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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기계는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3) (73/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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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기계는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3)

각성제.

그것이 얼마나 생산되고 어떻게 생산되는지 과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철저히 비밀로 여긴 채 공수해 오며, 시험에 통과한 이들에게 주입했다. 그 베일에 싸였던 과정이 오늘에서야 밝혀졌다.

그 힘도 용사의 것이었다. 자신의 힘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 괴물들과 대항할 헌터라는 직업을 만들어 냈다.

“이런 사달을 일으킨 것은 결국······ 당신이 넘어옴으로써 일어난 일이라는 거군요.”

“······ 그렇습니다.”

지크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론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에너지 문제에 시달리다 코어를 통해서 해결했고, 지금도 지속적으로 코어의 용도를 늘리는 방법들이 늘어나기에, 헌터라는 직업이 좋아졌다. 만약 단순한 의무로만 헌터로 생활해야만 했다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치 없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저는 이 세상에서 한 번 더 희망을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죠. 그 많은 인간은 결국 자신들의 속을 채우기 급급했고, 마왕과 싸울 만큼 강하게 성장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제 몸은 갈수록 노화되어 갔죠. 그래서······.”

그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래서인지 유선은 듣기가 두려웠다. 알기에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세네타 앞에서 그 말을 꺼내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벨트는 유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세네타라는 차선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은 움직여서 싸울 수 없기에, 완전히 늙어 가기 전에 아이를 낳으려 했다. 유선은 속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세네타가 그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기에 더욱더 화가 났다.

그것은 결국 세네타도 도구로서의 삶을 살게끔 시켰던 것이고, 세네타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진정하여라. 진정해.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

루데릭이 그의 분노를 잠재우려고 목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그 감각에 유선은 일순간 감정에 사로잡혔던 생각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제가 희망을 바라보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희망의 끝에는 결국 모든 것의 파멸을 이끄니 말입니다.”

유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말을 함부로 꺼내 들려 하지 않았다. 그저 지크벨트와 눈을 마주하며 볼 뿐이었다.

지크벨트는 유선의 눈을 보고는 그의 생각을 대충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는 더는 의미 없음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보니, 더는 이야기가 안 될 것 같군요. 그렇다면 서로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말입니다······.”

지크벨트는 말을 줄이기로 했다.

“이제 이 늙은 몸을 이끌고 온 것이 헛되지 않도록 정유선 씨가 약속을 지킬 차례로군요. 그녀가 하려던 말을 제게 알려 주시겠습니까?”

유선은 감정을 추스르며 애써 침착하게 대답해 주었다.

“새로운 희망을 위해, 어쩌면 희생뿐일 수도 있는 또 다른 날을 위해, 걸어가라······.라고 말했습니다.”

“······ 그렇군요. 아르젤다운 소리입니다.”

그가 무엇을 느꼈는지, 유선은 알 수 없었다. 지크벨트는 그저 대답을 얻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세네타도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수정구는 다음에 받으러 오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결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크벨트가 그렇게 자리를 나오려 했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에 입을 꾹 다물던 유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유선은 이 질문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를 붙잡았다. 지크벨트는 기꺼이 그 질문을 받아 주었다.

“말씀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이 도구로 살았던 것처럼······. 따님마저······ 기계로 살기를 바라십니까?”

“······.”

유선은 그것에 대답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혈육을 몰아넣은 것에 대한 죄책감. 유선은 그것이 조금이라도 보이길 바랐다. 하지만 노인은 그 말에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다. 아니, 오히려 미소 지었다. 오묘하게 뜻을 알 수 없는 그 미소, 그 의미를 생각할 틈도 없이 유선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기계입니다, 정유선 씨. 그리고 기계는 그 누구에게도 어떤 동정도 바라지 않습니다. 망가지기 전까지 그저 사용될 뿐이지요.”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는 듯한 말을 하며 노인은 그 자리를 나왔다.

***

“유선 님, 유선 님.”

“······.”

“유선 님!”

“으, 응?”

책상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유선은 엘레노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보았다. 푸른 사파이어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렸다.

“책 같이 읽자.”

활자가 조금은 빡빡해진 동화를 가져왔다. 할 일이 없었기에, 유선은 그녀의 요청을 받아 주었다.

“그래, 읽자.”

“유선 님, 어디 아파?”

평소 같은 유선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엘레노어가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지크벨트와 이야기한 지 이틀이 지났다. 용사가 넘어와 세상이 어지러워졌다는 것, 그리고 세네타는 용사의 자식임과 단순히 기계 취급만 받는다는 것. 너무 많은 것이 머릿속으로 들어와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유선은 아직 그가 한 말에 대한 충격을 잊지 못해, 기분이 오묘한 상태였다. 유선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심이 파괴되어서 그럴까?”

“동심?”

“엘레노어가 보는 내가 사실 내가 아니라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아?”

“유선 님이 유선 님이 아니야?”

엘레노어는 그 말이 어려운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인상을 팍 쓰며 유선에게 대답했다.

“유선 님은 유선 님이야! 가짜 유선 님은 없어.”

“그러니?”

“응!”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어리기에 의미를 몰라 말하는지, 아니면 어떤 유선의 모습이라도 수용한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유선은 그녀의 말을 들으니 뭔가가 안심됨을 느꼈다.

