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36. 용사의 자격 (4)
아빠.
세네타, 말하지 않았느냐?
······아버지.
그래, 왜 그러냐?
아버지는 왜 용사가 됐어?
많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란다.
왜?
아버지는 그렇게 살려고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태어나면 그렇게 살아야 해?
그게 아버지의 필요란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필요에 맞춰 사는 것이고.
힘들 것 같아.
너는 용사가 되는 게 싫으냐?
아냐. 아버지가 용사라면 나도 용사가 하고 싶어.
용사가 되겠다면, 검부터 제대로 잡아라.
제대로 잡은걸?
그렇게 잡지 말라고 하지 않더냐. 이렇게 양손으로 꼭 잡아야 한다.
양손으로? 이렇게 가벼운 건 한 손으로도 충분한걸?
아니, 가볍더라도 양손으로 꼭 쥐어야만 한다. 그래야지, 흔들림이 사라진다. 네 자세도, 마음가짐도 말이다.
그러면 어떤 것도 잡지 못하는데······.
그 어떤 것을 잡지 못하더라도······ 검만큼은 놓아선 안 돼.
어떤 것도······.
그것이 바로 세계가 바라는 용사의 자격이니 말이다.
***
선택의 시간. 지크벨트는 렛놈의 말대로 선택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면서 렛놈을 죽일까, 아니면 세네타를 구할까. 그리고 지크벨트는 세네타를 구해 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아는데도.
세네타는 절망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쓰러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을 믿지 못하고 부정하기만 했다.
“아, 아아······.”
-이런! 기다려, 용사! 내가 얼른······!
말은 했지만, 그녀는 다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렛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정구를 향해 검은 기운을 발산했다. 현신화하려던 오르넵토스가 그 어두운 기운을 뚫지 못했다. 용사의 생명력과 함께 마나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져 그녀의 힘도 점점 빠져만 갔다.
렛놈이 피로 묻은 자신의 손을 보다 비릿하게 웃으며 오르넵토스에게 말했다.
“우리 정령왕님은 가만히 계시게. 비극의 절정은 봐야지 않겠나? 크흐흐흐······.”
-이런 망할 악마 같으니······!
꼼짝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렛놈을 저주했다.
“아, 아아아······.”
세네타는 아직도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죽음은 수많이 봐 왔고, 안겨 주기도 했던 몸이었다. 자신의 반신이나 다름없던 지크벨트도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급박하게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이 세상이 미쳐 버리는 걸까?
-정신 차려, 세네타! 여기서 네놈이 쓰러지면 더는 가망 없어. 얼른!
오르넵토스가 세네타를 불러 보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렛놈은 천천히 세네타를 향해 걸어갔다.
-아, 아! 이 얼마나 달콤한 절망이더냐! 울부짖어라! 저주하라! 그리고 증오하라!
렛놈은 광기가 담긴 폭소를 터트리며 동굴을 울렸다. 렛놈은 세네타의 얼굴을 잡아서 들어 올렸다. 그녀는 일말의 저항도 없이 그 손에 놀아났다.
-그 표정을 내게 보여라! 자, 용사의 계집아! 얼른 그 아름다운 표정을 내게 보여 주어라!
세네타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에 오열도 하지 못한 채로 섰다. 렛놈은 그런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표면으로 드러나는 공포, 절망과 절규를 원했지, 의식을 잃은 듯한 공허한 눈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공포가 아니라면 더더욱 아니었다.
렛놈은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음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뭐 상관없다. 이제 곧 있으면 용사가 파괴한 코어가 수복될 시간이다. 그동안 제대로 절망해라. 그다음에 너도 죽여 주마!”
반신이나 다름없는 몸으로는 싸움도 재미가 없을 거로 생각했기에, 렛놈은 자신의 코어가 다시 달라붙기를 기다렸다. 몇 초만 지나면 자신의 코어가 다시 복구될 것이다.
렛놈은 다시 돌아올 생기를 느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완전한 힘으로 용사의 핏줄을 모두 없애 버릴 그 날이 오늘이라는 것에 환희에 찬 표정이었다.
아니, 짓지 못했다.
생기가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지크벨트가 자신의 코어를 파괴했을 때, 그는 언제 파괴했는지 모두 알았다. 그 시간에 맞춰서 새로 조각이 맞춰질 터인데,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렛놈은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반응이 없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느냐 말이다!”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프레이디어 슈라머>!”
오르넵토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마법을 사용했다. 죽어 가는 용사의 마나로 연명하던 녀석이 마법을 쓸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오르넵토스는 용사의 몸에 자연 치유 마법을 걸었다. 그것도 꿈도 못 꿀 상급 마법을!
렛놈은 뒤돌아 그것이 헛소리였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오르넵토스가 검 속에서 빠져나와 지크벨트에게 치유의 마법을 썼다. 다 죽어 가던 두 사람, 그리고 그 두 사람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두 사람. 본 적 없는 검은 머리 사내와 흰 머리 소녀였다. 그들이 지크벨트와 세네타를 안전하게 옮겼다.
