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24. 폭주 (2)
쿠우웅!
한 번 더 크게 울렸다. 천장에 후드득거리며 파편이 떨어졌다.
“끄으으으······.”
유선은 처음에 울린 진동에 큰 파편들이 떨어지면서 잠깐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유선이 있는 쪽은 파편이 떨어지지 않아 머리에 부상은 없었다.
‘엘레노어······.’
이 진동들은 그녀가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평소보다 불안정했던 만큼 지금 자신을 주체 못 하는 상황이었다. 유선은 제대로 된 사고도 못 하는 지금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계약의 인장>을 만져 보았다.
“뭐지?”
상태 창이 뜨지 않았다. 오른손에 있었던 그녀와 자신을 잇던 인장이 사라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누군가가 엘레노어를 건드렸고, 엘레노어는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것이 유선 자신에게도 향하는 분노였다.
빠득.
유선은 비틀걸음을 걸으며 다시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야, 이······.”
유선은 따지려고 그를 일으켜 세워 보았지만, 그는 축 늘어진 채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머리가 깨졌다. 떨어진 파편을 맞아 그대로 죽었다.
“이런······.”
기절한 것이 아닐까 했지만, 맥도 제대로 뛰지 않았다. 바로 즉사한 것 같았다. 유선은 의미 없는 짓임을 알고 그를 놓아주었다.
-주인.
‘루데릭?’
불안한 상황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반갑게 울려 왔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무사한 것 같군. 어디에 있나?
‘분명히 좌표는 남았을 거야. 산 밑에 있는 동굴인데······. 지금은 무너져서 입구가 없어.’
-무너져? 거기에 지금 갇혔단 말이냐?
‘응.’
루데릭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한숨짓는 게 들려왔다.
-얼른 그 정령 계집이 주인을 알아차려야 할 텐데······. 곧 무너지려고 하는가?
‘아냐, 이 정도는······!’
주변이 울림과 동시에, 한 번 더 파편이 후드득후드득하고 떨어졌다. 이곳으로 누가 직격으로 몸을 날린다면 꼼짝없이 죽을지도 몰랐다.
-주인?
‘괜찮······지 않을 것 같아. 밀폐된 장소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데다 곧 무너지려고 작정해서 말이야.’
시간문제였다. 유선은 계속 여기에서 구조만 기다릴 순 없었다.
-그럼 바깥 상황은 완전히 모른다는 거로군.
‘그래, 몰라. 지금 엘레노어가 화났다는······ 것밖에 말이야.’
말하는 도중에도 동굴이 크게 한 번 울렸다. 그의 상황을 안 루데릭이 더욱 진지해진 어조로 유선에게 말했다.
-주인, 지금부터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할 것이다.
‘뭘?’
진지해진 루데릭을 따라 유선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언젠간 자네도 알 거라고 했지 않았더냐.
‘엘레노어의 정체 말이지?’
유선은 기억했다. 엘레노어의 정체를 알 것 같아서 물어봤다가 그가 대답을 피해서 보류한 물음인 거로 기억했다.
-그것이 오늘일 것이다.
유선은 그의 말에 몸이 굳었다. 궁금했지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모습. 루데릭과 오르넵토스, 두 명이 숨겨 온 그녀의 본모습을 볼 날이란 것이었다.
항상 궁금해 왔지만, 그녀의 본모습을 마주한다고 하니 순간 자신이 들지 않았다. 본모습을 보이는 그녀와 당당하게 얼굴을 마주한다면 나는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렇게 분노하는데 나는 과연 살까? 정말 루데릭의 말처럼 그녀를 예전처럼 바라볼 수는 있을까······.
-주인이 죽었어. 이제 해방이야!
그런 물음을 던지던 사이, 계약의 인장과 지배의 낙인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크리스털 리저드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집에 갈래. 이제 집에 가서 살 거야!
파바바바박!
