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26. 형님의 복수는 아우가 (2)
문이 열렸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차기율. 큐앤 그룹 회장의 아들이자, 지금은 큐앤 헌터 컴퍼니의 대표 이사. 하얀 정장을 입고 다니며, 장난스럽고 익살스러운 분위기에, 설상가상으로 공부도 못 해 가문의 수치라고 불리는 방탕아가 지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연륜이 묻어나오는 그의 눈에는 절대로 그 방탕아의 명성이 보이지 않았다. 저 남자가 모든 일의 주범. 그렇게 얘기함과 동시에 부정했다. 하지만 그 대립이 무의미하다는 듯이 기율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평소의 그 별명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강했다.
“차기율 도련님이로군요. 아니, 이젠 사장인가요?”
“네, 아무래도 명함에는 대표 이사라고 명시되었으니 사장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요.”
여유로운 미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감정이 대체 무엇일까? 묻고 싶지만, 회장은 차분하게 나왔다.
“그 잘난 큐앤에서 무슨 일로 별 볼 일 없는 노인을 찾아왔나요?”
“별 볼 일이 없긴요. 누가 회장님을 쓸모없는 사람 취급하더라도 제게는 아주 볼일이 많으신 분입니다.”
기율은 진심으로 말했다. 회장은 그 꺼림칙한 진심에 얼굴을 구겼다. 기율은 자리에 앉으면서 회장에게 말했다.
“피차 바쁜 몸인 듯하니,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 빨리 끝내지요. 이효승 헌터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왔습니다.”
이효승. 그 이름을 언급만 했는데도 확신했다. 이 모든 것이 차기율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효승의 만행과 유니콘을 엮어서 깎아내리는 모든 것이 저 남자의 작품이었다.
회장은 손이 부들부들하고 떨려 왔다. 이렇게 새파란 놈한테 지금 유니콘 전체가 흔들린다는 말인가!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하급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회장은 애써 자신의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자신이 유리할 때를 노리며 잡아뗐다.
“남의 회사 사람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건 좋지만, 그걸 회장인 나한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요즘 매스컴 신나게 타는 인물 아닙니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음주 운전, 기물 파손, 헌터들이 특히 저질러서는 안 되는 상해 폭행, 그리고 인륜적으로 어긋난 강간마저 말입니다. 회장님은 여태 그런 인간이 회사의 기둥을 맡는다고 여겨서 궁금했습니다.”
약점을 단숨에 파고드는 기율. 그런데도 흔들림 없이 그에게 정중하게 경고했다.
“지금 말이 좀 험하시군요. 이효승 헌터는 제 역할에 충실했던 헌터입니다. 그분을 근거 없는 모략으로 깎아내리려 들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루데릭이 알려 준 대로 기율은 이번에는 일직선으로 파고들었다.
“근거 없는 모략이라······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것 같군요, 회장님.”
“무슨 말입니까?”
“우리 회사 소속 헌터인 정유선 헌터님을 살해하려던 사건, 그것에 연루된 사람을 모두 압니다. 그만 잡아떼시지요.”
그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으려 몰아붙였다.
“단순히 이효승 헌터에 유니콘 내부 사람뿐만이 아니라, 헌터 아카데미의 강사 중 하나가 주식으로 막대한 빚을 졌다는 사실, 그리고 익스플로러 한 명에게 2년간 독점 거래하는 대가로 장비를 일부러 꺼트려 누군가가 침입한 사실을 증거로 남기지 않으려 했다는 건 이미 확보한 상태입니다.”
“······.”
“지금 그 두 명을 잡아들여서 진실을 요구하는 중이지요. 그 과정에서 우리 회사의 전문가님들이 함께해 주시니, 계속 구슬리다 보면 언젠간 입을 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바탕으로 추적해 천천히 파고들어 갈 것이고요. 누가 꼬드겼는가, 누가 실행했는가, 누가 ‘최종적으로 승인’해 주었는가······ 말입니다.”
마지막은 특히 억양을 강하게 해서 회장이라는 사실을 이미 안다는 듯이 말했다. 회장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파헤치다 보면 분명히 일은 도미노처럼 넘어질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어딘가의 기둥을 건드리겠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건물의 기둥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기둥마저 도미노처럼 넘어지면······.”