“고마워.”

유선은 엘레노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동화를 함께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유선의 휴대폰에서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지크벨트, 한강에서 산책 중.

이틀 전에, 지크벨트와 세네타가 나가면서 앞으로 동태를 살펴야 할 것 같은 지크벨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게끔 루데릭이 기율에게 감시자를 붙이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몇 가지 특이 사항이 있다면, 유선에게도 보고했다.

지크벨트가 혼자 나와서 어디선가 서성인다는 것은 큰 특이 사항이었다.

“한강에서라······.”

마침 할 일도 없고, 엘레노어와 놀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책을 읽는 엘레노어를 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엘레노어, 같이 산책하러 나갈까?”

그러자 엘레노어는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갈래!”

읽던 책마저 덮어 버릴 정도로 아주 좋아했다. 외투를 입으며, 그와 함께 갈 채비를 했다.

“아!”

그렇게 나서려던 순간, 뭔가를 잊어버렸다는 듯이 엘레노어는 재빠르게 달려가 뭔가를 가져왔다. 그녀의 손에는 육중한 물체가 들렸다.

“멍멍이도 데려갈래.”

절규하면서 바동거리던 모습도 이젠 없고,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반응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조금 겁은 먹었지만, 어느 정도 무감각해진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나의 운명. 그래, 이것도 어느 정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일 것이야.

유선은 오랜 수행 끝에 득도한 중생처럼,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어째서인지 걱정되었다. 나쁜 상황은 아니기를 바라며, 멍멍이를 데리고 함께 한강으로 발을 옮겼다.

***

한강에 도착한 유선은 지크벨트를 찾으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지크벨트가 어느 다리 사이에 있는지, 단순히 위치가 어딘지만 아는 탓에 지금은 홀로 앉아서 산책할지, 벤치에 앉았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교 사이 그 공간이 그렇게 넓지 않아 발견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그를 발견했을 때의 모습은 전혀 상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혼이 나는 모습이었다. 아이는 울고, 아주머니가 지크벨트를 붙잡은 채로 뭔가 설교하는 것 같았다. 누가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선은 이런 경우는 대부분 아이의 과실이었던 거로 기억했다.

지크벨트는 그저 고개 숙이며 사과할 뿐이었다.

“허허, 미안합니다.”

“좀 똑바로 보고 다니세요!”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끌고 가 지크벨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앉았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민간인들에게 빌빌거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한낱 죄 많은 인간입니다. 사소한 과오를 저지른다 해서 제가 힘을 써 버리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참교육만이 남겠죠.”

유선이 그렇게 말하자, 지크벨트는 미소 지었다.

“맞는 말이겠지만, 그건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정유선 씨. 제가 흥분해서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날이라면 아마 그때는 제가 용사로서 실격을 받은 날일 겁니다.”

“그렇습니까?”

“용사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되어야 하니까요. 분노에 휩싸이되 끝까지 냉정해져라,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용사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분노에 휩싸이되 끝까지 냉정해져라. 뭔가가 모순되는 듯한 말이었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노인 옆에 앉았다. 엘레노어가 멍멍이를 안은 채로 유선에게 물었다.

“멍멍이랑 놀고 올게!”

“응, 놀고 와. 다치지 않게 놀아야 해?”

“응!”

단둘이서 이야기할 시간을 준다면, 유선이야 좋았다. 엘레노어는 활발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딸입니까? 닮지 않았는데, 부자지간같이 느껴지는군요.”

“딸은······ 아니지만, 딸처럼 소중한 아입니다.”

“그렇군요.”

지크벨트는 엘레노어를 보면서 무슨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유선이 지크벨트에게 던졌던 마지막 질문을 다시 한 번 더 상기하며 그에게 물었다.

“정유선 씨가 말씀하셨죠. 딸마저 도구처럼 살기를 바라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 번 해 주었다.

“저는 그 누구도 도구가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특히 제 딸, 세네타도 그렇습니다.”

기계는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던 용사였다. 유선은 그가 대답을 바꾼 것이 궁금했다. 그가 어느 정도 부성애를 가져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따님에게 자의를 못 가지게 합니까?”

노인이 슬프다는 듯이 그에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제가 이 세상을 향한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기심?”

“차선인 세네타는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의무감으로 낳은 아이라지만······ 부성애라고 해야 할까요, 그 아이를 가지고 나니 정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이 세상에 이계의 틈이라는 혼란을 가져온 것은 저입니다.”

그렇기에 함부로 정을 주면서 키울 수가 없었다. 세상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을 없애는 데 필요한 것은 실력 있는 전사지, 감성이 풍부한 소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용사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왜 지금 와서 이렇게 얘기해 줄까?

유선은 그것에 관해서 물었고, 용사는 대답했다.

“세네타도 귀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둘이 있을 때를 노렸지요. 분명히 둘만 남으면 유선 씨가 알아서 찾아올 테니 말입니다.”

“감시하셨던 것을 아셨군요.”

그 물음조차 어리석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숨은 루데릭도 찾던 실력인데, 겨우 사람 하나가 지속해서 따라붙는 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단지 위협이 안 됐기에 내버려 두었다.

유선은 고개를 들어, 엘레노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멍멍이를 안은 채로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개를 끌고 나온 아이들이 강아지들을 데리고 개싸움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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