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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안 (2) (5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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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안 (2)

헌터 아카데미의 마지막, 그것은 현장 실습이었다. 직접 던전에 뛰어들어, 사냥하는 요령과 생존 방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성적에는 무의미하지만 그래도 이 마지막 과정에서 빛을 보는 사람들이 있어, 절대로 허투루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두 준비를 단단히 했다. 인적 없는 야산 속에 발현된 던전은 7개. F 등급으로 모두 전문 게키들이 던전마다 배치되었고, 현 상황을 분석해 안전한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이제 이것까지 마무리하면 끝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유선은 조금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유선은 진연을 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유선은 피식 웃으면서 진연에게 물었다.

“떨리지?”

진연이 화들짝 놀라며 유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떨리네요. 첫 던전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까······.”

“걱정하지 마. 잘 해낼 거야.”

“고마워요, 선배. 여태 이끌어 주셔서요.”

진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데 안 기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선배.”

“왜?”

“리저가 이상하게 가끔 선배 얼굴을 자꾸 떠올리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뭔가 하셨나요?”

“······.”

리저가 대화한 것을 아직 안 잊은 모양이었다. 리저는 유선을 올려다보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덕분에 좋은 괴물임을 알았어! 고마워, 괴물!

리저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유선에게 보냈다. 유선은 당연히 못 알아들은 척하며 넘어갔다.

“이런 걸 보면, 선배가 정말 능력은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게?”

“사람이고, 사역수고 자기편이 된다면 자기편으로 만들 줄 아는 것 같으니까요.”

유선은 무미건조하게 굴던 그녀가 건네는 칭찬에 미소 지었다.

“그 말은 너도 내 편이란 뜻이겠네?”

“말하자면, 선배 편······이지요.”

쑥스러운지, 아니면 말하기가 꺼려지는지 말을 중간에 늘렸다. 유선은 별생각 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아무튼, 이것만 거치면 너도 어엿한 헌터니까, 잘되길 기도할게.”

“네, 선배, 잘 보고 올게요.”

“그래.”

진연은 리저를 데리고 자신이 가야 할 던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선도 초청받은 헌터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보여야 할 사람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유선은 강사 중 한 명을 붙잡아 물었다.

“이효승 헌터는 없습니까?”

“이효승 헌터님이라면 오늘 안 오십니다. 도저히 전화를 안 받더라고요. 그냥 안 올 생각인 모양입니다.”

“흐음······.”

어제 수강생들의 사정을 겨우 알았기 때문에, 효승이 자존심이 많이 구겨졌다는 건 유선도 잘 알았다. 자존심이 세다면 오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엘레노어의 꿈 때문에 앙심을 품고 유선의 행동에 꼼수를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김현태 익스플로러에게 전화해서 던전에 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김현태 익스플로러는 물론 모두 괜찮은 던전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유선은 혹여나 생길 문제가 없음을 알아 안심했다.

수강생 헌터들이 던전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게키들은 모든 정보를 받으며, 앞을 지켰다. 유선은 A급 장비들을 입은 헌터들 쪽으로 다가갔다. 대부분이 코드 헌터 때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정유선 헌터님.”

“어이구, 정유선 헌터님. 하하! 팬입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유선은 미소 지으면서 일일이 한 명마다 인사를 건네주었다. A급 중에는 유선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 헌터들도 꽤 있었다. 이미 잡은 주제가 있었던 모양인지, 단순히 인사로만 끝나고 다시 자기들 이야기에 집중했다. 유선은 엘레노어를 옆에 앉혀 놓았다.

바깥에 나오니, 그나마 살 것 같은지, 표정이 조금 좋아졌다. 유선은 그녀의 머리를 만져 주며 말했다.

“끝나고 집에 가면 맛있는 라면 먹자.”

“응.”

유선은 나면! 하면서 좋아할 애의 반응이 차가우니 걱정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길 바랄 뿐이었다. 유선은 어제 제대로 자지 못해 몰려오는 졸음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

-비상 상황 발생! 비상!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유선은 게키 쪽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 다시 눈을 떴다.

시작했을 때와 다르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떠들던 A급 헌터들이 모두 웃음기가 가신 채로 게키들을 보았고, 던전에 들어가지 않은 일부 강사들이 틈 앞에 세워진 무전기에 모였다.

무슨 일인가, 유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보았다.

“무슨 일이야!?”

-드, 등급이 이상합니다! 어째서 여기에 F 등급이 아닌 몬스터가······ 적어도 B······ 아니 A급 몬스터들이 활개를 칩니다!

“뭐라고?”

F 등급이 아닌 몬스터라는 말에 밖에서 대기하던 게키들이 경악했다.

“무슨 소리 해! 던전 확인할 때, F 등급이라고 하지 않았어?”

-확실히 처음에는 F 등급 토끼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니······ 으아악!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끊어졌다. 지금 혹시나 모를 불상사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초청받은 헌터들이 강사들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지, 지금 터무니없이 높은 등급의 몬스터들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 말에 모든 헌터가 격분했다.

“일 처리를 어떻게 했기에, 애들이 위험에 빠져!”

“그게 우리도 지금 원인을······.”