크리스털 리저드의 특기인 땅파기를 시작했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단숨에 파고들어 갔다. 유선은 이 틈을 빠져나갈 좋은 기회임을 떠올렸다. 놓치기 전에 얼른 리저드의 꼬리를 잡았다.
-으악! 누, 누구야?
꼬리마저 바닥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유선은 크리스털 리저드를 뽑아 올려 그것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을 대면한 리저드는 인간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바동바동하기 시작했다.
-이것 놔줘! 이제 나 평범하게 살 거란 말이야!
“미안하지만, 네가 지금 도망치게 둘 수 없어.”
-나 이제 그 누구에게도 안 묶인 몸이야. 자유라고! 그러니깐 놔줘!
꼬리를 바동바동 흔들어서 떨어트리려는 생각이었다. 유선은 꼬리에서 바로 몸통으로 손을 옮겨 몸을 꽉 잡았다. 그리고 리자드에게 말했다.
“나를 도와줘.”
-시, 싫어······! 괴물들은 이제 더는 싫어!
리저드가 겁에 질린 채로 거부했다.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유선은 너무나도 절박한 상황이었다.
“부탁이야.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아. 지금 그 사람한테 가야만 해.”
크리스털 리저드가 바동바동하는 것을 멈추며,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유선의 <교감>과 <공감>이 리저드에게 작용했다.
“많이 고통받은 네가 인간을 미워하는 것도 당연해. 지금 나는 너한테 몹쓸 부탁을 하는 것도 맞아. 그래서 미안해. 네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몰아붙여서.”
-······.
“하지만 난 지금 가야만 해. 이렇게 염치없이 부탁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야. 제발 부탁할게. 이곳에서 벗어나게만 도와줘.”
유선의 말에 리저드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온순한 성격인 만큼, 정도 많았기에 그가 전하는 공감이 충분히 닿았다.
-그, 그러면 그 녀석처럼 나도 행복하게 살게 해 줄 거야?
그 녀석이라고 해서 떠오르는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한 명이었다. 진연이 데리고 다니는 리저만 생각났다.
“여자 괴물이 데리고 다니는 동족 말하지?”
-응.
실습 시간을 제외하면, 그들이 사는 곳은 똑같은 철창 우리이다. 주인이 간 사이에, 분명히 진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연이 데리고 다니던 삶을 동경하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무사히 밖으로 나가게 해 준다면, 그런 것들도 부럽지 않게 살도록 해 줄게. 어때?”
-조, 좋아! 그래도 우리 형제들을 아프게 하진 않았으니까. 분명히 약속을 들어주겠지!
리저드의 머리에서 계약의 인장이 발동했다. 진연처럼 오래 걸리지 않고, 크리스털 리저드와 계약하는 데 성공했다.
“부탁할게.”
-응.
크리스털 리저드의 특기. 땅파기가 빛을 볼 차례였다.
***
한편,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는 격전이 벌어졌다. 소환된 정령들이 용감하게 엘레노어를 향해 돌격했다.
쿠웅!
하지만 대부분은 짓눌리거나, 꼬리치기의 육중한 데미지에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잡졸로 인한 인해전술이 아닌, 전략이 있는 판단인데도 드래곤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산이여! 지금이야!”
-우으으으······.
잡 정령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산 거인이 움직이더니 드래곤을 향해 그대로 엎어졌다. 거대한 덩치를 이용해 그대로 찍어 누르려 했다. 드래곤의 몸에 둘린 보호 마법에 둥근 형태로 몸이 붕 떴다. 오르넵토스는 그녀가 보호막을 펼치리라 예상해, 곁에 둔 바람의 정령에게 마법을 걸었다.
“바람처럼, <로그라티네>!”
칼날로 무장한 바람의 정령, 실프가 마법이 걸림과 동시에 이용해 보호막으로 돌격했다. 정령왕의 마법이 깃든 돌격은 빛처럼 빠르게 보호막을 향해 날아갔다.
파카앙!
