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28. 화해의 장
일주일이란 시간. 그 끝에 유선은 눈을 떴다. 자신이 보는 것은 천장, 그리고 나무뿌리로 덮인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한순간 인류 멸망 후의 세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게 아닌가 하고 착각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오르넵토스가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아님을 알았다.
오르넵토스는 성인의 모습을 한 채로 잠을 잤다. 인간이 자는 것과 다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그저 눈만 감은 채였다. 그녀가 엘레노어에게 처음 소환되었을 때는 몰랐지만, 몸매의 굴곡이 그대로 보이니 어째서인지 야하게 느껴졌다.
너무 쳐다보자니, 유선은 자신이 민망해져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이 마법 때문인지, 몸에 피로감이 없었다. 깊은 잠에서 빠져나온 것이 숙면한 것처럼 개운했다.
‘오르넵토스는 여기에 있고······. 그러면······.’
그럼 엘레노어는 어디에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다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걸 알았다. 엘레노어는 유선의 배 위에 누웠다. 너무 익숙해져서 느낌이 안 났다.
곤히 자는 모습이 참으로 귀엽······다고 생각하다가, 유선은 픽하고 웃었다.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뜬 문구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는 척.
자는 것도 아니고 자는 척이라고 적혔다. 자세히 느껴 보니 평소에 잘 때 오르락내리락하던 배의 느낌이 없었다. 왜 자는 척할까? 유선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엘레노어 일어났니?”
“······.”
당연히 대답할 리 없었다. 자는 척하면 들을 리가 없었으니까.
“착한 아이는 대답할 텐데······ 자는 중이니?”
“······자는 중이야.”
착한 아이가 되고 싶어 마지못해 대답했다. 자는 중인데 이야기하다니, 유선은 엘레노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치 못 챈 척 계속 물었다.
“언제쯤 일어날까?”
“안 일어나.”
“영원히 이렇게 자?”
“응.”
“나랑?”
“응.”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끌어안기는 게 귀여우면서도 동시에 안쓰러웠다. 그 말은 지금 겪었던 일이 상당히 컸다는 의미였으니까.
“몹시 무서웠지?”
“······응.”
잡은 옷깃에 힘이 더욱 단단히 실렸다. 유선은 느꼈다. 그녀의 공포와 불안감이 교감 때 타고 흘렀다. 악몽을 꾸고 그 꿈에 혼동하여서 불안했던 그녀의 생각이. 눈앞에 단순히 사라진 것일 뿐인데도 그녀는 겁을 먹고 말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선이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일순간 흔들렸고, 효승은 그 틈을 노려 장난을 치고 말았다.
때때로 가장 잘 아는데도 망각하고 말았다. 그건 엘레노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유선은 상기시켜 주었다.
“나는 절대로 엘레노어의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야.”
“정말?”
“엘레노어가 내 얼굴이 보기 싫어진다 해도 찾아갈게.”
“정말로?”
“당연하지.”
두 번이나 확답해 주었는데도 그녀의 불안감에 젖은 표정이 버려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버려져 온 강아지처럼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엘레노어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거친 피부에 작은 손이 닿았다.
“그러니까 내 얼굴이 안 보여도, 울어선 안 돼. 알겠지?”
엘레노어가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거친 피부를 느끼고는 배시시 웃음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엘레노어의 호감도가 올라갔습니다.
-엘레노어의 적응도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엘레노어에 대한 상태 창이 이로운 쪽으로 모두 변화를 받았다. 유선은 이렇게 웃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랐다.
꼬르르르······.
조용한 가운데 들리는 요란한 소리. 고개를 떨어트려 보니 엘레노어의 배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유선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며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밥 먹으러 갈까?”
“응.”
그리고 늘 그랬듯이 질문을 던졌다.
“뭐 먹고 싶어?”
“나면.”
이 물음은 늘 무의미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일관성 있는 대답을 던졌다.
“유선 님이랑 같이 나면 먹고 싶어.”
“그래, 나랑 같이 먹는 라면 먹으러 가자.”
유선의 뱃속도 울었다. 만약 이대로 뭔가를 섭취하면 위에 쇼크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유선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엘레노어와 라면을 먹는다면 소원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
실컷 라면을 먹은 후, 엘레노어는 다시 잠들었다. 이번에는 얌전하게 유선의 옆자리에 잠들었다.