기율은 계속해서 회장의 심리를 자극했다. 하지만 고작 그런 말에 넘어가 흔들리면 유니콘이 지금 위치까지 올라가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쾌한 것은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전에 얼른 내쫓아야만 했다.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셔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회장은 셔츠 주머니에 넣어 둔 손수건을 꺼내는 듯 자연스럽게 손을 넣었다. 단순히 손수건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언제든지 대기하는 헌터들을 부르도록 하는 휴대용 스위치가 있었다.
“밖에 대기하는 헌터들을 불러서 어떻게든 하려고 한다면 꿈에서 깨는 게 좋을 겁니다.”
몰래 스위치를 만지려던 회장은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순간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스위치를 눌렀다.
“무슨 말인가요? 손수건을 꺼내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꾸욱 들어가야 할 스위치가 단단하게 뭔가 막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막아 놓은 것처럼.
“회장이란 직책은 말대로 잡아떼는 거로 먹고사는 모양이군, 그래.”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그 어떤 기척도 없이 불쑥 나온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언제부터······.”
소년은 대꾸하지 않고 그가 쥔 스위치를 작은 손으로 낚아채 갔다. 그리고 귀신처럼 기율의 옆으로 이동하면서 스위치를 넘겨주었다. 그 스위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정식으로 소개했다.
“인사하십시오, 회장님. 우리 회사의 정유선 헌터님이 테이밍한 ‘발록’입니다. 헌터님께서는 ‘루데릭’이란 애칭을 지어 주셨죠.”
“바, 발록······!”
회장은 경악하고 말았다. 소리 없이 뒤에서 온 것부터 예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았지만, 설마 그것이 발록일 줄은 몰랐다. 소년의 모습을 한 것이 SS급 몬스터! 코드 헌터 상황의 주범이며, 지금 대기한 헌터들을 부른다 해도 절대로 잡지 못하는 몬스터였다.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가 지금 정유선이 아닌 차기율의 옆에 있었다. 사역수가 테이머의 곁을 벗어나면 어느 정도 제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텐데, 그런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SS급 몬스터의 머리에 태연하게 손을 얹을 정도니깐 말이다.
“현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제가 이끌죠.”
“······.”
차기율, 혼자만이라면 어떻게든 헌터들을 불러서 끌고 갈 생각을 하겠지만, 발록이라면 또 다르다. 무력으로 어떻게든 진압하기도 이젠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원하는 게 뭔가?”
회장의 표정엔 더는 여유가 없어 보였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뭔가? 우리가 사과하길 원하나? 사과하길 원한다면, 내가 직접 가서 사과하겠네. 위로금이라면 주고. 이효승의 잘못을 덮어 주려는 놈이 있다면, 일을 벌인 놈들이 있다면 깡그리 다 잡아 주지. 자, 원하는 게 뭔가? 말만 하게.”
뭐든지 내놓겠다는 듯이 절박함이 보였다. 기율은 그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하며 천천히 그에게 뭔가를 읊기 시작했다.
“그저께 터진 것은 시내에 풀려난 몬스터와 이효승 헌터에 관한 이야기.”
발단된 사건.
“오늘 터진 것은 이효승 헌터와 유니콘에 관한 이야기.”
오늘 터진 사건.
“그리고 내일은 유니콘이 어떤 범죄에 협조했다는 이야기, 그다음 날은 하나의 대형 사건과 함께 유니콘의 모든 비리를 터트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시나리오를 모조리 읊었다. 그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생각에 가만히 듣던 회장이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기율을 보았다.
“제가 원하는 것 말입니까?”
기율은 단호해진 목소리로 위엄 있게 말했다.
“적폐 청산입니다.”
애초에 그가 유니콘으로 들어온 이유는 단순히 합의를 바라거나, 이효승에 관한 진실을 까발리라고 협박하러 온 게 아니었다. 철저히 부수겠다는 의지를 그대로 보여 주려고 당당하게 걸어왔다.
“시간 지나면 잊힐 사과 따위를 받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저는 회장님이 선택하신 그 길에 우리가 당당하게 맞서겠다고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선을 확실히 긋는 기율의 말에 회장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하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기율은 자신의 의사를 모두 밝혀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돌리며 나가려는 사내를 보며 회장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 늙은이를······ 찾아왔단 말인가?”
기율은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로 발걸음을 멈췄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미소 지어 보였다.
