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24. 폭주 (1)
동굴이 무너진 반대편.
“으으윽······.”
“콜록, 콜록. 이 망할 새끼······.”
폭발과 함께 입구가 완전히 봉인되었다. 몸을 날려서 간신히 잔해에 깔리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유선은 달려가 동굴 입구를 막는 바윗덩이들을 파헤치려 했다.
“이런 젠장.”
손으로 파 보려고 했지만, 그 흙무더기를 파면 팔수록 더 불안정해졌다. 겨우 이룬 균형인 것 같았기에 그만두었다.
스릉-.
그리고 유선의 목숨을 노리는 자도 있기에 속 좋게 파기만 할 순 없었다. 수강생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로 유선을 벨 생각이었다. 유선은 그대로 당할 생각이 없었기에, 자신의 허리에 꽂은 검을 따라 뽑았다.
“망할 새끼, 너도 한패였구나?”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도 먹고살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먹고살아야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알 것 같았다. 유선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왜? 날 죽이면 취직시켜 준다고 하냐? 그렇게 유니콘이 좋아? 그렇게 돈이 벌고 싶었어?”
“그게 헌터잖아요. 어떻게든 돈 벌고 싶어서 목숨 거는 직업이요. 저도 그 생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사내가 검을 유선에게 휘둘렀다. 유선은 앞이 제대로 안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술에 검 자도 못 들어 본 초보의 검을 맞을 만큼 몸이 둔하진 않았다.
챙!
유선은 그가 휘두르는 검을 튕겨 내고 재빠르게 다가가 사내의 얼굴을 팔꿈치로 쳤다. 사내는 검을 놓치고 그대로 안면에 직격타를 맞았다.
“크악!”
유선은 놓친 검을 발로 차 내고 사내를 일으켜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날 죽이고 나선 뭘 하려고? 넌 빠져나갈 거로 생각해?”
“다, 당연하죠! 그 정도는 약속해 줬으니까요!”
유선은 헛소리하는 그의 얼굴을 한 대 쳤다.
“당연하긴, 이 시X롬아! 지금 동굴이 이렇게 무너졌는데,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고!”
유선을 묻어 버리겠다는데, 고작 테이머 수강생 나부랭이를 살려 준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애초에 버림 패로 쓰는 미끼였다. 취업으로 유혹하고 함께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묻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맞아!”
“효승 선배가 우리를 배신할 리 없어요! 우리를 말이에요!”
그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이미 열렬한 효승의 신도였기에, 그가 그럴 거로만 믿었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정신 차리게 한 대 더 갈겨 주고 싶었지만, 유선의 시야를 가리는 메시지 창이 보였다.
-엘레노어의 스트레스가 올라갑니다.
스트레스 상승 메시지였다.
-엘레노어의 스트레스가 올라갑니다.
-엘레노어의 스트레스가 올라갑니다.
-엘레노어의 스트레스가 올라갑니다.
메시지 창이 쉴 새 없이 올라와 유선의 눈을 괴롭히며 심란하게 했다. 그녀를 안심시키러 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엘레노어의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올라갔다.
마지막 창이 올라갔다. 동시에 유선의 숨이 멈췄다. 한순간 주변을 지배하던 모든 요소가 하나에 압도당했다. 모든 것이 멈춰 섰다.
마치 죽음을 알리는 것처럼.
쿠우웅!
***
한편, 유선의 집.
“뭐야, 재미있는 것도 안 하네.”
오르넵토스는 소파에 앉아서 리모컨을 만졌다. 무료하게 채널 버튼을 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면서 다시 내려놓았다. 뭔가에 재미를 느끼려 해도 도통 할 것이 없었다.
쿠우우웅!
그때, 오르넵토스는 거대한 울림을 느꼈다. 지진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집 안은 흔들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거대한 마나를 드러낼 때만 나오는 울림이었다.
“뭐야, 이만한 울림은······ 설마?”
오르넵토스는 현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급하게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나며 루데릭이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 깨달았다.
“정령 계집, 너도 느꼈나?”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구나. 악마마저 느껴 버렸다면······.”
오르넵토스가 손톱을 뜯었다. 그녀가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니 루데릭도 확신했다.
“역시 이건 그 꼬맹이의 마나로군.”
“그래, 엘레노어······ 아니, 에브레라티오스가 자신을 완전히 놓아 버렸다는 거지.”
오르넵토스는 엘레노어의 본명을 말했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해, 엘레노어와 정신을 공유하려 시도했다. 단단한 벽에 쌓인 것처럼 그녀에게 접촉할 수단은 모두 차단되었다. 오르넵토스는 혀를 찼다.
“이런, 단단히 뿔났나 보네. 마나가 안 들어오는 걸 보니······.”
“큰일인가?”
“만약 계약자가 혼자였으면, 큰일이었겠지. 역소환되어서 에브레라티오스를 찾는다고 분명히 시간이 걸렸을 테니까. 인간과 계약한 게 말처럼 나쁘진 않았네. 몸은 유지해서 말이야. 이거로 어떻게든 버텨서 에브레라티오스를 찾아봐야 해.”