유선은 텔레비전을 켰다. 정각이어서 공중파 뉴스의 간단한 헤드라인이 소개되었다.
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뉴스들은 대부분 유니콘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회장, 분식 회계를 주도한 이사, 납품 비리를 일으킨 헌터 팀장······ 개중에는 진종오 과장에 관한 소식도 있었고, 윤정도에 관한 소식도 있었다.
‘윤정도가 살인이라······.’
인간 군상을 보면 어찌 됐든 한 번 정도는 사건을 터트릴 거로 여겼다. 하지만 그게 묻지 마 살인에 잔혹하게 벌어진 일이라는 걸 보니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가 윤정도도 결국 자신의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과부하가 일어나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름대로 안심하고 말았다.
괴롭히려 드는 놈이 사라졌으니, 엘레노어가 괴로워할 만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찝찝하지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앞으로 유니콘의 모든 비리를 드러내면서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나온 것을 보면, 유니콘 자체는 더는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으으음······.”
그렇게 텔레비전을 볼 때, 오르넵토스가 잠에서 깨어났는지 눈을 떴다. 부스스 눈을 뜬 채, 일어나 텔레비전을 보는 유선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계약자, 일어났어?”
“응, 한참 전에 일어났는데?”
“아, 그렇구나. 잠자느라 몰랐네.”
오르넵토스는 자도 자도 피곤한지, 한 번 더 하품하며 졸린 눈으로 꾸벅꾸벅했다.
“이렇게 주변 만들어 놓은 거 오르넵토스, 네가 했어?”
“응, 아무래도 계약자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대로 놔두면 좀 위험해 보여서 힘을 좀 썼지.”
-그래서 피로감이 좀 있기도 하고.
우쭐하면서 말한 것과 다르게 그녀는 상당히 애써 줬다는 게 보였다. 남은 마나를 끌어모아서 어떻게든 생명력이 넘치는 방을 만들려 했으니 무리도 아니라 생각했다. 유선은 미소 지어 보이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이 정도야 뭐. 계약자니까 해 줘야 하지 않겠어?”
콧대가 높은 그녀치고는 뭔가가 말끝이 흐려졌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르넵토스가 잠깐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계약자.”
오르넵토스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을 걸었다. 평소 모습답지 않아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 있어?”
“그게······, 할 말이 있는데······.”
할 말이 있다는 말에도 상당히 놀랐는데, 오르넵토스의 행동에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상당히 낯선 그녀의 행동에 유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이 나쁠까 봐 유선은 내색하지 않은 척 그녀에게 물었다.
“할 말이 뭐야?”
“······미안해.”
오르넵토스가 한 것은 사과였다. 유선은 그녀의 행동에 놀라며 물었다.
“갑자기 웬 사과?”
“여태 계약자가 무능하다고만 생각했어. 그저 에브······ 아니, 어차피 아니까 그냥 말해야지. 에브레라티오스에게 잘해 주고 그러니까 단순한 인간의 감언이설에 이끌리지 않나 생각했거든······. 거기다가 악마도 있어서, 계약자도 욕심 많은 인간 중 하나, 그런 인간이 가식을 떨지 않나 하고 의심을 많이 했어.”
“음, 그렇구나······.”
정령과 악마. 둘의 사이가 안 좋다고 언급했는데, 유선을 그만큼 불신했다. 오르넵토스가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섭섭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엘레노어를 위한 생각이었으니,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의심하다가······ 엘레노어를 진정시켜 주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어. 이 아이는 정말로 의미 없는 선택을 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 말이야.”
유선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편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가 뭘까? 그 의문을 품으며, 묻기 전에 유선은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만져 오르넵토스의 상태 창을 띄웠다.
이름: 오르넵토스.
계약 날짜: 2042년 10월 6일.
호감도: 10%.
스트레스: 21%.
적응도: 10%.
-엘레노어의 친구입니다.
-정령들의 왕으로서, 모든 정령을 부릴 줄 압니다.
호감도가 10% 올라갔다. 언제부터 올라갔을까? 아마 오르넵토스와 엘레노어가 교전할 당시에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어떤 계기를 통해서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튼 그것이 오르넵토스가 지금 이렇게 사과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령들이 자신의 주인을 인정할 때 솔직해지는 버릇이 있다는데 그런 건가?’
