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17. 코드 네임: 어비스 (5)
그의 말에 잠깐 정적이 가라앉았다. 긴장감이 웃도는 공간 속에서 루데릭의 붉은 안광이 사라졌다. 눈을 감았다.
“맹세하지.”
그리고 말했다.
“나, 루데릭, 오늘부로 추방당한 악마로 눈앞의 인간을 주인으로 섬길 것이며, 그것은 서로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어질 것을 맹세한다.”
그 맹세를 받아들이는 순간, 유선의 왼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계약의 인장이 발동되어 빛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선은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대답을 건넸다.
“그 맹세를 받아들이지.”
환하게 빛나던 왼손의 빛이 약해져 갔다. 그리고 점점 형상을 띠면서, 곧 오른손처럼 검은색 문신이 남았다.
엘레노어와 계약했을 때와는 또 다른 인장이 왼손에 새겨졌다.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처음 이루어진 계약이었다.
-‘루데릭’을 사역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정신으로 처음 본 메시지. 그걸 보고 루데릭은 이제 유선, 자신에게 묶인 몸임을 확신했다.
“네 손으로 코어 파괴하고 싶다고 했지?”
충성을 맹세한 만큼, 그에 대한 보답으로 유선은 루데릭에게 발록의 코어를 넘겼다. 그가 하고 싶었던 복수를 실행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격하게 반응했던 것과 다르게 루데릭이 얌전했다. 그 코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게 주지 않아도 된다.”
“응?”
“그건 내가 내 동족들에게 인정받으려는 힘일 뿐. 돌아갈 곳이 없으면 그 코어를 내가 파괴하는 것은 의미 없다.”
모든 욕심을 버린 듯, 나지막이 말하는 루데릭. 유선은 그 코어를 다시 거둬들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그대의 말대로 그 아이에게 먹여라. 그대의 편으로 설 때, 후환을 남기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짓는 방법은 그 아이에게 주어 먹이는 것뿐이다.”
주인으로서 인정하며 유선이 가장 바라는 처리 방법을 알려 주었다. 유선은 다시 엘레노어에게 코어를 건네주었다.
“먹어도 된대.”
“응.”
그걸 건네받은 엘레노어가 알사탕처럼 입으로 던져 넣었다. 어금니 쪽으로 걸면서, 볼이 부풀어 올랐다. 그녀가 힘을 주기 시작했다.
투둑!
미약하게 깨지는 소리가 입안에서 울렸다.
***
발록. 대한민국의 재난이자, 5년마다 출몰하는 놈이다. 어마어마한 몸체와 위압적인 얼굴, 그리고 화염에 감싼 전신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어째서 하나도 죽지 않냐, 버러지들!
발록은 격분해 소리쳤다. 오늘을 위해서 발록은 뱃맨을 더 많이 준비하고, 힘을 키웠다. 비로소 이계의 틈 밖으로 나가 세상에 나갈 준비를 했건만, 몇 분이 지나도 헌터들은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지쳐 갔다. 그 누구에게도 큰 부상을 입히지 못한 채로 말이다.
발록의 생각과 다르게, 헌터들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모아서 싸우는 중이었다. 큰 부상자만 없지, 집중력과 스태미나가 한계에 임박했다.
“발록 이 새끼, 제대로 준비했구나.”
“보통 이쯤이면 쓰러져야 하는데······.”
“곧 있으면 끝날 겁니다. 발록도 이제 한계일 거예요.”
발록의 체력을 가늠하는 것은 그 전신에 감긴 화염이었다. 처음에 보았던 불과 다르게 점점 약해졌다. 그가 버틸 생명력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희망을 품던 찰나.
-세상으로 나가 모든 것을 쏟아부으려고 했건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화르르륵!
불길이 거세졌다. 상처 입고 쓰러져 가던 발록의 몸이 강화되었다. 마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듯한 변신이었다.
“뭐야?”
“어째서 이렇게?”
-계획 변경이다. 지금 네놈들을 잿더미로 만드는 데 모든 힘을 부어 주지! 그리고 사랑하는 세상 또한 헤집어 놔 주마!
발록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몸에 감긴 거센 화염이 손바닥 위로 모여들어 구체 하나를 만들어 냈다.
“공격! 공격!”
“저 공격을 기다리면 안 돼! 당장 녀석의 마법을 무효화시켜!”
헌터들은 원거리로 공격할 모든 수단을 이용해, 퍼부었다. 하지만 발록은 꼼짝도 하지 않으며 구체를 완성했다.
그의 몸집만큼 거대한 화염이 양손에 모여들었다.
“젠장! 모두 굴속으로 들어가! 안에서 충격을 대비해!”
