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34. 기계는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2)
“그게 용사?”
“생각해 보아라, 주인. 아무리 이세계 인간들이 멍청하다고 해도 자신들에게 위협의 여지가 있는 이들을 뽑겠느냐? 그런 놈을 용사로 선정해서 여정을 보내진 않는다. 용사의 검은 세상 모든 힘을 담았다 해도 무방한 검. 그런 검으로 악마를 죽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시에 인간들도 단번에 죽일 힘을 가졌다.”
“나 같으면 직접 검을 들고 가서 싸우고 말지.”
오르넵토스는 와인을 들이켜며 말을 받아쳤다.
“그래서 용사가 인간들에게 베푸는 덕목 중 하나가 은둔형으로 살 것이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서 괜한 명예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말이다.”
“그 모든 게 의도된 거였구나.”
루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제 임무 이외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해 놓은 것은 모두 인간들이 그렇게 하게끔 세뇌 교육하고 시켜 왔기 때문이다. 악마를 맹목적으로 증오하게끔 말이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 어떤 곳에서도 안주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도사리는 악을 없애라~.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지만, 그래도 완전히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아.”
“······.”
그렇게 말하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르젤이 어째서 그런 슬프면서 기쁜 표정으로 희생이라는 말을 했는지······. 개인적인 욕망을 모두 없애 버리고 살기를 강요하는 인생.
아르젤은 성녀가 되려고 끔찍한 고통을 이겨 내야만 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나타나는 여신을 찾고자.
용사는 증오심에 갇혀 살았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악을 멸하고자.
부우우웅!
문자 메시지가 왔다는 진동이 울렸다. 유선은 전화기를 들어 확인해 보았다. 차기율이 보낸 문자는 이러했다.
-세네타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사람이 들어왔소!
드디어 왔다! 유선은 기율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떻게 생겼어?
-그것까진 모르겠소. 노쇠한 노인이라서 처음에는 그냥 노인인가 보다 했는데, VVIP 층을 안내받은 걸 알고 뒤늦게 알았소.
쓸모없는 놈. 유선은 혀를 쯧 하고 차면서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래, 내일 모시고 회사 출근해 줘.
-걱정하지 마시오!
기율의 문자를 보고 유선은 휴대폰을 덮었다. 용사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생각을 하니 유선은 기대되면서 한편으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
다음날, 유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출근했다. 아직 잠에 허덕이는 엘레노어는 직원 복지용으로 놔둔 개인 소파에 앉혀 재워 놓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같이 있으려고?”
“오랜만에 용사의 얼굴을 보는데, 계약자는 불편해?”
“아냐.”
오르넵토스가 있어 준다면 아군이 늘어나니, 안심할 것 같아 내버려 두었다. 소파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루데릭은 올 때까지 같이 있었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을 생각인지, 유선도 모르는 곳에 기척을 숨긴 채 있었다. 오르넵토스와 단둘이서 기다렸다.
오기 전에 미리 연락을 달라고 부탁해 놓은 대로 기율은 유선에게 연락해, 세네타와 노인이 왔음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기율이 먼저 들어와 손님을 안내했다. 세네타, 그리고 옆에는 본 적 없는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흰머리로 수북한 노인. 곱게 늙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세월의 거친 흔적들이 보이지 않게 나이를 먹은 얼굴이었다. 지팡이를 다리로 삼아 겨우 몸을 지탱하는 모습이었다. 외견만으로는 한때 악마들의 공포의 대상인 용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다. 노인과 눈을 마주할 때, 유선은 순간 전율하고 말았다.
세월에 감출 수 없는 노련한 전사의 눈. 그리고 무림을 떠돌아다니는 은둔 고수 같은 은밀히 뿜어 나오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노인이 유선에게 다가오더니, 그를 알아보고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정유선 씨.”
“반갑습니다. 어제 통화하신 그분이로군요.”
노인의 쉰 목소리로 건네는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지크벨트’라고 합니다. 흔히들 용사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지크벨트 유’ 씨가 되는군요.”
“무슨 말씀입니까?”
노인, 지크벨트가 유선의 말에 물음표를 달았다. 유선은 그의 물음에 당황하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성이 ‘유’씨가 아닙니까?”