오르넵토스가 나오면서 정령에 대해서 조금은 알아보았다. 습관이나 그런 것을 꼼꼼하게 보진 않았지만, 언뜻 본 것을 떠올리면 그런 거로밖에 추측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품은 나를 용서해 줄래?”
오르넵토스의 물음과 동시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유선은 그녀의 사과에 대한 대답을 건넸다.
“용서할게. 네가 나쁜 애라서 그런 것도 아니니까. 이렇게 얘기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야.”
“용서해 주는 거야, 계약자?”
“용서한다는 것도 솔직히 웃긴 이야기야. 그러니까 평소처럼 엘레노어와 잘 지내 줘.”
“고마워, 계약자.”
유선의 이해심에 눈물짓는 듯 메인 목소리를 내었다. 예상은 했지만, 오르넵토스의 호감도가 올라갔다.
-오르넵토스의 호감도가 올라갔습니다.
오르넵토스의 호감도 올리기는 평생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의심이 풀리면서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유선은 엘레노어와 루데릭처럼 오르넵토스와 친밀도를 쌓으니, 의미 없는 행동은 없겠다 싶었다.
친밀도를 쌓는다는 말에 유선은 한 가지 걸렸지만, 보류해 둔 일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게 남았구나.”
“그거라니?”
오르넵토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유선은 오르넵토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사과해야 할 대상이 아직 한 명이 남았지?”
***
불편한 공기가 돌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 불편한 공기의 중심은 휴게실에서 시작되었다.
“······.”
“······으으······.”
테이블을 경계로 서로 마주 보는 오르넵토스와 루데릭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르넵토스는 수치심에 일어난 감정이 강했고, 루데릭은 혐오감이 강했다. 안 좋은 쪽이라면 루데릭이 가장 심할 것이다. 만나자마자 공격하고, 죽이려 들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주인의 티도 불타 버렸고.
그리고 조금 핀트가 어긋난 부분에서도 화가 났다. 유선은 어차피 버릴 것이나 다름없는데 왜 그리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르넵토스의 머릿속에는 ‘괜히 사과했어.’ 하며 후회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 후회해도 늦었다. 오르넵토스가 입을 떼지 못하는 것 같아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오르넵토스.”
“으으, 응?”
“할 말이 있잖아. 얼른 해야지.”
“으으······.”
오르넵토스는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더니, 루데릭을 슬쩍 보았다. 도끼눈을 뜨는 것을 보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미, 미······ 요.”
“그래선 안 들린다, 정령 계집. 그리고 말할 때는 적어도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해라.”
루데릭이 날을 세운 어투로 지적하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었지만, 화낼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애써 자신의 성격을 억누르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경솔하게 공격해서 그만 누를 끼치고 말았습니다.”
“······.”
루데릭은 그녀가 사과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만큼 정중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해 조금 놀라고 말았다.
오르넵토스가 고개를 숙여 가며 사과를 건넸지만, 루데릭은 그것에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루데릭.”
유선은 이번에 루데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유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녀석의 사과를 받아 줘야 하나?”
-나를 죽이려 했는데?
루데릭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용서가 안 되는 짓이었다. 유선도 그건 공감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들의 대립을 놔두기만 할 수는 없었다.
쓸데없이 엘레노어나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 일도 있을 것 같았기에, 어떻게든 조금은 화해해서 그런 일은 막아야만 했다. 그래서 유선은 이 자리를 주선해서 그들을 화해시키려 했다.
“죽이려 들었다고 했으니······ 네가 용서 못 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가족으로 지내면서 서로 봐야 할 텐데, 이렇게 교착 상태로만 있고 싶지는 않잖아. 안 그래?”
-솔직히 그렇게 있어도······.
-상관없는데······.
두 명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거짓말처럼 맞아떨어졌다. 똑같은 생각을 하니 유선은 갑자기 괜한 행동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엘레노어가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칭구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해.”
엘레노어는 순진무구하게 루데릭과 오르넵토스의 손을 잡고 서로 이어 주었다.
“자, 악수!”
양손이 닿으면서 강제로 악수를 시켰다. 막무가내 같은 그녀의 행동에 루데릭은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악수하면서 이상하게 고착될 거로 믿은 감정이 조금 풀리는 걸 느꼈다.
오르넵토스가 직접 사과한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정령왕이 고개를 숙인 것만으로도 오르넵토스에게는 큰 굴욕일 테니까 말이다.
루데릭은 한숨지었다. 어쩔 수 없이 오르넵토스가 한 행동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