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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용사의 자격 (2) (78/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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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용사의 자격 (2)

오른쪽으로 들어간 지크벨트는 마수가 몰려왔을 때와 다르게, 순탄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원형 방의 끄트머리에 있는 붉은 벽, 그 벽은 마치 느리게 움직이는 심장처럼 천천히 뛰었다.

지크벨트는 그 가운데에 박힌 작은 구슬을 보았다. 렛놈의 생명력을 담는 코어였다. 지크벨트는 그저 걷기만 하듯 안으로 들어갔다. 그 중간쯤 갔을까? 지크벨트는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선 기척을 느꼈다.

“어리석기 짝이 없군. 코어는 앞에 있는데, 뒤에서 현신한다니 말이야.”

지크벨트의 말에 로브를 뒤집어쓴 괴한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나? 그 짐승의 본능은 발걸음을 분명히 이쪽으로 향할 텐데 말이야.”

끈적하게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렛놈이 고개를 들어 지크벨트를 보았다. 물개의 얼굴에 보이는 맹수의 눈. 그리고 렛놈이 미소 지었다.

“내 뱃속에 온 것을 환영한다, 용사. 이날을 기다려 왔다.”

“너 같은 악마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기다려 왔다, 렛놈.”

지크벨트는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리고 렛놈과 조심스럽게 탐색전을 벌였다.

“그 마을이 생각나느냐? 우둔한 곰탱이 한 마리 때문에, 그 난리 치던 마을이 말이다.”

“······.”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크벨트는 잘 알았다. 곰 사건, 그 마을의 이름도, 그리고 그 주민들도. 지크벨트는 거의 스쳐 지나가는 듯한 인연이었지만,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실로 아주 훌륭한 아이들이 많더군. 탐욕에 젖은 것이 말이야. 아주 마음에 들었다. 네가 오자마자 용사임을 안 모양인지, 보이지 않도록 적잖은 호의를 베풀고 곰을 잡도록 부탁하게끔 했지. 그리고 그 우둔한 용사가 해결해 주었고 말이야.”

렛놈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녀석은 마수도 그 무엇도 아니었지. 그저 숲의 주인이었고, 허락되지 않은 장소에서 제 배 속을 채우려고 나무를 베어 가는 인간들에게 경고 차, 습격했던 녀석이었다.”

용사의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 악이었다. 인간은 지켜 냈지만, 결국 그 숲을 지키려던 곰은 용사의 손에 의해 죽고, 숲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갔다.

“아이러니하지 않더냐? 인간은 욕심을 채우려 들었고, 균형을 맞추려고 몸부림치던 곰은 용사의 손에 죽었다. 그 소감이 어떻던가?”

렛놈이 하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지크벨트는 자신이 인간의 이기심에 이용당한 채로 스스로 균형을 무너트리려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혀가 길구나, 렛놈. 과거의 일을 조작해서 오르넵토스 님을 혼란케 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리고 이 말은 오르넵토스를 향한 것이란 사실마저도. 그는 겉면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모든 일의 전황을 알았다. 지크벨트는 그의 세 치 혀에 놀아나지 않으며 검을 똑바로 집어 들었다.

-네가 꾸민 연극이란 것쯤은 다 알아, 렛놈. 내가 그 혀에 놀아날 만큼 바보인 줄 알아?

숲을 파수하는 곰도, 욕심을 채우려 벌목하는 주민도, 모두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렛놈에게 놀아났다. 용사는 물론이거니와 오르넵토스조차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경멸하던 눈으로 보던 렛놈이 표정을 거두었다. 이래 봐야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그래, 그런 눈이 보고 싶었다.”

렛놈은 흥분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실눈처럼 뜨던 눈이 탐욕에 번뜩 뜨이며 그의 모습에 감상을 남겼다.

“모든 것을 잃고도 자신이 끊임없이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그 모습! 그야말로 용사의 상이지 않은가!”

-변태적인 감성을 가진 놈이네. 언제까지 저런 미친놈 소리를 들을 생각이야?

“용서하십시오, 오르넵토스 님.”

지크벨트는 자신의 대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검이 그의 손에 들렸는데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노망이 들어서 그런지, 저런 미물에게도 말벗이 되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기습 공격이었다. 그의 커다란 대검이 렛놈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렛놈이 자신의 발톱을 세워 교차하며 그 대검을 막아 내었다. 어설프게 흘러내린다면 분명히 크게 돌아올 것을 알기에 한 판단이었다.