그 렛놈은 그들의 얼굴을 보며 격노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여기에 발을 들여놓다니! 이 무례한 노오옴!”
사내는 어찌 됐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벌벌 떠는 세네타를 옮기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지크벨트 씨.”
쓰러진 지크벨트를 향해 사과했다.
“당신의 싸움에 참견하면 안 되지만, 더는 그런 건 볼 수가 없네요.”
***
지크벨트가 자신이 맡은 오른쪽 코어를 부숴 버리고 세네타를 구하려던 무렵이었다. 벌려진 이계의 틈 속에서 엘레노어가 모습을 빼꼼히 드러내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이계의 틈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어!”
유선이 안전이 확보된 것을 확인하고 이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최소한 자신의 몸을 지킬 장비만 확실하게 찬 상태였다. 그때, 루데릭이 정신을 연결해 말을 걸었다.
-정말 주인이란 사람은 말을 하나도 듣지 않는군.
“미안하다, 루데릭.”
허허 웃으면서 그에게 사과했다.
헌터 협회와 관리청, 두 군데가 지크벨트와 관계되었음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강 짐작했다. 지크벨트에 관한 내용을 모두 폭로해 버리겠다고 반쯤 빈말인 사실로 협박해 그들의 저지를 넘어섰다.
유선과 엘레노어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갈림길 앞에 섰다.
“길이 두 개야!”
“그러게.”
“유선 님, 어디로 가야 해?”
엘레노어가 물었다. 유선은 주변을 둘러보며 대충 상황을 짐작해 보았다. 왼쪽은 간단하게 찔려 전체적으로 육체의 손실이 적었지만, 오른쪽은 그야말로 행위 예술을 했다고 볼 정도로 파괴적으로 나왔다. 왼쪽이 세네타, 그리고 오른쪽이 지크벨트임을 알았다.
“오른쪽으로 가자.”
-거긴 용사가 선택한 장소이지 않더냐! 그것도 모르고 지금 그 길을 선택했느냐? 본인이 그렇게 설명했는데······.
어리석은 말이라는 듯이 질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선은 지겹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
-그럼 그쪽은 이미 진작 끝났을 것이다. 헛걸음하는 거다.
“진작 끝났겠지. 하지만 코어는 아직 파괴되지 않았을 거 아냐?”
렛놈에 대해서는 루데릭에게 들은 지 오래였다. 코어는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 코어는 재생할 것이다. 그 파괴된 코어는 도려낼 수 없도록 박힌 채로 수복을 기다릴 게 분명했다. 유선은 엘레노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엘레노어가 그걸 먹으면 재생하는 것도 의미 없다고 하지 않았어?”
-과연······, 그렇구나.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분명히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길지 몰라. 중간에 난입하는 짓 하지 말고, 우리는 일단 끝마무리를 제대로 짓게 해 주자.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렇기에 유선은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선택했다.
***
그런 전황을 모르는 렛놈은 자신의 코어가 자그마한 아이의 뱃속에 들어 재생을 못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유선이 어떤 마법을 부려서 그런 것으로 여겼다.
‘너무 들떠 버렸어.’
렛놈은 후회했다. 불청객이 들이닥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용사에게만 집중했다. 그렇기에 엘레노어와 유선이 괘씸했다. 극 중에 없는 인물의 난입. 그 탓에 대사와 흐름이 모두 바뀌고 말았으니까.
“감히, 이 렛놈 님의 작품을 방해하다니!”
유선은 들던 세네타를 옆에 내려다 놓았다. 오르넵토스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풀줄기로 지크벨트의 몸을 감았다.
“지금 상태는 아주 나빠?”
“피를 상당히 많이 흘렸어. 이게 회복될지도 미지수야. 만약 이 마법조차 펼치지 못한다면 분명히 죽었겠지만······.”
“그래? 그러면 다행이다.”
여지를 남겨 놓기라도 했다는 말이었으니까. 유선이 안심하던 사이, 렛놈은 자신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유선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무시하지 마라, 이 추잡한 인간!”
렛놈은 그 분노를 주체하지 않으며 유선에게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흐읍!”
렛놈은 뭔가를 느끼고는 그에게 접근하기를 멈추고 재빠르게 물러났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이 압도적인 감각. 아니, 느껴 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느껴 본 것이 너무 까마득한지라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던 이 감각.
“드래곤?”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틀림없었다. 그 드래곤이 저 남자인가?
아니었다. 그 기운은 옆에 선 소녀에게서 났다.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소녀였다. 엘레노어가 손가락으로 렛놈을 가리키며 물었다.
“유선 님, 이거 어떠케 해?”
“그건 적이야, 엘레노어.”
“적이야?”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니깐 제대로 부숴 버려.”