산의 거인을 막던 보호막이 맹돌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보호막이 뚫리고 말았다. 구멍이 생긴 보호막이 균열이 일어나며, 산 거인의 몸뚱이도 이젠 막지 못했다.
쿠웅!
-크롸아아!
산 거인의 육중한 무게에 방심하던 드래곤이 쓰러졌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써 보려 하지만, 곧이어 다른 산 거인이 그 무게를 더해 완전히 깔아뭉개려 들었다. 머리만 내민 채로 꼼짝하지 못한 드래곤을 보며, 오르넵토스가 소리쳤다.
“지금이다! 모든 정령이여! 집중 공격!”
-나의 왕이시여, 명을 받들겠습니다.
상급 정령들이 그 틈을 노려, 드래곤의 취약점인 머리를 노렸다. 불덩이, 얼음 창, 바람의 칼날, 암석, 번개······가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콰과가가가강!
큰 위력에 지속해서 들어오는 공격에, 드래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갖가지 마법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비늘을 뚫으려 들었다.
-크롸아아아!
한참을 맞다가 본능적으로 다시 보호막을 펼쳤다. 산의 거인이 몸으로 드래곤을 막기에, 제대로 온몸을 보호하진 못했다. 그 보호막의 일부가 막혀 소멸하였지만, 그래도 일부는 막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직격했다. 단단하게 감긴 비늘이 떨어져 나가며, 상처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 공격을 맞는 모습이 승기를 잡은 것처럼 보였지만, 오르넵토스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아직 부족해.’
드래곤을 완전히 찍어 누르려면 충분한 힘이었지만, 상대는 엘레노어였다. 단순히 데미지를 줘서 체력을 깎는다고 그녀가 절대로 멈출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드래곤을 막아야만 하기에 그녀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정찰을 나갔던 하급 바람의 정령이 조심스레 다가와 오르넵토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르넵토스 님.
“말해. 지금 빨리!”
-하급 정령들이 지금 대지를 수색하다가 말씀하신 인간을 한 명 찾았습니다.
희소식이었다. 오르넵토스는 반가운 소식에 보고하는 정령에게 물었다.
“그래? 그 인간 지금 뭘 해?”
-땅굴을 파고 이동 중입니다.
“······그 인간이 땅굴을 파면서 이동할 만큼 힘이 있어?”
-조력자가 있긴 합니다. 못생긴 도마뱀이 인간을 돕는다고 합니다.
본래 찾으려던 계획과는 많이 차이가 났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본래 엘레노어를 제압하는 게 컸지만, 루데릭에게 마나를 받은 대가로 계약자인 유선의 목숨이 가장 급했다.
“지금 별반 도움 안 되는 하급 정령들을 그에게 보내. 땅굴이 무너져서 우리의 양분이 되는 일이 없도록 계속해서 도와줘.”
-네, 알겠습니다.
바람의 정령은 다시 멀어졌다. 그리고 다시 드래곤을 제압하는 데 지휘를 시작했다.
쿠우우웅!
-크롸아아아아!
큰 울림과 동시에 엘레노어가 다시 일어났다. 깔아뭉개던 산의 거인의 몸을 찢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잠시라는 듯이 떨어졌던 비늘과 상처를 회복했다.
“이럴 줄 알았어.”
오르넵토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만들려고 해도, 그것조차 무시하는 무시무시한 마법이 그녀의 몸을 감쌌기 때문이다.
몇 번을 죽이려 들어도, 그녀는 다시 일어날 것이고, 다시 또 싸웠다. 그것이 그녀를 이루는 본질이었다.
드래곤은 총지휘관인 오르넵토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주둥이를 벌려 오르넵토스를 삼키려 들었다. 오르넵토스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보호막을 전개했다.
파지직!
“크으읏!”
몸이 충돌하자, 완벽하게 짜인 보호막에서 스파크가 튀는 소리를 내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만드는 위력에 마법이 흔들린단 소리였다. 오르넵토스는 더는 막기만 할 순 없다는 판단에 바닥에 뻗은 나무뿌리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감아 재빠르게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파창!