“원인을 모르면 다야? 사람이 뒈져 가는데 모르면 다냐고?”

“형님, 지금은 출동부터 합시다. 애들이 위험해요.”

실랑이를 벌일 시간조차 아까운 시간이었다. A급 몬스터들이면 조금만 늦어도 지장이 생길 테니까. 사내들은 얼른 자신의 무기를 들고 빠르게 정비했다.

“이 일은 제대로 따질 거니까, 그렇게들 아십시오잉?”

같은 회사 소속이 아닌 헌터라 해도, 4주 동안 함께 지내면서 정을 나눈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그 정을 헛되게 보내지 않으려고 초청된 헌터들이 모두 이계의 틈으로 몸을 날렸다. 유선은 차분하게 강사에게 현 상황을 물어보았다.

“수강생들 위치가 다 어떻게 됩니까?”

“제대로 혼비백산한 탓에 지금 헌터들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대책 없이 흩어지는 건 초보들의 문제점이었다. 그 초보들의 문제가 드러났다는 것은 강사가 꼼짝없이 당했다는 소리였다. 지금 있는 헌터들이 모두 들어간다고 해도, 이렇게 흩어진 도표를 보면 그들 전원을 구조하기는 어려웠다. 지금은 손이라도 하나 더 거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유선은 무조건 참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엘레노어.”

유선은 그녀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괜찮겠어?”

유선의 물음에 그녀는 웃었다.

“괜찮아.”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이지 않게 애써 웃었다. 그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유선은 상황을 중계하는 요원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도 다녀오겠습니다.”

“정유선 헌터님께서 참여해 주신다면 분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코드 헌터 상황 당시, 귀환율 100%로 만들었던 장본인. 그가 이 사태를 수습해 줄 희망이라 여겼다. 유선은 그에 맞는 장비를 장착하고 엘레노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

-뭐야! 완전히 짬뽕 같은 놈들이구먼! 고르지 않게 튀어나오고 말이야.

-이거, 상당히 귀찮아지겠는데······.

먼저 들어간 헌터들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뒤에 들어온 유선이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까?”

-보통 안 좋은 게 아닙니다. 몬스터가 한 종류만 있으면 상관없는데, 말도 안 되게 여러 마리가 나오네요. 애들은 애들대로 흩어졌지, 우리는 우리끼리 뭉쳐야지······ 시X.

육두문자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곤란한 상황이었기에, 헌터들은 유선에게 과감한 요구를 구했다.

-정유선 헌터님은 사역수가 강하니, 아무래도 홀로 행동하셔도 될 것 같은데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유선은 그 말에 응답했다.

“당연한 말입니다. 최대한 한 사람이라도 더 빠르게 구출해야지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귀환율 100% 한 번 더 찍어 봅시다!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제 일에 집중했다. 유선은 대충 헌터들이 향한 곳을 확인했다. 3인 1조로 이루어 흩어진 수강생들이 있는 곳으로 하나둘씩 모았다.

유선은 그들의 발이 늦게 닿을 법한 사람부터 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유독 동떨어진 곳에 한 명이 있음을 확인했다. 유선은 그곳을 좌표를 지정해 뛰어갔다.

유선이 달려간, 좌표가 향하는 곳은 동굴 안이었다. 유선은 깊숙한 장소에 숨었나 싶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안에서 발견되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호, 혹시 저, 정유선 헌터님입니까?”

“당신은······.”

누군가 했더니 테이머 수강생 중 한 명이었다. 근처에 크리스털 리저드가 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 사내는 공격을 당했는지, 피가 묻었다.

“무사하십니까?”

“네, 어느 정도······ 다리를 좀 다친 거만 빼면······. 그보다 다른 분이 더······.”

단순히 한 명인 줄 알았지만 그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는 걸 확인했다. 같이 도망친 쪽은 탱커 클래스 쪽 같았다. 투구를 빼고는 모두 긁혀 날아간 자국이 있었고, 공격받아서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지도상으론 한 명뿐이었는데, 어째서 두 명이 있습니까?”

“무, 무전기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포 때문인지 말을 더듬었다. 말대로 급하게 도망치다가 떨어트릴 수 있었다. 유선은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는 탱커를 보다가 물었다.

“살아는 있어요?”

“네, 저랑 함께 왔으니까······ 다만, 지금 너무 힘들어하는 상태입니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듯 보였다. 갑옷이 무거운 탓에 유선이 끌고 가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기에 엘레노어에게 부탁했다.

“엘레노어, 이 사람 부축 좀 해 줘. 밖으로 나가자.”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은 비교적 가벼운 테이머 수강생을 부축하고 밖으로 향했다.

“으윽······.”

“괜찮으십니까?”

“네······ 조금만······ 윽······.”

테이머 수강생은 중간마다 고통에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하지만 나가야 했기에, 그대로 둘 수 없어 몇 번이고 계속 움직였다. 아무 의심도 없이 그를 데리고 나갈 때였다.

-다리를 왜 절지? 모르겠어······.

뒤에서 중얼거리는 리저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리저드는 뭔가를 안다는 듯이 말했다.

“왜 다리를 저는데?”