“과연! 부끄러움을 모르는구나, 용사여! 정정당당의 대명사가 어디로 갔단 말이냐!”

“정정당당이란 어디까지나 상식이 통하는 이들에게나 쓰는 것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라······! 그거 정말이지 좋은 말이로다!”

그때였다. 로브 안이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꺼운 천에 감긴 로브가 벗겨지며 안에 있던 것이 튀어나왔다.

“그럼 나도 상식이 통하지 않게 해 주지!”

로브 속에서 두 개 손이 숨겨졌다. 그것이 재빠르게 튀어나와 지크벨트의 허리를 노렸다. 지크벨트는 그 공격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안일한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의 대검에서 초록색 빛이 발하기 시작하더니, 두 개 질긴 줄기가 렛놈의 양팔을 휘감았다. 날카로운 손톱이 향하던 것이 멈추었다. 오르넵토스의 마법이었다.

“호오?”

감탄하기 무섭게, 지크벨트의 검에 힘이 더 실렸다.

“악마를 대할 때는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폭발적인 그 힘에 렛놈은 그대로 밀리고 말았다. 순간 방심이 불러온 참사였다.

쿵!

양팔에 막혔던 대검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분명히 그대로 맞았더라면 두 갈래로 쪼개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벨트는 렛놈이 그런 방심으로 당할 만큼 무른 상대가 아님을 알았다. 렛놈은 진작에 탈출하고 그 자리에 없었다.

“재밌군. 재밌어.”

그의 몸을 감추던 로브가 벗겨졌다. 마수 형태의 렛놈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물개의 머리였지만, 그의 몸은 털과 근육으로 무장되고, 거기다가 인간의 형태를 띤 두 쌍의 팔에 위협적인 발톱이 드러났다.

지크벨트는 그 몸을 보면서 그에게 말했다.

“제 추악한 모습을 감추려고 애썼구나.”

“추악? 인간처럼 사고하는구나, 용사여. 너희의 추악한 욕망을 감추는 옷 같은 것이 아니다.”

렛놈은 비릿하게 웃으며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그저 이편이 더 음흉하기 때문이다.”

“그걸 추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게 더 없는 칭찬이로군!”

렛놈이 접근해 왔다. 팔이 늘어나면서 공격 범위가 늘어나, 지크벨트에게 버거운 일이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한계를 알기에 오르넵토스에게 자신의 검에 들어가게끔 했다.

오르넵토스의 줄기가 한 번 더 렛놈의 양팔을 묶었다. 그의 팔이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용사 지금이야!

“알겠습니다.”

지크벨트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팔을 향해 내리쳤다. 오른쪽에 달린 두 팔이 한 번에 잘려 나갔다. 두 팔이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렛놈은 어느 정도 위기의식을 느꼈다.

곧바로 왼쪽을 향해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렛놈도 그런 공격을 두 번이나 허용할 만큼 무르지 않았다.

“내 다리는 장식이 아니다, 용사!”

“흡!”

손톱만큼이나 위협적인 발톱을 들어 올려 보였다. 그대로 공격해 오면 치명상을 피할 수 없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공격을 멈추고 돌발적으로 날아오는 킥에 재빠르게 몸을 떼어 내 공격을 피해 냈다. 바람의 정령에 서포트를 받아 가, 애써 전성기 시절의 움직임을 재현해 보려 하지만, 힘이 강한 탓에 그 공격을 완전히 피해 내기는 무리였다. 얕은 생채기가 지크벨트의 몸에 생겨났다.

-괜찮아?

“충분합니다.”

지크벨트는 두려움이 없는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그리고 접근했다. 악마를 베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걸었다.

그렇게 싸움을 시작했고, 상황은 지크벨트 쪽으로 기울었다. 검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 가는 반면, 렛놈의 팔은 그 속도에 이제 더는 맞춰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상처는 계속해서 늘어 가고, 이대로 가면 분명히 진다는 것을 직감했다.

“작전상 조금 후퇴해야겠군······.”

“그렇게 둘 것 같으냐?”

지크벨트가 검을 휘둘러 보지만, 남은 것은 렛놈의 잔상뿐, 그 무엇도 없었다. 싸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렛놈은 어둠 속에 완전히 녹아든 것과 기척이 지워진 것을 보고 전투가 끝났음을 알았다.