아슬아슬한 찰나, 오르넵토스는 드래곤의 이빨에서 벗어났다. 지상으로 내려온 오르넵토스가 공격하려 로드를 들었다.
“레프······.”
마법은 끝까지 잇지 못했다. 공중에 뜬 드래곤이 사용하는 마법을 보고 그녀의 온몸이 싸늘해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 투스 투르다!
오르넵토스는 그 주문을 듣고 경악했다. 그리고 정령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당장 저 마법을 감싸! 온몸으로! 무조건 막아야 해!”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흙의 정령들이 대지와 자신의 몸을 이용해, 그녀의 입가에 모이는 마법을 받아 냈다. 단단하게 감싸고, 감쌌다. 끊임없는 덧칠을 그치고 커다란 구체를 만들어 냈다. 흙의 정령으로 감싸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모든 정령, 고목, 그리고 산의 거인들까지 모두 그 구체를 덮어 막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오르넵토스는 자신이 가진 모든 마나를 동원해, 그 마법 주변의 결계를 생성했다. 강력한 보호막 마법이었지만, 한 겹으로는 안심하지 않았다. 오르넵토스는 계속해서 보호막 마법을 중첩했다.
한 겹, 두 겹, 세 겹······. 보호막이 점점 진해져 갔다. 폭발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중첩했다. 40겹으로 쌓던 찰나 시전 중이던 마법은 폭발하고 말았다.
쿠우웅!
거인들과 정령을 이용해 모두 막아 냈지만 그거로는 부족했다. 그 마법을 막으려고 방어 마법을 펼치던 오르넵토스의 몸도 함께 날아갔다.
“으으윽······.”
오르넵토스는 신음을 흘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정령들이 감쌌던 장소로 눈을 옮겼다. 흙먼지가 자욱했다. 느낀 것처럼 그 폭발에서 생존한 정령들은 없었다. 그 자리에는 드래곤 하나가 푸른 안광을 뿜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좋은 소식이라면 이 마법을 통해서 드래곤은 모든 마나를 잃었을 것이다.
나쁜 소식으론 그걸 막은 오르넵토스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막아 내고, 자신의 몸을 보호한 탓에 이제 대적할 만한 마나 따위는 없었다. 정령 군단도 이제 모두 잃어버렸으며, 다시 보충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오르넵토스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에브레라티오스, 이 망할 꼬마아!”
오르넵토스는 분노하며 엘레노어에게 소리쳤다. 그녀가 사용한 것은 종언의 마법. 자신에게 부여된 권능을 빌려 세상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 경솔한 행동에 오르넵토스는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나 소리쳤다.
“네 분노가 그런 수준이야?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세상을 날려 버리겠다고?”
-크롸아아아!
드래곤이 반론하듯 소리쳤다. 오르넵토스는 화가 난 채로 그녀에게 계속해서 말했다.
“네 단순한 분노로, 화풀이 따위로 준 권능들이 아니야! 네가 본래 있어야 할 곳에서 벗어난 것도 원래는 중대한 일이었다고! 네가 기뻐하고, 좋아하는 모습이기에 그대로 두었지. 그런 사소함에 분노로 물들라고, 내버려 둔 게 아니라고!”
사소함. 드래곤에게는 그것이 절대로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더는 들을 이유가 없다는 듯 오르넵토스를 공격했다.
“으으으······!”
파창!
오르넵토스는 방어막을 펼쳐 보지만, 턱없이 부족한 마나 탓에 그 공격을 완전히 상쇄시키진 못했다. 오르넵토스의 몸이 바닥을 향해 튕겨 나갔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힐 줄만 알았다.
탁!
“윽.”
하지만 오르넵토스를 받아 주는 것이 있었다. 이질적인 안정적인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던 오르넵토스가 눈을 떴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이 그녀에게 보였다.
“계약자!”
유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