“네? 공격당해서 그렇습니다······.”

사내에게 묻는 척하면서 리저드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리저드는 자신에게 말한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모, 모르겠어. 그냥 헐레벌떡 뛰어와 놓고는 그냥 절어······.

헐레벌떡 뛰어왔다고? 그러다가 다리를 절어?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헐레벌떡 뛸 수도 없고, 한쪽 다리는 어떻게든 절면서 뛰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동굴까지 무사히 도망치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뭔가가 이상했다. 불안감에 유선은 고개를 들어 엘레노어를 올려다보았다. 정신없는 기사는 부축을 받으면서 저 멀리 떨어졌다. 멀어진 엘레노어를 보고 그제야 유선은 완전히 깨달았다.

함정.

이건 함정이었다. 애초에 엘레노어와 유선을 갈라놓으려는 일종의 함정이었다.

“엘레······!”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콰앙!

동굴이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기에 그 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

“유선 님?”

엘레노어가 폭음을 듣고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동굴을 보면서 자신의 주인 이름을 불렀다.

“유, 유선 님? 어딨어?”

그녀는 깔끔하게 덮인 동굴을 보며 겁을 먹었다. 그토록 붙어 있으려 했던 남자가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엘레노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은 동굴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후우.”

비틀거리면서 엘레노어의 부축을 받던 사내가 똑바로 서서 투구를 벗었다. 투구 속에서 가려진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참나, 이런 꼬맹이한테 부축받는 연기를 하려니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윤정도. 대학 시절부터 유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 사내였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무너진 동굴로 시선을 던졌다.

“깔끔하게 덮였네. 폭탄 위력이 좋구먼. 이 정도면 됐어요, 형?”

수풀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물었다. 윤정도의 목소리에 수풀 속에서 몸을 숨기던 남자가 나왔다.

“완벽해. 우리 정도는 연기만큼은 배우 뺨친다니깐.”

효승이었다. 초청받은 헌터로서 참관하지 않던 사내가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드레이크와 함께 나왔다.

“정유선, 그 새끼가 얼굴 확인하려 들었으면, 진짜 큰일이었는데 다행이네요. 병신 같은 새끼.”

정도는 키득 웃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유선을 궁지에 빠트리려고 준비한 계획이었다. 일반인이 섞여 있고, 던전 등급이 뒤바뀌는 게 전혀 없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유선은 방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선 님, 어디에 있어······? 가면 안 대······. 유선 님······.”

정도는 턱짓으로 절망에 빠진 소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이 꼬맹이로 뭐 할 생각이에요?”

“뭐긴, 정도야. 내가 늘 잘하는 거 있잖아.”

공포에 빠진 상대를 그대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지배> 특성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거 안전한 거 맞죠?”

불안하다는 듯 묻는 정도의 말에 효승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동굴은 의미 불명으로 무너졌고,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정유선을 보고 공포에 빠져서 폭주하려고 들었던 걸, 이효승 헌터가 계승해 안전하게 만든다. 이게 우리 계획이었잖아. 예상보다 좀 빠르긴 했지만······.”

유선의 사역수를 빼앗으려고 벌인 연극 시나리오. 자신의 A급 몬스터와 B급 몬스터를 20마리 가까이 잃어야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생각처럼 맞아떨어졌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면 후딱 해 버리죠.”

효승은 지배의 낙인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엎드려 절망하는 엘레노어의 머리를 잡았다. 쾌감에 사로잡힌 얼굴로 엘레노어에게 속삭였다.

“넌 이제 내 거다.”

지배의 낙인이 그녀의 머리 안으로 흘러들었다. 순조로웠다. 그녀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계속해서 그 감정을 부추겼다. 유선이 배신했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갔다고, 그런 배신자를 믿지 말고 자신을 믿으라고 주입했다.

경험상 그렇게 주입하다 보면, 그 누구도 자신을 따랐다. 기계적인 음성으로 알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새로운 계약의 인장을 찍을 준비를 했다.

-싫어.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전혀 달랐다. 효승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머릿속에는 싫어, 라는 글자가 도배되었다. 꺼림칙한 감각이 손을 떼라고 경고해 왔다.

“이런 미친······ 저항하지 마!”

하지만 멈추지 않고 효승은 계속해서 지배의 낙인을 찍으려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글자로 막아 대지만, 그럴수록 집요하게 틈을 찾아 파고들어 갔다. 그렇게 한참을 파고들어 가자, 맥이 끊어졌다. 도배하던 모든 글자가 사라졌다.

머릿속은 완전히 공백이었다.

“성공인가?”

해냈다는 쾌감이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미소 지으려 하자, 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 감싸는 감각은 쾌락이 아니라는 건 뒤늦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녀가 효승을 올려다보며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을 보고 몰려오는 섬뜩한 공포에 자신이 실수했음을 뒤늦게 알았다. 슬픔에 잠겼으리라 생각했던 푸른 눈이 좁아지며 살기를 내뿜었다.

싫어로 도배되었던 머릿속, 공허하게 비워진 그 자리를 채우는 단어는 오로지 하나.

“외로워.”

분노.

순수는 상실의 분노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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