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33. 고독한 늑대 (2)
유선은 그녀의 물음에 다시 한 번 더 확인했다.
“수정구······ 말인가요?”
“그래. 수정구. 그걸 찾으러 왔어.”
잘못 들었나 싶어서 한 번 더 물어보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똑같았다. 수정구라고 하면 하나가 존재하긴 했다. 스태프에 달린 아르젤의 수정구. 하지만 그것을 여태 어디에 내놓은 적이 없는 데다, 다짜고짜 수정구가 필요하다고 온 사람도 없었다.
‘뭐지?’
세네타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지 궁금했다. 우선 유선은 그것에 대해서 모른다고 잡아떼기로 했다.
“죄송하지만 그 정보처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잘못 입수했습니다.”
“잘못 입수해?”
“네, 저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로군요.”
“······.”
세네타는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유선을 보며 한 번 더 물었다.
“내가 ‘잘못’이라는 단어를 이해 못 했나?”
“무슨 말이죠?”
“지금 수정구가 저 책상 아래에서 아주 강하게 반응이 오는데, 내가 지금 ‘잘못’ 느꼈나 하고. 아니 잘못이라는 개념이 그 개념이 아니라면 지금 써서는 안 되는 말이겠네.”
세네타는 유선을 노려보았다. 유선은 그 눈을 보고 큰 실수를 했음을 느꼈다.
거짓말한 것이 큰 역효과를 남기고 말았다. 한층 더 경계가 심해진 눈으로 유선을 노려보며 물었다.
“말해 봐. 내가 ‘잘못’이란 말을 ‘잘못’ 쓰는지?”
“······제대로 쓰는 겁니다.”
거짓말이라고 인정한 순간, 그녀의 미간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유선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진정해라, 정유선. 이런 상황은 많았다. 유선은 기습당했던 말에 애써 적응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싸늘해진 공기 속에 세네타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왜 잡아뗐지?”
유선은 그것에 담담하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야 당신은 처음 본 사람이니까요. 제가 처음 본 사람에게 제 계좌 번호 같은 걸 알려 주겠습니까?”
“너는 저 수정구가 계좌 번호라 여기나? 그 말은 돈으로 본다고 들어도 되지?”
그녀가 직설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자, 유선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명백하게 대답해 주었다.
“어디까지나 제 소중한 물건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반말로도 그만 말해 주시겠습니까?”
유선은 슬슬 듣기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최근에 차민혁을 포함해 글러 먹을 정도로 자존감만 높은 헌터들 때문에 불쾌감이 없지 않았는데, 세네타가 그 감각을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세네타는 여전히 유선을 노려보면서 물었다.
“반말? 내가 지금 반말한다고?”
“지금 계속 반말하시지 않습니까? 상호 간에 예의를 갖추시지 않고 말입니다.”
도발하나 싶을 정도로 뻔뻔하게 물어왔다. 짜증이 몰려와 유선도 표정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네타는 다시 턱을 잡으며 뭔가 생각했다.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할지 몰라 계속해서 경계했다.
“유선 님!”
그때, 엘레노어가 난입해 버렸다. 유선의 표정을 본 엘레노어가 급하게 달려와 기어올라 앉더니.
“화내면 안 돼!”
“엘레노어, 지금 얘기하고 으어으······.”
유선의 얼굴을 꾹꾹 눌렀다. 빚어서 화나는 얼굴을 거둬 버릴 생각이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생각하던 잠깐의 생각 끝에 유선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사과할게.”
“으어아으······ 네?”
싸늘하던 분위기가 세네타의 사과 한마디에 한순간에 해빙되었다. 경계하던 유선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세네타는 여전히 매서운 눈으로 유선을 보며 말했다.
“그 존댓말이 어떤 건지 나는 잘 몰라. 나는 지금 충분히 정중하다고 느꼈는데, 그게 아니라면 사과하는 게 맞겠지. 무례를 저질렀다면 미안해.”
순순히 나오는 그녀의 행동에 유선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 화가 나 보이시는데, 제게 화가 난 게 아닙니까?”
“화나? 내가 왜?”
세네타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거짓말했다거나······.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그런······.”
“거짓말이야 할 수 있지. 처음에는 화가 좀 나긴 했지만, 네가 말한 것처럼 처음 보는 사람한테 계좌 번호를 알려 주진 않잖아?”