하지만 마력이 없는 작은 몸으로 혼자 돌아다니는 건 무리였다. 그렇기에 루데릭이 그녀에게 말했다.
“데려다주겠다.”
루데릭이 등 뒤에 숨겨 놓은 날개를 펼쳤다. 오르넵토스는 그것을 보며 조금 꺼려진다는 듯 주춤거렸다.
“으, 악마의 품에 안긴다. 별로 좋은 생각 같진 않은데.”
“나도 너 같은 꼬맹이를 안고 싶은 생각이 없다. 지금은 내 주인을 위해서 그 역겨움마저 감수하는 거다, 정령 계집. 그러니 너도 그 정도는 감수해라.”
“으, 알았어!”
오르넵토스는 자신의 몸을 루데릭에게 허락했다. 루데릭은 오르넵토스를 끌어안고 등 뒤의 날개를 펼쳤다.
펄럭!
그리고 발코니에서 도약해, 진원지를 향해 날아갔다.
***
헌터 아카데미 현장 실습장.
“빨리 나와! 죽기 싫으면!”
헌터들은 급하게 귀환했다. 안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강사들은 초청된 헌터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미쳤어. 지금 완전히 미쳐 돌아가!”
그렇게 용맹한 헌터들도 겁에 질린 채로 중얼거렸다. 밖에서 상황을 브리핑받던 게키와 강사는 그들의 반응이 낯설어 물어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게 지금 눈앞에 나타났어!”
“그게 대체 뭡니까?”
“그게 뭐냐고? 듣고도 넌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할 거다!”
A급 헌터들조차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포.
“그건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하려던 찰나, 뭔가가 하늘에서 날아왔다. 재빠르게 이곳으로 하강하면서 뭔가를 놓아주었다.
놓은 물건이 바닥을 굴렀다. 그것이 작은 소녀의 형상을 취했다는 건 멈춰서야 겨우 알았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나는 물체를 향해 소리쳤다.
“으아! 야, 망할 악마! 이렇게 내려놔야만 했어?”
“사심은 없다.”
“완전 사심 담긴 착지였구먼!”
오르넵토스를 놓아준 것과 다르게 루데릭은 안정성 있게 착지했다. 루데릭은 한 헌터에게 물었다.
“여기가 내 주인이 들어간 곳인가?”
“주인?”
“정유선이란 남자 말이다.”
“아, 그, 그렇다······.”
루데릭은 근처에 유선이 없음을 확인했다. 유선이 들어갔다면, 엘레노어도 함께였다. 이 건너편에 바로 엘레노어가 폭주하는 현장이 있단 말이었다. 루데릭은 그 너머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걱정되었다.
“들어갈 건가?”
루데릭의 물음에 오르넵토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들어가야지. 마나가 희박한 이곳이라면, 싸우는 건 무리겠지만, 그 안에 들어간다면 분명히 힘은 어느 정도 돌아올 거야.”
“마나가 돌아온다 해도, 승산 없다고 여기는 데 자신 있단 말이냐?”
루데릭은 냉정하게 판단해 얻은 결과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오르넵토스가 끄응하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솔직히 저지할지 모르겠어. 그 아이를······. 단순한 힘이나 마법으로도 따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나도 확신이 안 서.”
정령왕도 자신 없다는 듯이 말했다. 루데릭은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지금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 그리고 자신의 주인을 위한 최고의 방법을······.
루데릭은 오르넵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령왕, 내 마나를 가져가라.”
“뭐?”
오르넵토스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경악했다.
“꺼림칙한 것 안다. 나도 네년에게 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너의 힘으론 내 주인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 내가 들어가더라도 오히려 주인이 더 위험해질 뿐, 실질적으론 도움이 되는 일이 없다. 최선의 방법은 이것뿐이다.”
“······.”
오르넵토스의 경계하는 눈빛이 강해졌다. 아무리 봐도 그녀가 생각하는 악마와는 전혀 달랐다.
“그 인간을 위해서 이러는 거······ 정말로 단순히 ‘맹세’ 때문이야?”
기만하고 속이고, 유혹해 나락으로 몰고 가는 악마들. 그것이 본 속성일 것이다. 그의 꿍꿍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믿어 주었다.”
루데릭의 말에 경계하지 않고 다가와 주어 자신을 알아주었다. 모든 것이 거짓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유선은 루데릭을 믿어 주었다.
“이것은 내가 맹세한, 나를 믿는 그에게 보이는 증명이다.”
루데릭의 말에 경계하던 오르넵토스가 그의 눈을 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확고한 눈빛이었다.
“난 분명히 천벌 받을 거야.”
오르넵토스는 중얼거렸다.
“죽은 왕들이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분명히 나를 원망하겠지. 으으······.”
그리고 루데릭의 손을 잡았다.
***
자신만만했던 효승과 정도. 그들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공포에 질린 얼굴만 있었다.
“뭐야, 저게 대체······?”
정도가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넘어왔다고. 분명히 넘어왔는데······.”
효승은 자신의 상황을 부정했다. 눈앞의 거대한 생물체. 그게 소녀의 몸에서 한순간에 바뀔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소녀가 말로만 듣던 드래곤의 형상을 취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드래곤.
