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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렛놈 (2) (7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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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렛놈 (2)

“······.”

오르넵토스가 엘레노어와 함께 방긋 웃으며 오다 지크벨트의 행동에 굳고 말았다. 오르넵토스는 용사가 하는 행동을 보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용사, 지금 나에게 부탁했어?”

오르넵토스는 무릎을 꿇은 용사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엘레노어와 함께 주제가나 부르던 철없는 꼬마는 사라지고, 다시 여왕의 모습이 나왔다.

“그렇습니다. 여왕이시여······.”

지크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일단 무슨 일이 있어, 나한테 부탁하는지, 들어나 보자.”

“악마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세상을 어지럽힌 악마가 말입니다.”

오르넵토스는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고작 악마 하나?”

“······그렇습니다.”

“고작 악마 하나에 내게 와서 부탁해?”

“······.”

오르넵토스는 용사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알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실망한 얼굴을 한 채로 지크벨트에게 말했다.

“실망이 크다, 용사. 네가 그 일을 해낼 줄만 알았다.”

실망이 크다는 말에 용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도 인정했다. 고작 악마 하나 때문에 흔들려서 정령왕에게 직접 부탁하는 날이 오다니!

“세월의 흐름······. 그것은 신성함도 거스를 수 없는 힘이지 않습니까? 제 의무를 그 노쇠함이 저를 덮쳤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변명이었다. 그렇기에 오르넵토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오르넵토스 또한 이세계의 주민 중 하나이기에.

“어차피 세상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은 나도 원치 않는 일이니, 도와는 주지.”

“그렇다면······.”

“하지만, 문제는 허락을 받아야 할 대상은 내가 첫 번째가 아니야.”

오르넵토스는 자신의 오른팔에 있는 계약의 인장을 보여 주었다. 유선과 계약하였으니, 그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지크벨트는 예를 갖추며 유선을 향해 고개 숙였다. 유선은 지크벨트의 머리를 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제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먼 길을 돌아가 힘을 찾는 방법을 찾으러 떠나야겠지요. 하지만 지금의 제게는 그런 시간과 여유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앞을 가로막는 것들뿐이지요.”

흔히들 말하는 용사들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용사에게 그럴 시간도 없을뿐더러, 틈이 얼마나 유지되고, 얼마나 방치되어서 큰 재앙이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유선은 그런 사태가 벌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오르넵토스에게만 도움을 청하셨습니까?”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지크벨트는 무례함을 알지만, 사실을 말했다. 유선은 이유 없이 그러는 것은 아님을 알기에 조심스레 지크벨트에게 물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정유선 씨, 자신이 가장 큽니다.”

유선은 지크벨트의 말에 당황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아이와 악마, 그리고 정령왕까지 모든 것이 강하지만, 정유선 씨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

“아이는 정유선 씨를 붙어 다닐 것이고, 악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나마 오르넵토스 님 한 명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지크벨트는 유선의 사역수들에 대한 상황을 꿰뚫어 보았다. 엘레노어는 큰 전력이었지만, 테이머인 유선은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게 했다

“벨제브, 아니 발록을 길들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렛놈은 그야말로 광기입니다. 그 능력도 특히 약한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함부로 정유선 씨를 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해하십시오.”

유선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유선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신체 스펙이 아니더라도 지금 등급을 따져서 덤빈다 해도 최소 SS급인 몬스터를 유선이 해결할 방향은 없었다. 그 상태에서 무슨 일을 당한다면, 엘레노어가 다시 한 번 더 스트레스에 사로잡히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루데릭을 데려올 때처럼 그런 기적이 또 한 번 더 일어나길 바라는 건 너무나도 안일했다.

“렛놈을 처리하는 방법은 우리가 압니다. 그러니 부디 오르넵토스 님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지크벨트가 공손하게 머리 숙이며 부탁해 왔다. 유선이 지크벨트의 부탁에 생각하다 오르넵토스에게 물었다.

“오르넵토스, 꼭 가야만 하니?”

오르넵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만 해. 솔직히 말하자면, 계약자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가고 싶어. 내가 사는 세상이니까. 그 세상을 어지럽히던 녀석이 있다면 가서 혼내 주고 싶어.”

오르넵토스는 정령왕으로서 이세계를 지켜오다 실패한 몸이었다. 그렇기에 오르넵토스는 그걸 만회할 기회를 잡으려 한다면 기꺼이 돕고 싶을 것이다.

유선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오르넵토스를 데려가십시오.”

“은혜는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부디 제가 당신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알아주시길.”

지크벨트는 다시 한 번 더 승낙해 준 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오르넵토스는 유선의 마나로 유지하던 몸을 지크벨트로 옮겼다. 그러자 마나에 반응한 오르넵토스의 몸이 엘레노어의 마나 받을 때와 비슷하게 몸이 성장했다.

‘마왕을 물리칠 몸이었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지.’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성인이 된 오르넵토스가 유선을 보며 말했다.

“그럼 계약자, 다녀올게. 엘레노어 잘 지켜 줘.”

“걱정하지 마.”

“잘 갔다 와!”

나가는 오르넵토스를 보며 힘차게 손을 흔드는 엘레노어. 유선도 그녀를 따라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유선은 떠나보내고 나서 옆에 서 있는 루데릭을 보며 물었다.

“루데릭.”

