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31. 어느 마법사의 여정 (3)
아르젤이 자신만만하게 보고가 있는 장소라고 말한 곳에는 넓은 방이 있었다. 만약 그 안을 보물로 반만 채웠더라도 다리에 힘이 풀리고 주저앉아 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곳은 넓은 방, 그게 끝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 어라?”
유선을 공격해 오던 기사도 없고, 장치도 없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시체들만 즐비하게 놓였다. 오른쪽에 보물이 있을 거로 호언장담했던 그녀였기에 펼쳐지는 광경에 눈을 의심했다.
“여기가 보고가 맞습니까?”
“네, 부, 분명히 여기에 있었어요. 오른쪽에는 금화들로 가득 쌓았고, 왼쪽에는 은화들로, 그리고 가운데에는 보석들이 든 상자들로 가득······.”
줄줄이 읊던 아르젤은 머릿속에서 시나리오가 하나 그려지는지 말을 멈추었다. 충분히 유추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곳을 비울 때, 보고를 가만히 두고 갈 리가 없었다. 많은 보물을 손에 쥐고 나오려고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났을 것이고, 타락에 찌든 인간들은 결국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갔다.
보물을 지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단순히 누가 더 많이 가져가나, 공정하게 가져가자 이러면서 생긴 다툼에 생겨난 해프닝이 분명했다. 그 말은 결국 모든 사람이 타락했다는 의미였다. 아르젤은 그 의미를 눈치채고 복잡한 표정으로 그곳을 보다가, 다시 활발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유선을 보며 말했다.
“다른 곳으로 가 보죠! 모험가님이 찾는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네······.”
아르젤이 희망을 찾으려는 것처럼 말해 보지만, 유선은 어째서인지 기대감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것도 찾지 못할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아무것도 없네요······.”
아르젤이 실망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나름대로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보물이라 할 것들은 모조리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사라지거나 훼손되어서 가치가 없어진 물건들뿐이었다. 도서관도, 예배당도, 그 어디 할 것 없이 모두 사라졌다.
“후으으······. 죄송해요, 모험가님. 제가 기대만 잔뜩 하게 해 버리고······.”
“아닙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수 있으니까요.”
황제의 무덤 같은 것도 아니고, 한때 신전으로 쓰인 곳인데, 당연히 누군가가 여기를 나갈 때 털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숨겨진 길이나 뭔가 있는 것을 알려 줘 모험심을 자극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부 구조가 어떤지만 알아도 충분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이런 방대한 지식을 가지도록 도와줄 스태프가 생겼는데 상상 이상의 수확이었다.
“이제 아르젤 씨의 조건으로 넘어가죠.”
“괜찮으시겠어요?”
“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는 둘러볼 것도 없는데, 가져갈 것은 물론 없을 것이다. 유선은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아르젤은 미안한 게 많아 보였지만, 유선의 말을 듣고 그에게 지시했다.
“그러면 가죠. 여신님을 볼 곳으로.”
신을 찾는 것이 그녀의 목표. 그러나 아르젤이 그를 이끄는 곳은 예배당이 아니었다. 보통 신도들이 신을 찾는다면 예배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넓은 홀과 달리, 그곳은 마치 죄수들을 가두는 굴로 가는 것처럼 아래층으로 향하는 나선 계단이 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아나요?”
아르젤이 유선에게 물음을 던졌다. 유선은 그것에 대해 대답했다.
“신을 찾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신을 찾으러 왜 내려가는지 아시겠어요?”
몰랐다. 이제는 완전히 라이트 토치에 의지해서 내려가는데, 그렇게 어두컴컴한 곳에 여신을 만나러 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페르아 여신은 자비의 여신. 자비는 언제나 베풀어지고, 동시에 보이지 않지요. 희망을 품는 자에게는 축복을 내려 주려 내려오지만, 타락한 자에게는 등을 돌리는 여신이랍니다. 그런 신은 가장 절박한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답니다.”
굳게 닫힌 석문에 손을 얹으며 유선에게 말했다.
“그런 여신을 보려면 그 어떤 희망이 없으리라 여기는 곳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이 가장 필요했지요.”
유선은 아르젤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 어떤 희망도 없으리라 여기는 곳······ 그녀가 말하는 장소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나선 계단 아래에는 정말로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신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고문 도구와 쇠창살. 벽 틈에서 흘러들어 오는 바람은 비명을 연상케 했다. 수십 년 동안 방치되었지만, 그 안에 남은 핏내를 모두 빼내는 건 무리인지, 희미하게 남아 뇌를 자극했다.
“유선 님······.”
“괜찮아, 괜찮아.”
시체 따위를 봐도 무서워하지 않던 엘레노어가 점점 공포에 사로잡히려는 것 같았다. 유선은 엘레노어를 끌어안으며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유선도 불안해지기 시작해, 자유롭게 주변을 구경하던 아르젤에게 물었다.
