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18. 루데릭 (2)
유선은 루데릭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루데릭은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도로 가를 향했다. 유선은 그 틈을 이용해 몰래 루데릭의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이름: 루데릭.
계약 날짜: 2042년 08월 16일.
호감도: 5%.
스트레스: 60%.
적응도: 10%.
-루데릭은 유선을 ‘주인’으로 인정했습니다.
-루데릭은 배신을 싫어합니다.
그만한 깽판을 친 대가일까? 루데릭에 관한 적응도가 10%인 상태에서 시작했다. 그 대신 호감도는 엘레노어를 데려올 때보다 낮았고, 스트레스는 상당히 높았다.
‘엘레노어는 정말로 거저먹는 수준으로 데려왔나 보네.’
유선은 엘레노어를 정말 무슨 능력으로 데리고 왔는지 궁금했다. 유선은 다시 상태 창을 집어넣고 미리 뽑아 놓은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자, 마셔.”
“······.”
“이키, 내가 섬세하지 못했구나.”
유선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캔을 보던 루데릭을 보고 캔을 따서 다시 건네주었다. 루데릭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왜 저항하지 않았어? 되게 싫어해서 다 쓸어버릴 것 같았던 녀석이.”
“주인을 끌고 나오려고 모든 힘을 다 썼다. 저항할 힘조차 남지 않았지.”
유선과 엘레노어를 끌고 나오려고 모든 힘을 사용했다. 무너지는 동굴에서 빠르게 탈출하려면 루데릭이 무리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빠져나온 순간부터 탈진 상태였다.
그 사내들은 운이 좋았다.
“너한테 몹쓸 짓을 하진 않았지?”
“······그런 건 없었다. 그래도 취급하는 걸 보면, 주인이 오지 않았다면 뭔가를 하려고 했겠지.”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구나. 다행이네.”
지금 막 태어난 것같이 이세계로 발을 들인 아이한테서 인간을 향한 적개심을 심어 줄 수 없었다.
“이곳의 인간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까? 악마를?”
“평소 행실이란 게 있으니까. 오비이락이라고 원래 배 먹을 생각도 없는 까마귀가 돌을 맞는 법이니까.”
“오비이락이라······.”
루데릭은 음료수에 입을 대었다. 한 모금을 살짝 마시며 그에게 물었다.
“단순히 얘기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래도 뭔가 목적은 있겠지. 뭘 묻고 싶은가?”
“하하, 너무 티 났나?”
유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엘레노어에 대해서 알지?”
“그 꼬마 말인가?”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데릭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계약자라면 자네도 그 존재를 알 텐데······. 그걸 숨기고 어떻게 계약했나? 신기하군.”
유선은 자신이 의식 없는 상태에서 계약했단 사실을 숨기려고 거짓말을 했다.
“계약 전에 정체에 대해서 모른 체하기로 약속해서 정체는 알지 못해. 그래서 혹시 네가 알려 줄 수 있나 해서 물어보는 거야.”
루데릭은 뭔가를 얘기하려다가 문득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다시 입안으로 삼켰다.
“네 충직한 종으로서 맹세했으니, 지금은 알려 줄 수 없다.”
“왜?”
“그 아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자네도 그 사실을 알면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한지 알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꼬마에게 대하는 태도가 변할 거다. 태도가 변한 것만으로도 자네와 그 아이의 갈등은 크게 번져 갈 거다.”
유선은 그녀와 계약한 것 자체가 위험한 짓이란 말에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애써 담담하게 얘기했다.
“엘레노어는 엘레노어야. 정체를 안다고 해서 내가 크게 달리할 건 없어.”
“그렇다면 차라리 알려고 하지 마라. 늘 그랬듯이 모른 채로 지내라.”
명쾌한 답이다. 유선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맘처럼 되지 않는 게 문제지. 인간의 욕심은 끝없고, 했던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이 왜 있겠어?”
유선은 목이 타 음료수를 들이켰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 언젠간 자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날이 과연 올까 모르겠다, 어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선도 엘레노어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이는 그날이 올 거라고 자각했다. 말대로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까.
둘이서 이어지던 말이 끊어졌다. 루데릭은 다시 고개를 돌려 도로를 구경했다. 유선은 그의 시선을 따라 도로를 보았다.
정신없이 달리는 자동차,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가로수, 그걸 넘으면 보이는 사람들. 사람이 살고 있다는 활기가 보였다.
“이세계는 어때? 마음에 들어?”
“······파괴해 버리고 싶군. 왜 많은 형제가 이곳을 부숴 버리고 싶은지 이해할 것 같아.”
루데릭은 무심하게 말했지만, 유선은 그의 말에 악의가 없음을 알았다. 머리 위에 ‘동경’이란 글자가 떠 있었기 때문이다.
유선은 캔 안에 든 음료를 모두 비워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마셨니?”
“그렇다.”
“그럼 버리고 올게. 캔 주라.”
“······.”
유선이 손을 내밀었다. 루데릭이 캔을 그에게 건네주려고 손을 뻗었다. 캔을 건네주는가 싶더니 그가 돌발적인 행동을 보였다.
다른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선은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 생각을 못 해 그 힘에 중심을 잃어 앞으로 쏠렸다. 루데릭은 유선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주인과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했지만, 이것만큼은 잘 기억해 두어라. 우리의 운명은 엇갈려 있다. 그렇기에 자신과 주인, 우리 둘이서 함께한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것이 후회로 얼룩지든, 아니면 행복으로 젖든······. 운명은 결국 우리 둘 중 하나를 데려갈 것이다. 알겠느냐?”
심각한 목소리로 경고한 것과 다르게 그의 경고. 루데릭은 한없이 진지했다. 하지만 유선은 그 진지함이 무색하게 무감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잡소리는 그게 끝이지?”