“유? 아닙니다. 저에게는 성이 없습니다. 그저 이름만 있지요.”
“세네타 씨가 유씨라서 아버지 성을 딴 줄로만 알았습니다.”
“유라······. 아,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예전에 그 아이가 인터뷰 때문에 쩔쩔맬 때, 이름을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기자 한 명을 가리켰을 때 ‘You’라고 했는데, 그걸 성씨로 딴 걸 겁니다.”
“······.”
성이 생긴 이유가 카이저 소제급이었다. 유선은 대화 주제를 넘기며 다시 지크벨트를 환영했다.
“아무튼 누추한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유선은 지크벨트와 세네타를 이끌고 휴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앉았던 오르넵토스가 지크벨트를 보자마자, 미소 지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래간만이야, 용사.”
노인은 그녀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런, 오르넵토스 님이시군요. 작은 몸으로 있으셔서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무지를 용서하고, 몸이 약해 무릎을 꿇지 못하는 것도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아.”
오르넵토스가 관대하다는 듯이 그에게 말했다.
노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숨은 악마도 엿듣지 마시고, 그냥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당신을 해칠 의도는 없습니다.”
“······.”
루데릭이 근처에 있음을 알았다. 루데릭은 어딘지 알 수 없도록 울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악마를 죽일 것처럼 구는 걸 단순히 한두 번으로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증오를 보였던 너를 믿으라고?”
“싸우자는 의사를 보였다면 진즉, 딸을 시켜서 죽였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큰 위협이 안 됨을 압니다. 적어도 이 남자가 있는 한.”
지크벨트는 유선을 보며 말했다. 그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님을 안 루데릭은 그 누구도 모를 것 같은 장소에서 살며시 나왔다. 그리고 유선의 뒤에 서며 그에게 경계의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진심임을 알아도 루데릭은 유선의 뒤에서 함부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말씀대로 제가 이곳까지 직접 왔으니 이제, 정유선 씨가 약속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수정구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지크벨트가 요구했다. 지금은 엘레노어, 오르넵토스, 루데릭이 모두 있는 상황이었다. 세네타가 뛰어난 헌터이기도 하고, 용사의 힘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걱정할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유선은 가방 안에서 수정구를 꺼내 보여 주었다. 원래 서랍에 보관했지만, 혹여나 세네타가 큐앤의 문을 따고 들어와 훔쳐 가는 경우를 생각해, 집으로 가지고 갔다. 유선은 노인에게 수정구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힘이 빠진 노인의 얼굴이 그 수정구를 향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반쯤 뜬 듯한 눈 속에서는 수정구가 뿜어내는 푸른빛에 경이로워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노인은 손을 뻗었다.
“아르젤······.”
수정구를 손으로 감싸며 침묵했다. 그리고 뭔가를 느끼는지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수정구를 양손으로 만졌다. 그는 유선에게 질문했다.
“그녀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제가 본 아르젤의 모습이라면······.”
성스러운 여신의 모습. 여신이 자신을 묶어 둔 육신에서 벗어나 승천하는 것만 같았다. 유선은 본 그대로 말해 주었다.
“아르젤이라면 그렇겠지요. 그 어떤 절망에도 굴하지 않은 강한 여자이니까 말입니다.”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정구에서 손을 떼었다. 잠깐 잠겼던 추억도 여운을 남기지 않은 채,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수정구를 돌려받으려면, 제가 정유선 씨에게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유선은 그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보상 문제를 넘겼다.
“보상 문제보다 궁금한 것은 지크벨트 씨가 이거로 뭘 할지가 궁금합니다.”
자신의 평생 동료였던 아르젤의 물건이었다. 유선은 가치 있는 물건이기에 그 용도가 궁금했다. 그 안에 내제한 방대한 마법으로 무엇이라도 할지, 그에게 질문했다.
지크벨트는 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잊히도록 해야지요.”
“잊히도록 하다니요!”
유선은 그 용도를 듣고는 경악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르젤이 할 일을 끝마쳤으니, 세상에서 지우는 겁니다. 그 수정구를 파괴함으로써 말입니다.”