“아르젤 씨, 이곳에 온 이유가 당연히 있겠죠?”
“네, 이건 단순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랍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르젤은 유선과 엘레노어와 달리 그 풍경이 익숙하다는 듯이 불안해하지 않았다. 지하실의 끔찍한 풍경을 지나면서 다시 석문을 마주했다.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또 다른 인물이었다.
갑옷과 뼈 무덤이었다. 그 위에는 견장을 단 기사가 검을 꽂은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것은 부패하지도, 죽은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이 잡아먹혀 타락한 기사들처럼 붉은 안광을 뿜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려 온 것처럼, 기다려 오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으려고 홀로 시체를 바리케이드로 삼아 그 위에 앉았다.
“침입자······냐? 질리지도 않고 찾아왔구나.”
남자가 섬뜩하게 물어 왔다. 힘겨운 몸을 들어 올리며 검을 뽑았다. 묵중한 대검. 그의 키보다 더 큰 검이었다. 생각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눈에는 침입자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가 보였다. 아르젤이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괜찮아요. 수호하는 검이여, 이들은 침입자이지만, 우리의 적은 아니랍니다.”
“이 목소리는······ 아, 아, 당신이 거기에 어째서······. 쿨럭쿨럭.”
피폐해진 시체 같은 숨을 내뱉으며 기침했다. 아르젤과 그 의문의 노인은 아는 사이인 듯했다. 아르젤은 간곡해진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제는 더는 지킬 것이 없습니다. 수호하는 검이여, 그러니 이제는 더는 고통스러워하지 마세요.”
“아······.”
“당신은 모든 의무를 마쳤습니다. 이젠 쉬세요.”
아르젤의 속삭임. 그것은 붉은 안광을 내뿜던 기사들이 반응한 것처럼 노인도 차츰 편안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신이시여······.”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내뱉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약속을······ 지켰습니다.”
노인의 몸뚱이가 쓰러져 내렸다. 한 줌의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노인의 몸뿐만이 아니었다. 노인의 몸이 사라지면서, 바리케이드처럼 쌓인 시체들도 무너져 내리며 재가 되었다. 투철한 신앙심을 지닌 영혼이 사명이라는 미련을 가진 채 겨우 제 육신과 장벽을 막을 몸뚱이를 유지한 채로 겨우 유지해 온 환영처럼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장벽 뒤에는 아르젤이 말한 새로운 희망이 보였다. 한때, 인간의 손에 닿던 구조물이 사라졌지만, 유선은 그곳에서 신성하다는 게 뭔지 느꼈다. 예배당에서 보이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 낸 신성한 빛에 작은 종,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성가로 만들어 낸 것과 차원이 달랐다.
성지는 어떤 형태로 있든 성지임을 보여 주는 듯했다.
돌 틈으로 밀려들어 오는 빛줄기. 그 빛줄기에 닿는, 물이 고인 자리는 작은 샘이 되었고, 그 위에 아치형으로 쌓아 올려놓은 구조물은 자라나는 이끼의 힘에 밀려 샘의 가운데에 바윗돌처럼 이끼가 낀 채로 떨어졌다.
그 뒤에 여신의 석상이 있었다. 그것이 가장 눈에 띄었다. 그것은 신성불가침.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유선은 그 석상을 보고 떠올렸다. 그 석상의 얼굴은 자신이 가져왔던 그 그림에 담긴 얼굴과 유사했다.
‘그게 페르아 여신의 얼굴이었나?’
미묘하게 다르지만, 그래도 절세미인을 조각해 놓은 건 변함없었다.
“여기도 많이 변했네요.”
아르젤이 그윽해진 눈으로 석상이 세워진 곳을 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르젤은 영체의 몸으로 조심스럽게 계단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고깔모자가 점점 바뀌더니 반투명한 면사포로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이질적으로 변해 가는 분위기 속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 기도에 응답하듯이 엘레노어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보던 엘레노어가 신기하다는 듯이 유선에게 말했다.
“유선 님, 몸에서 빛이 나······.”
“엘레노어? 괜찮아?”
“그리고 졸려······.”
“엘!”
엘레노어의 빛이 나면서 그녀가 스르르 눈을 감기 시작했다. 유선은 균형을 잃어 가는 엘레노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뭔가에 반응해 이끌리면서 그녀가 자신을 방어하는 것처럼 수면 상태에 빠졌다. 엘레노어의 몸에서 나오는 빛은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아르젤이 기도하는 샘으로 들어가더니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불어 아르젤의 몸에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로브를 이루던 명암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유선은 그제야 왜 그녀가 그림을 챙겨 나갈 때, 부끄러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익숙했던 그 성녀의 그림. 아르젤은 그 모습 그대로 나왔다. 다만 그림 속에 있는 절세미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상화를 위해 과장되게 그렸다는 게 분명했다.
“역시······ 그렇군요. 그 아이는 이곳을 벌써 나갔군요?”
