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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용서 (5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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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용서

유선, 그가 크리스털 리저드와 정령들의 도움으로 겨우 동굴 속에서 빠져나와, 오르넵토스를 받은 채로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저것이 엘레노어······.’

조그마한 소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원이 다른 덩치와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유선은 생각처럼 놀라지 않았다. 드래곤.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던전에 들어갔을 때, 그녀가 쏘았던 살기. 그 속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서 흡사 도마뱀 같은 파충류의 눈을 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살기를 뿜었을 때 보았던 것과 잠깐 비교하자면, 지금은 한층 더 강했다. 위가 뒤틀리는 감각이 있어야겠지만, 이미 한 번 경험해 봤기 때문에 그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분노.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제대로 보이지 않다는 게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분노가 너무나도 큰 탓에 이성이 마비되었단 소리였다. 유선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녀의 분노는 더욱더 커졌다.

“오르넵토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일단 에브레라티오스의 마나가 완전히 고갈했으니까,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된다고 봐야지.”

“에브레라티오스? 그게 엘레노어의 본명이야?”

“이런······.”

오르넵토스는 혼란스러운 나머지, 무심코 엘레노어의 본명을 누출하고 말았다. 하지만 본명이든 뭐든 유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르넵토스는 그 실수를 넘어가며 지금 문제에 대해 말했다.

“이제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 이성이 돌아올 때까지 말이야.”

손을 놓기만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유선은 그걸 최선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녀에게 물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싶겠지만, 너무 위험해. 계약자의 힘으로는 부족해.”

-그래, 주인. 우선은 주인의 안전을 확보해야만 한다.

둘은 현 상황에 할 것 중 똑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그건 유선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왕인 오르넵토스에게도 부족한데, 자신이 절대로 물리적으로는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가 마음에 걸렸다. 그 분노가 어떤 것을 향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엘레노어······.”

유선은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멀리 떨어진 드래곤이 그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했다.

-크롸아아!

드래곤이 화가 났는지 유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실피드!”

유선을 호위하던 하급 바람의 정령이 오르넵토스의 몸에 깃들었다. 그녀의 다리에 바람이 감기자, 오르넵토스는 유선의 품에서 내려왔다.

“도망쳐야 해, 계약자. 그 아이는 놔두고 일단 목숨부터 부지하자고. 팔을 목에 감아.”

바람에 감긴 오르넵토스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일대가 날아가면서 황량해진 숲에 이계의 틈으로 돌진했다.

-크롸아아아!

하지만 드래곤은 그렇게 둘 수 없다는 듯이 소리 지르며 틈 앞을 가로막았다. 하급 정령의 힘을 받아 빨랐지만, 그래도 드래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드래곤은 앞발을 드는 폼이 무작정 다가오면 그대로 쳐 버리겠다는 듯 경고를 보냈다.

“이런!”

오르넵토스는 바로 몸을 꺾어 그 공격을 피해 냈다. 다시 드래곤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면 다시 오르넵토스를 잡으려고 돌진해 왔다. 그런 추격전이 계속되었다.

오르넵토스는 틈에서 멀어지도록 유도해 보지만, 드래곤은 순순히 그 의도에 따라주지 않았다. 틈 따위는 없었다. 돌진해 오는 것들을 몸을 비틀면서 겨우겨우 피하는 것이 한계였다.

-크롸아아아!

그럴 때마다 드래곤이 소리를 질렀다. 유선은 자신의 향한 분노, 그 포효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경 쓰였다.

단순한 포효성이 아님을 알았다. 그것은 유선을 향한 분노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부분이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두루뭉술한 그림이 그려진 퍼즐 속 빠진 기억 조각을 건드렸다. 유선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드래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노로 꽉 찬 머릿속. 그녀의 머릿속에 흐릿하게 뭔가가 떠올랐다.

‘거짓말’

-크롸아아아아!

“아······.”

그제야 알았다.

유선은 그제야 머릿속에서 마치 억압되어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것을 찾아냈다. 알코올에 젖어 보이지 않았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중심부에 맞춰지자, 모든 밑그림이 그려지며 두루뭉술해진 그림의 형태에 이어서 그림을 맞췄다. 그리고 유선은 깨달았다.