유선은 조금 전에 추억에 잠긴 얼굴, 그 표정을 봤기에 지크벨트의 말이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의 말을 들은 유선이 대답했다.
“그런 용도라면 얼마를 주신다고 하든지 간에 줄 수 없습니다.”
추억이 담겨 돌려 달라고 말해도 줄까 말까 할 정도인데, 그런 용도라면 유선은 당연히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우리도 곤란합니다. 저는 유선 씨를 해치고 싶어 이곳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얻고 싶다는 의사였다. 그때, 오르넵토스가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어 지크벨트에게 말했다.
“말을 가려서 해, 용사. 여기는 너만 있지 않아.”
“······.”
“······.”
정령왕의 위엄. 앳된 목소리에서도 죽지 않은 위엄을 보여 주었다. 괜히 왕이라는 호칭을 다는 게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지크벨트는 자신이 한 말을 곱씹어 보고는 그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제가 무례를 저질렀군요. 죄송합니다, 유선 씨. 저는 생전에 힘밖에 모르는 바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말보다 주먹이 앞선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크벨트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유선은 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 주었다.
“제게 수정구를 넘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르젤은 당신의 동료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잊히게 하다니······. 그 말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애써 침착해 보려 하지만 감정이 격앙해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노인은 그의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쳤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를 하신다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르젤 또한 그럴 겁니다. 제가 죽고, 아르젤만 남았다면, 아르젤도 저를 잊히도록 모든 흔적을 지울 겁니다.”
“아르젤도······ 말입니까?”
자상하던 성녀의 모습인 그녀가 지크벨트의 흔적을 지우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하는 것 같았다.
“이건 우리끼리의 약속 같은 겁니다. 정유선 씨.”
“······.”
유선은 지크벨트의 눈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정말로 그 어떤 감각도 없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희생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기억되어선 안 되는 희생을 해야 하는 인간입니다.”
그 이유는 루데릭에게 들은 내용과 함께 생각했다. 우상화가 되어 자신들을 겨누는 검이 되어선 안 됐기에,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서는 도구밖에 되지 않습니까?”
“도구라······ 맞습니다. 우리는 그저 도구입니다. 유선 씨, 그 어떤 희망도 바라지 않는 곳에서 태어나 사지에 몰린 채로 감정은 오로지 증오만을 품어 왔습니다. 아르젤은 저와 반대로 희망을 품고 말입니다.”
지크벨트는 그들 자신의 존재를 도구라고 칭하는 데 인정했다.
“아르젤은 희망을, 저는 증오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 두 개 감정에 잔혹하다고 여기는 운명에서 저는 단 한 번도 운명이 잔혹하다고 여기고 바꾸고 싶어 한 적이 없습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노인은 슬픈 눈으로 말했다.
“증오로 살던 이가 희망을 보려는 순간, 가장 큰 고통을 안기 때문입니다.”
“······.”
아르젤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는, 지크벨트는 희망을 찾으려고 떠났다고.
“악마를 베려고 검을 휘두르며 얻은 상처와 통증보다 희망을 품은 채로 모든 것을 등진 채 떠난 것이 제게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을 찾으려고 떠난 것은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것들, 아르젤마저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까.
“제 미숙한 힘 탓에 이 세상마저 고통을 받게 해 버릴 뻔했지요. 마왕은 가까스로 제힘으로 막아 냈지만······. 그 이후로는 제 책임을 돈벌이라는 이유로 다른 이들에게 떠맡겼습니다.”
마왕. 첫 이계의 틈이 발현되어 나온 것은······ 코드 네임: 마왕이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라는 전대미문의 몬스터에 사람들은 절망했다. 하지만 그것을 구원한 것은 똑같은 전대미문의 사내였다. 사내는 겨우 마왕을 제압시켜 다시 이계의 틈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이계의 틈이 생기는 것은 끝나지 않았고, 일반인들의 몸으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려 했다. 용사의 몸은 하나지만, 이계의 틈은 수십 개, 수백 개로 늘어만 갔다. 용사는 지속해서 늘어나는 던전을 보고 인정해야만 했다.
“제 몸에 있는 신성함······ 여기서는 각성 인자로 통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만은 이 틈을 모두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