-뭐야, 사라졌나?

오르넵토스조차 렛놈을 감지하지 못했다. 호각이리라 믿었던 지크벨트는 순조롭게 코어를 파괴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아, 아버지······.”

피투성이인 채로 지친 세네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지크벨트가 들어선 동굴 입구 쪽에서 울렸다. 명백한 실패의 의사였다.

털썩-.

덜그렁!

그녀의 몸과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크벨트는 코어를 향해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는 세네타가, 자신의 딸이 쓰러졌다.

-이런, 네 딸이 실패해 버린 듯한데?

“······.”

지크벨트는 가만히 세네타가 쓰러진 자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냥 다가갈 셈이야? 뭔가 확인하지도 않고?

오르넵토스가 물어보지만, 그것도 침묵을 유지한 채로 걸어가기만 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세네타가 먹잇감을 포착한 포식자처럼 그의 다리를 낚아채었다. 그러고는 세네타의 얼굴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련하게 자신에게 다가온 지크벨트를 비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의심했느냐?”

그것이 렛놈의 수법이었다. 상대의 마음속 약점을 파악해, 그것을 이용해 마음에 불안과 의심하게 했다. 그리고 렛놈은 그 틈을 파고들어 지크벨트에게 혼란을 심어 주었다.

“전혀.”

하지만 지크벨트에게 그 수법은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지크벨트는 대검을 거꾸로 잡아들어 위로 올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 애는 여기에 없기 때문이지.”

지크벨트는 세네타에 대해서 잘 알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용사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녀였다. 그렇기에 용사가 했던 말을 언제나 숙지하고 다녔다.

지크벨트는 세네타, 아니 그녀의 형상을 취하는 것의 목을 그대로 검날을 꽂아 내렸다. 길로틴처럼 깔끔하게 목과 머리가 분리되었다.

그리고 세네타의 형상을 취하던 것도 함께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세네타의 방으로 떠나겠다는 렛놈이었다. 지크벨트가 준 상처를 그대로 안은 채로 잔꾀를 부렸다.

-과연 용사답네. 이런 잔꾀도 안 통하고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하나 확신하지 않았다면 위험한 도박이었겠지요. 저는 세네타가 아님을 확신했기에, 저 렛놈에게 다가갔습니다.”

-뭘 보고 확신했는데?

오르넵토스의 물음에 지크벨트는 자신이 전수해 주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유년기 시절의 세네타.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말을 명심하며 살아갔다.

“세네타가 설령 저 고약한 악마에게 당해서 쓰러졌다 해도 절대 검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흠······,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이 방에 있는 놈은 처리했으니, 코어를 부숴 버리자고.

“네.”

지크벨트는 렛놈의 시체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그때였다.

“푸흐흐흐······.”

뒤에서 싸늘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렛놈은 분명히 처리했을 터였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머리만 남은 렛놈이 씨익 웃었다.

“나를 처리했다고 해서 오만하지 마라. 네 딸내미가 일을 아주 훌륭하게 처리했으리라 믿느냐?”

“······.”

렛놈의 이야기는 꿀보다 달콤하며, 독사의 독침처럼 날카롭고 치명적이었다. 그렇기에 흘려들어야만 했다.

“그 아이의 마음의 틈은 벌어졌다. 그리고 잠식되어 간다.”

“······.”

“아버지, 살려 줘~. 아버지, 도와줘~. 네 딸이, 하나뿐인 피붙이가 절규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

지크벨트는 말없이 다시 검을 올려 들었다. 그리고 벽에 박힌 붉은 수정구를 향해 내려쳤다.

“빨리 가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 딸은······.”

파창!

렛놈의 코어 중 하나가 파괴되었다. 그러자 육신을 유지하던 렛놈의 몸이 돌처럼 변하더니, 곧 잿더미가 되어 바닥에 가라앉았다. 지크벨트는 빠르게 발을 옮겼다. 코어 하나를 파괴하고, 두 번째 코어로 돌아갈 차례였다.

-용사.

“네.”

-걱정해?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발걸음이 무거워.

“느리게 걷지 않습니다.”

-떠밀리면 빨라질 수밖에 없지 않잖아!

“······.”

지크벨트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도 사실 잘 몰랐다. 마음속으로 올라오는 이 불안감. 세네타가 있는 곳으로 가 봐야만 이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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