“······.”
“아, 배고프다. 엘레노어랑 기율이 데리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유선은 제대로 일어서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루데릭은 유선에게 캔을 넘겨주었다. 한 손으로 캔을 구겨 두 개를 동시에 잡고 유선은 다시 루데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자는 의미였다. 루데릭은 유선의 손을 잡으려다가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뭔가에 홀리다 정신 차린 사람처럼 대답했다.
“나는 아이가 아니다, 주인. 그 꼬마를 다루듯이 애 취급하지 마라.”
“그래? 음······.”
처음에는 잘도 잡더니······. 그 말을 입속으로 삼켰다. 지금 외견이야 엘레노어만 한 꼬마지만 정신은 성숙한 인간과 다름없으니까.
루데릭과 간단한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엘레노어와 기율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대기실에 나란히 앉은 데다, 기율의 하얀 정장, 그리고 엘레노어의 머리카락 색깔 덕분에 금방 알았다.
둘이서 초코 우유를 마셨다. 종이 곽 250ml 우유에 빨대를 꽂은 채로 말이다.
엘레노어가 초코우유를 마시는 모습이라면 안정적인 이미지였지만, 차기율이 빨대를 직각으로 꺾어 마시는 모습을 보니 동네 바보 같아 보였다.
“뭐 하냐?”
“친해지기 위한 동심 수련이오. 내가 곧 아이가 되어서 꼬마 아가씨와 함께 친해지려는······.”
장황하게 뭔가 설명해 가는 기율이었지만, 루데릭이 기율의 행동에 간단하게 평가했다.
“조금 모자란 인간 같군.”
“그래도 착한 녀석이야. 착하지만 모자란.”
기율과 엘레노어는 결국 제대로 친해지진 못한 것 같았다. 유선은 그들에게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안에서 아무것도 안 먹으니까 배고파 죽겠다.”
“오늘은 큰일을 해낸 직원을 위해, 사장님이 쏴야겠지. 뭐 먹고 싶은 것 있소?”
“나면!”
유선에게 물었지만,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유선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늘 일을 제일 잘한 엘레노어가 먹고 싶은 거로.”
“나면!”
“흠, 그러면 잘하는 일식집이 있으니 거기서 라면 먹게 하고 우린 축배 좀 듭시다. 초밥에 사케가 묘하게 당기니.”
“그래, 엘레노어 동생도 생겼으니, 그런 곳에 가서 먹어 봐야지.”
“동생? 동생도 있어?”
엘레노어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했다. 동생이란 단어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란 걸 아는 루데릭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이 꼬마의 동생이란 것이냐? 말은 똑바로 해라.”
“나이로는······. 알 수가 없으니 군대로 치면 후임 아니겠냐? 그래도 후임이라 부르는 건 너무 어감이 안 좋으니, 동생으로 하는 게 좋겠는데.”
“동감이오.”
“동생 좋아!”
“제멋대로인 인간들······.”
루데릭은 어찌 됐든 상관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싫지만은 않았는지 미묘라는 단어가 그의 머릿속에서 보였다.
‘죽겠군.’
유선은 이제 웃음을 참는 일도 생겼다는 게 너무나도 괴로우면서 행복했다.
***
한바탕 회식이 끝나고, 유선은 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다!”
“이게 집이라고?”
감탄사와 함께 들리는 의문사. 그 의문사는 루데릭의 것이었다. 루데릭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노예들의 시중을 드는 꼬마 머슴들이 지낼 것같이 좁은 이 방이 주인의 집이란 것이냐?”
“꼬마 머슴 집보다 못해서 미안하다.”
“벨제브가 자신을 가둔 곳도 이것보단 넓었는데.”
비꼬는 폼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엘레노어가 살면서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세 명이 있으니, 좁은 건 피할 수가 없었다. 까다로운 루데릭은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루데릭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벌써 불행해지는 기분이군.”
“사람이 사는 곳은 어쩔 수 없어. 이해 좀 해라. 너 때문이 아니라 해도 곧 이사 갈 거야. 괜히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하자 루데릭은 더는 불만을 토하지 않았다.
“아이고, 좀 씻어야겠다.”
유선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유선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 집을 둘러보던 루데릭은 거주처에 대해서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루데릭은 책을 읽는 엘레노어로 시선을 옮겼다. 똑같은 처지였기에 그녀의 생각이 궁금해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자네는 여기에 있는 게 불만이 없는가?”
“불만?”
“싫지 않으냔 말이다.”
“유선 님의 집, 좋아!”
엘레노어는 불만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데릭은 질문을 바꿔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다른 건 싫은 점이 없느냐?”
“싫은 거? 없는데.”
“불만은 없을 수가 없다. 네 주인에게 결국 뭐든지 불만은 있겠지.”
루데릭이 악마처럼 꼬드겨 묻자, 엘레노어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음······. 있어, 있어!”
“뭐냐?”
“나면 안 줘.”
“······.”
김이 확 새게 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그게 나름대로 불만인지 그것에 대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영양이라는 거 골고루 안 먹으면 크은일! 난다고 하면서 나면 많이 안 줘. 유선 님이 나면만 많이 주면 좋을 텐데······.”
“······하아.”
루데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거주처에 대한 불만은 홀로 품었다.
삐리리리-.
유선의 바지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때마침 다 씻은 유선이 머리에 타월을 얹은 채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정유선 헌터님.
“······네, 안녕하세요?”
격식 있는 목소리가 코드 헌터 상황에 불렀던 직원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네, 지난번에 한 번 전화했던 국가 던전 관리청에서 전화했습니다.
맞았다. 유선은 따라서 정중하게 인사를 받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공적치에 관해서 정유선 헌터님과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눠야 해서 그렇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내일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음······.”
유선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