드레이크의 몸집에 몇 배는 넘어가며, 하얀 비늘로 뒤덮인 절대자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크르르······.
거대해진 드래곤이 고개를 돌려 효승과 정도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헤치려는 의도가 명확하게 보였다. 효승은 근처의 드레이크를 불렀다.
“망할 도마뱀 이리 와!”
드레이크가 지배의 낙인에 끌려 효승 앞에 서서 그 거대한 드래곤의 앞을 막았다. 효승은 드레이크에게 외쳤다.
“공격해! 공격해! 죽여 버려!”
지배의 낙인이 발동되었다. 드레이크는 그 낙인을 받아들여 거대한 것에 드레이크가 소리를 질렀다.
-키에에에엑!
그 소리를 듣던 드래곤은 자신도 따라 주둥이를 벌려 포효성을 내질렀다.
-크롸아아아아아!
드레이크가 주춤거렸다. 그 살기에 노출된 효승은 그대로 주저앉았고, 정도는 손에 쥔 방패를 놓치고 말았다. 이것이 압도적인 살기였다. 주춤거리던 드레이크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리고 효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리에는 지배의 낙인이 더는 없었다. 죽음, 그 이상의 공포. 그것이 드레이크를 정신 차리게 했다.
드레이크가 날개를 다리로 삼아 효승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통제할 수단이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오지 마!”
효승은 뒷걸음질 쳤다.
“오지 마!”
벽에 내몰렸다.
“오지 말라고! 이 미개한 짐승 새······!”
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드레이크가 그의 머리를 단숨에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으직!
드레이크는 그의 머리를 꿀꺽 삼켰다. 효승은 최후가 허무하다고 들 정도로 바로 죽고 말았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주인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윤정도는 그 상황에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되어 도망쳤다.
화이트 드래곤은 곧바로 표적을 돌렸다. 멀어지는 윤정도를 내버려 두고, 그의 눈이 근처의 겁에 질려 쓰러진 사람들을 향했다. 도망치다가 포효성에 놀라 그대로 쓰러진 초보 헌터들이었다. 드래곤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히이이익!”
무서운 얼굴에는 자비심이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녀는 이제 더는 의미가 없다는 듯 보였다. 앞발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서 뿌리가 돋아 올라와 그녀의 공격을 막아 냈다. 자신이 죽었을 거로 생각했던 사내들이 뿌리로 만들어진 망에 목숨을 건졌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 뿌리로 만들어진 망이 절대로 단순한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여인의 형상을 취했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원소가 어우러져 이루어 낸 몸체였다. 그녀가 차가운 표정으로 겁에 질린 헌터들을 보며 말했다.
-살려 줄 때, 당장 도망가! 이 멍청한 인간들!
“히이익!”
그의 호통에 겨우 떨리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힘에 뿌리들이 우직우직하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오르넵토스는 그 자리에서 벗어났고, 동시에 뿌리 막이 부서져 내렸다.
쿠웅!
발길질이 대지를 울렸다. 오르넵토스는 공중에 떠오른 채로 화이트 드래곤과 눈을 마주했다. 오르넵토스가 입을 열었다.
“분노로 물드네, 에브레라티오스.”
드래곤은 거친 숨을 내쉬며 오르넵토스를 노려보았다. 그 분노가 어떤 것인지, 오르넵토스는 짐작했다.
“지금 그 의미 없는 분노는 그만둬. 계약자, 정유선은 죽지 않았어.”
-크롸아아아아아!
오르넵토스를 향해 포효성을 내질렀다. 그걸로 확실히 알았다. 이미 그녀의 이성은 남지 않았다. 순수한 만큼 금방 분노로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 오르넵토스는 더는 방법이 없음을 알고 그녀에게 말했다.
“에브레라티오스, 나의 친애하는 벗.”
그녀의 손 앞에서 기다란 작대 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원소석이 박힌 정령왕의 로드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이제 내가 너, 그리고 이세계를 지키고자 했던 약속을 이제 지켜야만 해.”
그녀의 마나가 로드의 끝으로 집중했다. 순수한 마나의 결정이 한곳에 모여 환한 빛을 발했다.
“그러니······ 부디 죽지만 않기를!”
정령왕이 스태프를 높게 들어 올렸다. 엘레노어의 벗이 아닌 정령왕으로서 외쳤다.
“<오르넵토스>!”
그녀의 외침에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땅에서 흙의 정령들이 솟아올랐다. 호수에는 물의 정령들이, 하늘에선 바람의 정령들이, 불, 번개······. 모든 정령이 깨어났다.
우둑, 우두둑!
단순히 정령들뿐만 아니라 숨어서 지내던 고목이 뿌리를 들고 일어나며.
쿠르르릉······!
산을 이루던 거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정령왕의 부름에 응답하여 순식간에 하나의 군단을 만들었다. 오르넵토스는 폭주하는 하얀 드래곤을 대적했다. 군세를 이끈 정령왕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를 따르는 세계여! 분노하는 세계의 씨앗을 제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