아르젤은 미소 지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엘레노어를 안아 든 유선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당신은······.”
“앞서 소개했다시피 아르젤입니다. 다만······ 마법사가 아니라, 페르아 여신님을 모시는, 흔히들 말하는 ‘성녀’지요.”
그녀가 본래 자신을 소개했다. 성녀 그림에 부끄러워하던 것도, 보고의 위치를 아는 것도, 그리고 타락한 기사들을 잠재운 것도 모두 그녀가 성녀이기에 가능했다. 아르젤은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어차피 곧 들켰는데, 모험가님을 속이고 말았네요.”
아르젤은 눈길을 엘레노어에게로 옮겼다. 몸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것이 자신의 몸에도 반응했기에 이젠 그 본질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았다.
“그 아이는 역시 보통 아이가 아니군요.”
“네, 그렇죠.”
“기존의 흐름이 사라지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려고 이루어진 씨앗. 그것을 위해 이루어진 또 다른 희생······.”
아르젤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엘레노어를 보며 가엾다는 듯이 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은 찾으셨습니까?”
“네, 덕분에 찾고 대답을 얻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녀의 대답은 당연하다는 듯이 돌아왔다.
“어떻게 하다니! 당연히 돌아가야지요. 생명의 흐름을 끊고 성녀의 의무를 깬 것을 조금이라도 속죄하려면 조금이라도 빠르게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유선은 적잖게 슬픔을 느꼈다. 자신의 목숨을 잃고 이 세상을 떠나는데 슬프지 않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유선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당신과······ 함께 말인가요?”
아르젤이 놀란 듯이 유선에게 물었다.
“제가 당신을 귀속시키겠습니다. 떠나지 못하도록 묶어서, 그 아이를 찾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직 그 아이를 제대로 찾지 못하시지 않았습니까?”
순수한 유선의 의도를 본 아르젤이 미소 지었다. 자애로운 여신 같은 성녀의 미소였다.
“당신도 자상하시군요. 그 아이처럼 말이에요. 그랬기에 당신이 씨앗을 품을 자격이 이루어졌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유선이 내민 손을 잡아 주지는 않았다.
“인연은 파도와 같나니. 만남에는 언제나 이별이 따를 것이라.”
아르젤은 시의 한 문구에 나올 법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에게 확실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이별할 때입니다. 저는 이미 신이 주신 임무도 수행하지 못하고, 한낱 미련 때문에 순환의 흐름을 거역하고, 수정구 속에서 영혼을 담았던 몸이에요. 그 아이와 함께 강요받은 ‘희생’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지요.”
이대로 사라져야 한다는 마음. 그것을 설득할 길은 없어 보였다. 유선은 내민 손을 내려놓았다. 이 이상은 그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에 불과함을 알기에 그만두었다.
“이렇게 제가 이곳으로 오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험가님에게 드릴 것이 없어서 아쉽게 됐지만······.”
“괜찮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유선은 이해하기로 했다.
“본래는 발설하면 안 되지만, 그래도 정유선 모험가님에게 도움이 될 말을 해 드릴게요.”
“도움이 되는 말입니까?”
“언젠간 정유선 모험가님이 그 아이를 마주할 날이 올 거랍니다. 그때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아르젤은 완전히 몸을 돌렸다. 석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유선에게 말했다.
“새로운 희망을 위해······ 어쩌면 희생뿐일 수도 있는 또 다른 날을 위해······ 걸어가라고······.”
석상과 아르젤의 몸이 겹치자, 반응한 것처럼 섬광이 터져 나왔다. 유선은 눈을 질끈 감고 빛이 멎어 가길 기다렸다. 몇 초 후 빛은 완전히 사그라졌고 유선은 다시 눈을 떴다.
유선이 다시 눈을 뜨자, 아르젤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아르젤뿐만이 아니었다. 온전했던 석상마저 부서져 내리고, 신성했던 구역이 완전히 사라졌다.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선의 손에는 스태프가 그대로였다. 스태프의 효과도 아르젤이 말했던 것처럼 그대로였다. 다만 수정구에서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더는 없었다.
“유선 님.”
품에 안긴 엘레노어가 눈을 떠 유선의 얼굴을 만졌다.
“엘레노어, 괜찮아? 아픈 데는 없고?”
“응, 갠차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도 늘 그렇듯이 상쾌해 보였기에 한시름 놓았다.
“인연은 파도와 같나니. 만남에는 이별이 따를 것이다.”
유선은 무심코 아르젤이 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이 이 순간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젠간 그도 이별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기에······.
“무슨 말이야?”
“응? 아냐, 아냐. 그냥 중얼거렸어.”
엘레노어의 기습적인 물음에 유선은 얼른 얼버무려 버렸다. 유선은 그녀의 손을 잡아 주며 출구가 될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그 앞은 절벽이었지만, 엘레노어의 날개를 써서 다시 그 기분 나쁜 방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응!”
엘레노어는 날개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