은 그야말로 조작된 감정에 기계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아르젤이 신도들에게 수많은 고문을 당해 가며 희망을 얻었다면, 저는 악마를 향해 분노를 품었습니다. 그 맹목적인 분노가 제가 용사로서 각성하는 도구였기 때문이죠. 그 도구를 만들려고 얼마나 잔인한 행동을 했는지, 저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저는 기계였고, 그런 감정을 가지게 해 준 이들에게 모두 감사했습니다. 모든 것이 틀에 짜여 만들어 낸 인생이 저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길을 세네타에게 걷기를 강요했습니다. 악마를 향해 분노하게 시켜야만 했고, 그래서 흔히 아버지들이 해 주는 사랑과 어리광 또한 모질게 쳐 내고 제가 살아왔던 삶을 그녀에게 대입시켜 확실한 용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후회합니다. 세네타를 엉성한 제 길로 인도한 것이 말입니다. 기계 같지 않은 기계의 삶을 살게 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가슴이 턱 하고 막혀 왔습니다. 의무를 떠넘긴 것도 모자라서, 제가 딸의 삶을 망친다고 생각하니 그 모순에 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정체성도, 그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용사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기술들을 알려 주는 것, 완전한 기계로 만드는 것이 저는 올바른 길이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세네타는 저 같은 기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그냥 한 명의 소녀였지요. 저는 만족을 모르는 기계일 뿐이고요. 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부정했습니다. 그걸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그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떻게 해서도 아버지를 이을 만한 훌륭한 용사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녀가 해 온 일들을 모두 포기해 버리는 말이었습니다. 본래라면 괘씸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안심해 버렸습니다. 세네타와 함께하면서 느꼈던 불안감이 모두 놓였습니다.
아르젤이 새로운 희망을 향해 걸어가라고 말했죠. 그 새로운 희망이 제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다 보니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만, 그 희망은 어쩌면 당신이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악마, 렛놈조차 흔들지 못하는 당신의 순수한 신념이, 어쩌면 당신이라면 제가 세네타에게 주지 못하는 무언가를 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희생뿐일지 모르는 그 길이 바로 이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제 모든 것, 세네타를 당신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저는 세네타에게 더는 시키지 않을 것이고, 다시 검을 들 생각입니다. 렛놈과 싸우면서 몸뚱이는 아직 충분히 쓸모 있음을 알았으니 제가 미뤄 왔던 의무를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을 압니다. 늘 그렇듯이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며, 아무도 모르는 곳에,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 이름 없이 잿더미로 남아 세상에 뿌려질 날을 향해 움직일 겁니다.
그것이 저의 운명.
제가 지키고자 했던 세계가 바라는 용사이니 말입니다.
***
“······.”
장문으로 길게 늘어놓은 편지. 그 끝말에는 어떻게 됐든 간에 유선은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하하······.”
이 편지의 핵심을 요약하면 딸을 잘 부탁한다, 로 끝났다. 유선은 편지를 보다가 슬쩍 세네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유선을 보았다.
유선이 편지를 쥔 채 세네타에게 물었다.
“넌 여기에 동의해?”
“아버지가 내린 마지막 명령이니까.”
“흠······.”
세네타의 눈을 보았다. 기계적이었던 그녀의 첫인상이 왜인지 지금은 풀린 것만 같았다. 정말 명령이기에 따르는 것 같지가 않았다. 명령이 아닌 자신이 내린 선택. 그래서 유선은 더욱 고민했다.
“네가 원한다면 너를 받아 줄게. 다만······.”
“다만?”
“난 네 아버지처럼 너에게 전수해 줄 것도 없고, 뭔가 조언해 줄 것도 없어. 오히려 네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유선은 한곳에 있지 못하고 떠돌던 사람이 정착하면 어떨지 걱정되었다. 유선은 그런 세네타를 케어하는 데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세네타는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 그런 걸 바라고 여기에 남고 싶은 건 아니니까.”
“그렇겠지?”
유선은 세네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다 생각해 두고 온 것이 분명했다. 유선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일을 잠깐 생각했다.
꼬르르륵-.
그때, 누군가가 침묵의 방 안에서 침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세네타의 뱃속에서 울리는 신호였다. 그녀는 부끄러운 기색 없이 유선의 눈을 보았다. 그런 한결같은 점에 유선은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요기할 만한 거 먹으러 갈까?”
“응.”
세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옷을 벗지 않아서 그대로 바로 나가면 될 것 같았다. 유선은 몸을 일으키며 세네타에게 물었다.
“뭐 먹고 싶어?”
세네타는 생각해 둔 음식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에게 말했다.
“라면 먹으러 가 볼래.”
“그거 지난번에 맛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하지만. 한 번 더 먹어 보고 싶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네타가 지금 먹고 싶다는 음식이었기에 유선은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먹으러 가자.”
유선은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똑같은 분식집으로 향했다. 일상처럼 흘러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저 배를 채우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었다. 다른 것이라면, 그때 먹었던 것과 사뭇 다르게 맛있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