지금 상황은 자신이 분명히 해결한다는 것을.

엘레노어를 사로잡는 악몽을 벗어나게 한다는 사실을.

멍한 표정으로 드래곤을 향해 시선을 두며 급하게 피하는 오르넵토스에게 말했다.

“오르넵토스.”

“왜?”

“내려 줘.”

“뭐라고······?”

오르넵토스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반응했다. 하지만 유선은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지금 내려 줘.”

“제정신이야?”

“온전해. 지금 내 정신은. 그러니까 내려 줘.”

유선은 확고하게 대답했다. 그 진지한 목소리에 오르넵토스는 군말하지 않고, 거리가 벌려진 때 말대로 유선을 내려 주었다. 오르넵토스의 등에서 내린 것을 안 루데릭이 귓가에서 시끄럽게 목소리를 울렸다.

-무슨 짓이냐, 주인!

“무슨 짓이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야.”

엘레노어를 막는 것, 지금 당장 폭주하는 그녀를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데릭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주인. 그 아이가 아무리 주인을 사랑하더라도 지금은 주인을 죽이려 들 것이다. 그 아이의 분노는 주인이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크다.

“그럴 수도 있지.”

EX급 몬스터. 애초에 유선에게는 무리였다. 분수에 맞지 않았다. F 등급 테이머답게 원래는 크리스털 리저드나 다루고 지내야 할 것이다. 스펙 격차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감당할 수 없다고 피하는 건 안 돼.”

그러나 그가 맞춘 퍼즐 그림은 지금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무서워서 이 자리를 그대로 나온다면, 그것이 그녀의 새로운 상처. 그리고 더는 용서받지 못하는 오해가 되어 버리기에······.

“그 아이는 내 아이야. 내가 약속한 이상, 내가 끝까지 지켜야만 해.”

유선은 홀로 당당히 엘레노어를 향해 걸어갔다. 그 어떤 예비책도 없이, 엘레노어를 향해 걸어갔다.

-주인······.

루데릭은 마음 같아선 뜯어말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유선의 확고한 의사에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맹돌격하며 오르넵토스를 추적하던 드래곤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자리에서 유선이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크르르르르······.

드래곤은 자신의 이빨을 드러냈다. 유선은 그녀의 머리 위에 뜬 글자들이 보였다.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곧 공격하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드래곤은 유선을 공격하려 달려들었다. 오르넵토스를 노리는 것처럼 맹렬한 속도로 달려와 주둥이를 벌렸다.

유선은 보호막도, 피할 신체적인 조건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죽을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유선이 한 것은.

“엘레노어!”

목청이 터지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던 드래곤이 반응했다.

유선을 향해 날아들던 그녀의 몸이 비틀렸다. 유선을 스쳐 지나갔다. 저공비행하던 드래곤은 그대로 바닥에 쓸려 내동댕이쳐졌다.

쿵, 쿵······.

-크르르르······.

드래곤의 피부가 유선의 살결에 닿자, 유선은 그녀와 했던 약속을 명확하게 느꼈다. 유선은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100m가량 떨어져 나간 드래곤이 다시 일어나 유선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외로움이 가슴을 찔러 왔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엘레노어는 유선이 배신했다고 믿었다. 약해진 그녀의 마음의 틈을 파고들어 가, 그녀를 갉아먹었다. 그 주범은 이효승이며, 그녀가 약해진 엘레노어의 마음을 세뇌한 것도 알았다.

“약속을 어겨서 정말 미안해.”

유선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 상황에 놓이게 한 것도 그녀에게는 자신이 약속을 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과를 들은 드래곤이 포효성을 내질렀다.

아니 포효성이 아닌 원망이 담긴 목소리였다.

-크롸아아아!

거짓말쟁이!

-크롸아아아!

나쁜 거짓말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효승이 심은 악몽에 잠긴 드래곤은 계속해서 유선을 향해 원망하는 소리를 질렀다. 유선은 그녀에게 말했다.