“왜 그러느냐?”

“지금 지크벨트 씨가 오르넵토스를 데리고 간다고 해서 렛놈을 이길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까?”

그러자 루데릭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냉철하게 대답했다.

“지금의 용사라면 턱없이 부족하다. 희망을 바라지 않는 이상.”

유선은 지크벨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크벨트는 희망을 잡으려고 발버둥 칠 때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말 때문인지 어째서인지 그 발버둥 치는 것이 이 일에도 그 말처럼 되지 않나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겠지?”

유선은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노인과 세네타가 실패할 것만 같은 기분에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루데릭은 대충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오지랖을 부릴 생각이냐?”

“오지랖이라면······ 그렇기도 하지.”

“자신은 썩 좋은 생각이라 하지 않는다.”

루데릭이 말했다.

“용사의 싸움은 용사에게 두어라. 괜한 위험을 무릅쓰는 건 허락해 줄 수 없다. 주인의 몸으로 그걸 해결하려 드는 건 너무나도 큰 일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위한 거잖아. 이 땅에 살아가는 주인으로서 뭔가 해야 하지 않겠어?”

“그린피스에 나올 법한 문구를 쓰는군. 그런 게 설득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하나?”

사실 유선도 그렇게 투철한 지구애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생각나서 하는 말이었을 뿐이었다. 유선은 그저.

“오르넵토스가 다칠 수도 있잖아.”

“음······.”

“세네타와 지크벨트, 두 명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해도, 오르넵토스는 우리 가족이야. 오르넵토스가 악마의 계략에 넘어가서 고통스럽게 당하는 걸 둘 순 없잖아, 안 그래? 엘레노어는 그렇지?”

“응!”

엘레노어에게 고개를 돌리며 묻자,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동생도, 칭구도! 엘레노어가 지킬 거야!”

“그래, 그래.”

“······.”

루데릭은 그 말에 기쁘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입술을 안쪽으로 말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루데릭은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나서고 싶은 건 알겠지만, 지금은 용사를 믿어라. 만회하려고 싸우는 것인 만큼 그를 믿는 것도 지금 할 방법 중 하나이다.”

“알겠어.”

루데릭의 말대로 그들의 싸움을 믿으며 일단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

렛놈의 던전이 발현된 동부 지역. 지크벨트와 세네타 그리고 오르넵토스는 그곳에 도착했다. 별것 아니라는 여론과 다르게 렛놈의 던전에 쓰인 장비들은 죄다 수십억이 넘어가는 장비들이었다. 코드 헌터와 다를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던전 관리청 청장과 헌터 협회장이 서 있었다. 그들은 지크벨트와 세네타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다급히 달려가 깍듯하게 지크벨트에게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늘 고생이 많습니다.”

그들은 지크벨트의 정체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각성제를 받아야 하는 이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에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체를 조금 누출한 상태였다. 하지만 철저히 비밀로 한 상태였고, 그 비밀이 유지되어서 현재까지 유지했다.

코드 헌터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군이 개입되었다면, 지금은 믿는 헌터들과 게이트 키퍼들로 이루어졌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 어떤 코드 헌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감이 큰 상태였다.

오르넵토스는 조심스럽게 렛놈이 발현된 곳을 올려다보았다.

‘용사가 괜히 내 힘이 필요하다고 한 게 아니었네.’

정령왕으로서 느끼는 렛놈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보통 이계의 틈과는 다르게 구역질이 나게 하는 역한 기운이 풍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갗을 파고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것은 명백한 악의였다. 순수한 흰색 도화지와 다르게 검은색으로 완전히 물들어 버린 악의뿐인 틈이었다. 그 속에서 오르넵토스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지 걱정이었다.

“오르넵토스 님.”

“그래.”

“제 검으로 부디······.”

2m 가까이 되는 특대 검이었다. 그 검 가운데에는 빈 수정구가 들어 있으며, 그 수정구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었다. 사람이라면 본래 육신을 버려야 하지만, 오르넵토스 같은 정령왕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오르넵토스는 그 검을 보고는 지크벨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용사, 네 성검은 어디에 두었지?”

오르넵토스는 묻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걸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크벨트는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대답을 건네주었다.

“구차한 변명을 하자면, 마왕을 봉인하면서 함께 차원 너머로 가 버렸습니다.”

“성검이 없다······. 용사에게 한 번 더 실망하네.”

“죄송합니다.”

본래 용도는 마왕을 무찌르는 물건. 봉인에 성공했다면, 성검이 사라졌다고 크게 분개할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하기야, 성검이 있다면 나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았겠지. 안 그런가?”

“······부탁하겠습니다, 오르넵토스 님.”

“이 세상을 구하는 데 집중해.”

오르넵토스는 수정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수정구가 일으키는 힘을 그대로 받아들여 몸이 용사의 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색찬란한 수정구가 완성되며, 차가운 검신에서 은은하게 오라를 띠기 시작했다. 용사는 그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는 세네타를 보며 말했다.

“세네타.”

“네.”

“이제 가자. 검을 뽑아라.”

지크벨트가 그렇게 말했지만, 가죽 갑옷 차림인 세네타에게는 검이 없었다. 하지만 세네타는 검이 있는 장소를 알고 뽑는 방법도 알았다. 세네타의 오른손에 새겨진 검의 각인이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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