“우리 회장님, 심장이 안 좋으시니, 만수무강하시라고 제가 미리 경고하러 온 것뿐입니다. 혹여나 법정에 출두할 때, 심장 마비로 미출석하시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안 되니까 말입니다.”
기율이 준비한 것은 단순히 유니콘의 몰락뿐만이 아니었다. 이효승의 계획을 듣고 동참한 모든 이를 법의 심판대에 올릴 준비를 했다. 건수만 제대로 잡는다면, 승인해 준 최종 결정권자인 회장도 살인 방조죄로 입건하도록 준비하는 중이었다. 한 번 시작되면 지금 여론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징역살이는 피할 수 없었다.
기율은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이 문을 열며 말했다.
“더는 마음 쓰지 말고 구경하십시오. 쌓아 올린 제국의 탑이 허물어지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말 그대로였다. 회장은 몰락의 길을 걷는 회사를 다시 살리려고, 꼬리를 자르고 매수하고 다시 별짓을 다 해 보았다. 이틀 동안 남겨 놓았던 비장의 수까지 사용해 봤지만,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진퇴양난이며, 사면초가였다.
회장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헌터들이 있는 한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리라 여겼던 유니콘은 완전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 소리. 들어오지 않는 전기. 개판이 된 집안. 고급스러운 아파트의 내부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싼 가구들은 바리케이드를 쳐서 모조리 출입구를 막았고, 도자기와 물건들은 모조리 바닥에 깨진 채로 널브러졌다. 흡사 좀비 아포칼립스의 한 장면 같았다.
그 중심에는 윤정도가 있었다. 몰락의 길을 걷던 한편, 윤정도는 공포에 질린 채로 이빨을 딱딱거리며 구석에 숨었다. 마치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숨어야 해. 숨어야 해. 숨어야 해.”
그리고 미친 듯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그 드래곤의 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압도적인 살기. 그것이 몸을 파고들었다.
윤정도는 나름대로 준비하고 갔다. 엘레노어의 살기를 한 번 경험했기에, 분명히 조금만 긴장하면 견뎌 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제대로인 살기와 포효성. 그 모든 것이 정도를 놓게 했다. 드레이크가 효승의 컨트롤을 완전히 벗어나, 효승을 잡아먹은 후로는 그 패닉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으그그극······.”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곳에서 도망쳐 온 이후로는 잠도 자지 못했고, 누군가가 계속 들이닥치는 악몽을 꾸었다. 정도는 그렇게 가구로 자신의 집을 출입하려는 모든 사람을 막았다.
하지만 그것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협할 만한 물건들은 모조리 바깥으로 버렸다. 식칼도, 무기도, 방어 구도······.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집이 황량해졌는데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 눈.
어딘가에 있을 그 눈.
그 눈이 자신을 바라보기에!
-왜 그리 겁에 질렸어?
“누, 누구야?”
정도는 갑작스레 들리는 어린 목소리에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목소리를 건넨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진정해. 너를 헤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진정을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마! 네놈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정도는 부드러운 미지의 목소리에 발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미지의 목소리는 그런 정도를 가엾게 여겼다.
-느껴져. 그 고통······ 정말 힘들게 살았구나.
“하아, 하아, 하아······.”
목소리가 정도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정도는 그 포근한 목소리에 미쳐 가다 조금씩 진정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화, 화가 나기는. 당연히 그 자식 때문이지······.”
정도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 자식?
정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지의 목소리가 그에게 살며시 다가가듯 물었다.
-그 자식의 이름을 불러 줘. 너를 이렇게 만든 그 자식의 이름을······.
그 이름을 상기했다. 그러자 미지의 목소리에 홀린 정도가 공포에서 분노로 차츰 변해 갔다.
“저, 정유선······.”
재수 없는 놈. 가난한 주제에 착한 척하고 다니질 않나, 좋은 선배처럼 굴질 않나.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인간이었다.
-그 녀석이 싫어?
“싫어. 죽이고 싶을 만큼······.”
그 드래곤이나 정유선이나 그의 눈에는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를 어루만져 주는 목소리는 정도의 귀에 대며 녹아내릴 듯이 속삭였다.
-그러면 복수하자.
“복······수?”
그 목소리는 꿀을 발라 놓은 사탕처럼 끈적하고 달콤하게 유혹해 왔다.
-응, 복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