엘레노어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엘레노어가 사라졌다. 아니 너무 빨라서 자신 앞에 도착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자마자, 주먹이 자신의 몸에 닿았음을 알았다. 렛놈은 그 앙증맞은 소리와 주먹의 크기에 방심하고 말았다.
“빤치!”
“커헉!”
펑!
말이 빤치였지, 그 공격은 막강한 위력을 지녔다. 겉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파괴력에 렛놈은 엘레노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주먹을 중심으로 렛놈의 몸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해치웠어?”
“아냐, 아직 주변에 있어.”
오르넵토스가 대신 대답했다. 엘레노어의 일격에 맞아 죽은 줄 알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렛놈은 아직 있었다. 엘레노어가 공격한 부분을 손으로 움켜잡으며 짐승의 신음을 내었다.
“푸흐, 푸흐······. 겨우 살았군. 설마 반 분신 상태인데도 데미지가 들어올 줄은······.”
용사의 검과는 차원이 달랐다. 찔리고 나면 아팠다. 그리고 잠깐 자신의 존재가 정지되었다.
엘레노어의 주먹은 그런 감각과는 달랐다. 죽는다는 완전한 공포를 안기는 공격이었다. 렛놈은 코어가 따로 있었는데도 완전히 사라지는 줄로만 알았다.
엘레노어는 그런 렛놈을 보고는 다시 유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선 님, 안 쓰러져.”
“음······, 만만치 않은 상대인가 보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유선은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으로 봐서는 렛놈이 어떻게 발버둥을 치든 간에 엘레노어의 발밑에도 못 미침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쁜 앙마.”
엘레노어는 얼굴을 구기며 다시 한 번 더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렛놈을 향해 재차 돌격했다.
렛놈은 다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빨라서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렛놈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한 번 당하면 당했지. 그런 얄팍한 수는 이 렛놈 님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렛놈이 그녀를 따라서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을 내질렀다.
푸슉!
엘레노어가 그 자리에 섰다. 그녀의 주먹이 렛놈에게 닿지 않았다. 렛놈의 팔이 훨씬 길고, 치명적이었기에, 작정하고 팔을 뻗는다면 엘레노어를 못 막을 리 없었다.
“어?”
엘레노어가 피를 흘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상태로 유선을 돌아보며 말했다.
“유선 님······, 아파. 너무 아파.”
엘레노어가 무력하게 고통을 울부짖었다. 그리고 렛놈은 그 엘레노어를 피를 토하며 가슴을 꿰뚫린 상태로 유선을 보았다. 렛놈은 그 공격을 간파해 낸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자아, 보아라. 이게 네가 믿는 파트너의 본모습이다. 네 오만이 만들어 낸 희생이다, 꼬마야.”
유선은 똑똑히 그 모습을 보았다. 엘레노어가 죽어 가는 모습을······.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어.”
렛놈은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그리고 느꼈다. 그것은 의심의 목소리. 분명했다. 이 상황이라면 분명히 의심할 것이다. 무력으로는 엘레노어를 이길 수 없기에, 공략 대상을 가장 평범한 유선을 노렸다. 그를 무너트리면 그를 의존하는 꼬마도 알아서 무너트린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크벨트가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재빠르게 다가갔다.
“의심했느냐, 꼬마?”
렛놈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유선에게 물었다. 그 미소도 잠깐이었다. 유선은 렛놈을 올려다보았다. 도리어 렛놈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유선을 보았다. 유선은 그에게 대답했다.
“전혀.”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강철 같은 신념이었다. 용사와의 본질 자체가 달랐다. 악마를 향한 증오로 단련된 신념이 아닌 용사에게서도 볼 수 없는 순수한 신념이었다. 자신의 공포마저 단번에 간파해 낸 유선의 존재. 그를 보고 렛놈은 도리어 겁을 먹고 말았다.
“어, 어째서······.”
“그야 당연하지.”
유선은 그 질문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엘레노어가 너 같은 어벙한 놈한테 당할 리가 있겠어?”
순수한 파트너를 향한 믿음이었다. 죽어 가던 엘레노어의 허상이 사라졌다. 그리고 장막처럼 가두어 놓았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가 렛놈을 향해 팔을 힘껏 휘둘렀다.
“빤치!”
투쾅!
그 펀치로 소멸하지 않던 하반신이 완전히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자신의 힘이 먹히지 않았다는 허탈함에 사로잡힌 렛놈의 상반신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그 궤적의 끝에 널브러질 거로 예상했다.
아니었다. 그 끝에는 세네타가 있었다. 마치 세네타를 향해 건네듯이 궤적이 정확하게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지크벨트의 검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육중한 대검. 세네타가 쥔 아버지의 대검은 한없이 무거웠다. 그렇기에 양손으로 제대로 잡아들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그 무거운 검을 움켜잡고 목표를 정확하게 보았다. 증오 어린 눈으로!
서걱!
완전히 베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