유선은 그녀가 화가 났다고 여겼던 것을 모두 말해 주었다. 유선은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감정 표현이 서툴렀구나.’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거기다가 표정 변화도 없으니, 그저 개싸가지로만 보였다. 세네타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짐작했는지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던 것 같은데. ‘오해’라는 걸 일으킨 듯하네. 너한테 화나지 않았어. 눈매가 아버지 닮았어. 그래서 인상 쓰는 거로 많이 보인대. 그게 너한테 화난 것처럼 보였다면 미안해.”
“······.”
세네타를 이루는 모든 것이 착각하게 하게끔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유선은 긴장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져서 허탈감을 느꼈다. 자신의 얼굴을 만지려 드는 엘레노어를 끌어안으며 세네타에게 물었다.
“그런데······ 반말은 왜 자꾸 하십니까?”
“한국에 있을 때, 계속 이렇게 말했는데?”
“누가 뭐라 안 합니까?”
“아무도. 아마 정유선, 네가 처음일 거야.”
세네타는 갑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들러붙는 업체들은 을이었다. 그리고 갑에게 잘 보여야 하는 을의 처지에선 갑에게 밉보이는 행동을 해선 안 되었다. 그녀의 무례한 말버릇에 지적은커녕, 비위를 살살 맞춰 가면서 꼬여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네타는 자신의 말버릇이 나쁜지 좋은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고······.
유선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에게 살살 비위 맞추겠다고 꼬리 친 사람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튼······ 제게 그렇게 악감정을 가졌단 말은 아니죠?”
“아니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많이 알아봤으니까. 나쁜 감정 같은 건 없어.”
여자는 눈매가 나빠 성격이 사나울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순했다. 유선은 그간 긴장했던 것이 바보처럼 여겨져서 부끄러웠다.
“그쪽이 말을 놓은 만큼, 저도 말을 놓을게요. 그래도 되겠죠?”
“상관없어.”
세네타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수정구······ 에 대해서 말했지?”
“응.”
“그게 왜 필요해?”
그것을 알아낸 출처야 유선이 수정구를 놔둔 위치마저 알았기에, 그녀의 감으로 알아냈다 해도 무방했다.
“나도 몰라.”
이건 무슨 소리일까?
“모른다니? 이해가 가게 이야기해 줄래?”
“말 그대로야. 나는 몰라.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원해. 왜 아버지가 그걸 원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나는 몰라.”
“······.”
그 말은 필요한 장본인이 아니라 단지 회수만 하러 온 대리인이라는 것이었다. 그 목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회수하라는 명령만 받고 이곳으로 왔단다.
유선은 대리인을 만났다는 게 썩 유쾌하지 않았다. 검지로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기분 나쁜 기색이 보이지 않도록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우선 내 입장을 말하자면, 네게 수정구를 선뜻 넘겨줄 수는 없어.”
“충분히 예상했어. 돈이라면 충분히 줄게.”
돈이라면 유선도 충분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세네타가 먼저 치고 들어와 자신의 명의로 된 통장을 보여 주었다.
“대충 나한테는 이만한 돈이 있어.”
“······.”
유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수정구를 주려고 할 뻔할 정도로 경이로운 숫자였다. 정신을 차린 유선은 다시 밀어내었다.
“미안하지만, 사례금을 준다고 해도 이건 줄 수가 없어.”
“······사람들은 돈 좋아하지 않아? 너도 돈이 좋잖아, 안 그래?”
“그렇게 일반화해 버리면 좀 화가 나는데. 돈이 필요하지만, 그 수정구를 팔아 버리고 싶을 만큼, 급한 상황은 아니라서 말이야.”
“급한 상황 아니야? 돈에도 그런 게 필요한가?”
“······.”
말이 제대로 안 통했다. 유선은 인내심을 가지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튼 돈으로 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얼마를 부르든 난 그 수정구를 함부로 내줄 생각은 없어.”
“그러면 곤란한데······. 아버지는 그 수정구를 반드시 가져와 달라고 했어. 될 수 있으면 무력은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것도 가급적이라는 의미에 한해서고.”
그 말은 싸움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살기를 뿜지도 않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유선은 무심코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혹여나 그 말에 흥분해서 살기를 뿜어내는 일이 없도록 그녀를 애써 진정시켰다. 다행히도 그의 의도에 맞게 엘레노어는 세네타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가져가야만 한다는 세네타. 그리고 절대로 줄 수 없다는 유선. 교착 상태에서 세네타는 분명히 극단적인 상황으로도 갈 수가 있었다. 결과야 어찌 됐든 서로에게 좋을 리 없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유선은 세네타에게 말했다.