“맞아. 난 나쁜 놈이야. 엘레노어랑 했던 약속을 어기고 말았으니까. 널 외롭게 둬선 안 됐는데 말이야.”

유선은 천천히 엘레노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분노는 내가 모두 받아들일게. 분노뿐만이 아니라 슬픔도, 모두 안아 줄게. 나로 끝낼 수 있다면, 내가 끝내도록 할게.”

목숨조차 선뜻 내놓겠다는 의사였다. 유선은 진심이었다. 그걸 느낀 루데릭이 한 번 더 소리쳤다.

-무슨 소리냐, 주인! 이 자리에서 주인이 죽겠다고 하면 어찌 될 거로 생각하느냐!

유선은 루데릭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엘레노어에게 다가가며 말할 뿐이었다. 분노로 휩싸인 드래곤이 다가오는 유선을 보며 경악했다.

-크르르!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크르으으!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경고는 계속되었다. 유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크롸아아아!

드래곤은 앞발을 들어 유선을 향해 내리찍었다.

쿠웅!

“계약자!”

앞발이 덮친 일대가 모래 먼지로 뒤덮였다. 그만한 공격이었다면 분명히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하지만 오르넵토스는 느껴졌다. 유선이 아직 살아 있음을 말이다.

먼지가 걷히고 그녀의 커다란 발톱 사이에 유선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드래곤은 유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 충격으로 가까스로 폭주하는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이 결코 좋게만 이루어지진 않았다.

드래곤이 땅을 치면서 돌무더기가 날아와 유선의 허리를 찔러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탓에 그의 옷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크르······ 크르······.

피를 본 드래곤은 그것을 보고 뒷걸음질 쳤다. 유선에게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는 것에 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분노는 다른 문자들로 일그러졌다.

-후회.

-공포.

상처를 주고 말았다는 후회. 자신의 손에 의해 유선을 잃을 뻔했다는 공포. 그리고 자신을 미워할 것이라는······.

“엘레노어!”

절망에 빠지려던 드래곤, 아니 소녀를 심연처럼 다가오는 악몽에서 깨웠다. 그 작은 두 눈이 유선의 얼굴을 보았다.

“괜찮아.”

유선은 미소 지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늘 짓던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유선은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뒷걸음질 치던 드래곤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조심스레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느꼈다.

그녀의 생각, 행동, 상태, 모든 것을 전해 듣고, 모든 것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녀의 오해를 풀어냈다. 꼬였던 생각들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그녀를 만들었다.

다시금 이루어지는 교감에 유선의 손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녀가 있었던 자리에, 다시 그녀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원래 착한 아이로 돌아와 줘.”

유선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선 안아 주려야 안아 줄 수가 없어.”

그의 말에 드래곤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하얀 증기가 터져 나왔다. 그 증기가 드래곤의 전신을 가렸다. 유선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하얀 연기가 걷히길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커다란 드래곤은 사라지고 다시 작은 소녀의 형상이 드러났다. 엘레노어.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숙인 채, 유선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의심했다. 자신이 저질렀던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유선이 떠나가는 장면, 했던 심한 말들, 자신을 한낱 요물로만 보았던 그 말들. 분노 때문에 잃은 것들, 그리고 상처를 입힌 것들······.

하지만 유선은 여전히 미소 지었다. 유선은 그 어떤 의심도 하지 않도록 미소 지었다. 단순히 악몽이었던 것처럼 괴로워하지 않게. 지금은 그저 쉬도록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엘레노어는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각에 울컥하고 말았다. 축축해져 가는 눈가의 습기, 차마 터트리지 못하며 삼키는 목.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의심을 했는지 자각했다. 그 무거운 감정을 그걸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유선은 그걸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양손을 벌려 넓은 가슴을 보였다.

비틀걸음을 걷던 소녀는 힘차게 달려갔다. 양손을 벌리고 닭똥 같은 눈물을 남기며.

소녀는 남자를 끌어안았다.

“흐으······.”

따뜻하다. 자신이 바라던 온기가 남아서 끈적거리는 악몽의 의심마저 불태웠다.

“흐아아아앙!”

그리고 소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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