“수정구를 줄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아.”
그의 말에 세네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유선을 보았다. 눈이 좀 더 커진 것이 희망을 본 것에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게 뭔데?”
“네 아버지라는 사람. 그 사람이 직접 이곳으로 오라고 해.”
유선은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뭔가 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이한 능력이 있어 이곳으로 세네타를 보낸 사람이거나, 아니면 아르젤이 말했던 ‘그 아이’일 수도 있었다. ‘그 아이’가 나이를 먹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
그러자 희망에 차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제안이 상당히 곤란한 눈치였다.
“그건 할 수 없어.”
“왜지?”
“아버지는 숨어서 사시니까. 그런 제안을 안 들어줄 거야.”
그녀가 시선을 바닥에 두면서 낮게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리고 내가 하지도 못하고 말이야.”
잘못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에 두려움의 그늘이 보였다. 세네타 유가 아버지를 두려워한다고 하니, 별로 믿기지 않아서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당사자와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그것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연락할 수단은 있어?”
“······.”
“있다고 들을게.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말해 봐. 설득 자체는 내가 해 줄 테니 말이야.”
세네타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요즘 스마트폰 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구식 휴대폰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버지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세네타가 전화번호를 찍으면서 유선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전화로 여기에 있는 수정구에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리고 그 수정구가 당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알려 줘.”
세네타는 그 말을 듣고, 전화 버튼을 눌러 연결을 시도했다. 뚜르르르-뚜르르르- 하고 돌아가는 소리에서 세네타는 유선에게 경고했다.
“이거로 전화해서 아버지가 만약 지시한다면, 나는 뭐든지 들을 거야. 심지어 너를 죽이란 소리를 하더라도 망설이지 않을 거란 것만 알아 둬.”
철저하게 남남이라고 한 번 더 경고했다. 유선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착 달라붙는 든든한 패를 가졌으니 말이다. 세네타는 구식 휴대폰의 전화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연결음이 끊기고 목소리가 들렸다.
“%$!······.”
세네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뭔가를 얘기 나눴다. 이세계의 언어인 건 확실하지만, 어느 나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었고, 세네타는 유선이 말한 대로 그대로 전해 주었다.
그리고 답신이 왔는지 힐끔 곁눈질로 유선을 보았다. 철저하게 감춰진 무표정 속에서 유선은 그 대답이 어떤 것인지조차 유추할 수가 없었다. 세네타가 잠시 전화기에서 귀를 떼며 유선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하는데?”
예상했던 반응 그대로였다. 유선은 수정구에 묶인 아르젤이 사라지면서 말해 주었던 그 전언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페르아의 신전 속에서 희생되어 버린 네 여자 파트너가 전해 줄 말을 안다고 말해 줘.”
“······%^@^@&$%#.”
알아서 뭔가를 번역해 그대로 알려 주었다. 말을 번역해 주자, 한 번 더 유선을 보며 곁눈질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바꿔 달래.”
이번에는 전화기까지 내밀었다. 유선은 그녀가 건네는 휴대폰을 건네받아 그대로 들었다. 그리고 유선은 생각했다.
‘어떤 언어로 해야 할까?’
그녀가 한 언어를 자신이 구사할 리가 없었다. 유선은 한순간 망설이다가 당당하게 한국어로 밀고 들어갔다.
“전화 바꿨습니다.”
-당신은······ 그녀를 본 적이 있습니까?
세네타와 비슷하게 유창하게 한국어를 했다. 힘을 잃어 가는 노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울려왔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늙어 가는 노인의 목소리에 유선은 제대로 말했다.
“그녀라는 단순한 지칭으로만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겠다면, 떠보는 행동으로 알겠습니다. 저는 그녀의 존재도 압니다. 그러니 똑바로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의심이 많으시군요. 제가 말하는 것은 ‘아르젤 디 페르아 로스첼’, 마법사이자, 페르아의 성녀, 그리고 그 성녀가 가진 세계수의 지팡이에 꽂힌 수정구를 가졌던 사람을 말합니다. 이 정도면 당신의 의심을 풀만 한 대답이었습니까?
“······충분하군요.”
그 거침없이 말하는 목소리에 유선은 확신했다. 그것은 자신이었다. 마법사와 용사의 이야기, 그 묻혀 버린 전설의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