뒤늦게 파 놓은 굴속에서 전력 손실을 최소화해 보려 했지만, 발록은 그들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완성된 화염구를 들며 인간들을 향했다.
-죽어라, 이 버러지들!
이렇게 외치며 팔을 내리찍으려던 순간,
-크아악!
발록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그리고 위협적이게 생긴 양손에 모였던 화염이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이게, 무슨······. 으아아악!
발록은 한 번 더 발작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생긴 변화를 알아차렸다.
-설마! 루데릭이 내 생명에 손을 댔단 말인가! 이럴 수는······!
제힘을 보이겠다던 발록이 급하게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공격을 대비하려던 사람들은 발록의 행동에 의문점을 남겼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죽이려고 달려들던 녀석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회광반조라는 말이 있잖아요. 설마 자기의 모든 힘을 쥐어짜 내다가 쓰러진 거 아닐까요?”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게 뭔가 더 다급해서 내려간 것처럼 보이는데······.”
발록이 악마어로 계속해서 중얼거렸기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황당한 상황을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
한편 그 밑에서 유선이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잘 안 부서져?”
엘레노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힘주다 고개를 끄덕였다.
“으······, 그래드 브스질 그 가태······.”
부서질 것 같다는 말인 듯했다. 엘레노어는 열심히 입안에 굴려서 깨져 가는 코어를 씹었다. 루데릭이 뭔가를 감지해 유선에게 말했다.
-좀 더 빨리 깨부숴야 할 것 같군. 벨제브가 와.
곧 그 감지는 유선의 귀에서도 확인했다. 정확히 통로에서 느껴졌다.
쿠웅 쿠구구구구궁!
화염을 전신에 두른 뭔가가 날아왔다. 메테오 같은 마법인 줄 알았지만, 가까워질수록 발록의 형상과 가까움을 알았다.
까득!
-크아아!
엘레노어의 입안에서 한 번 더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힘차게 날아오던 발록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유선이 있는 쪽으로 끌려왔다. 완전히 가까워져서야 발록임을 확신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오려고 자신의 몸을 축소한 것이다.
까드득!
금이 가는 소리가 한 번 더 울리자, 발록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이곳에 발을 들인 인간이 있다니! 어떻게 이곳을······!
“어떻게겠나, 형제여?”
그에 대한 해답을 아는 루데릭이 발록에게 물었다. 발록은 루데릭을 향해 보았다.
까드득!
-크아아악! 루, 루데릭······. 네놈이!
분노에 찼던 루데릭의 몸체에서 글자들이 사라졌다. 증오, 억울함, 분노, 모든 글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글자가 가장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행복이었다.
“캬하하, 형제여! 나를 속이고 내 육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던 나의 형제여! 나의 최후를 지켜보겠다고, 네 옥좌를 끌고 왔건만, 그 옥좌 위에서 너의 최후를 지켜보는 입장이 되었구나! 비록 내 손으로 죽이지 못했지만, 그래도 네 파멸이 나의 행복이 되었다!”
-어, 어리석은 인간 따위와······ 손을 잡다니······!
“아니. 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게 아니다, 벨제브여.”
루데릭은 후회가 없다는 듯 발록에게 말했다.
“이거로 확신했다. 우리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달이 지고, 태양이 뜰 차례다, 벨제브여. 그늘에서 서서히 죽느니, 떠오르는 태양 속에서 화려한 죽음을 맞이하겠다.”
-그런 화려한 죽음은 네게 없을 것이다!
발록이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 그대로 루데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의 끝은 여기로 정했다, 루데릭!
발록이 큰 손으로 루데릭의 몸을 덮쳐 왔다. 하지만 그것도 그저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한 소녀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작은 주먹을 내질렀다.
“스능!”
파앙!
혼신의 일격을 담은 손이 멈췄다. 그리고 몸도 멈춰 섰다. 온몸에 두르던 불꽃이 이제는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녀의 주먹에 모든 힘을 잃고 말았다.
까창!
그리고 엘레노어가 문 코어 구슬이 마침내 깨졌다.
-아, 아······. 나의 끝이 어찌······. 이런······.
발록의 육신이 그대로 한 줌의 재로 변해 사라졌다. 제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국가 재난이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쿠르르릉!
동굴 전체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굴의 주인이 죽어 버렸으니 형태를 잃어 가는군.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매몰될 게야.
“그래, 빠져나가야겠네.”
유선은 다급한 목소리로 루데릭에게 달려갔다. 그의 몸을 꿰뚫는 수많은 무기를 보며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걸 언제 다 뽑아서 널 데려갈지가 문제지만······.”
“그럴 필요 없다. 창 하나만 뽑아라. 그러면 나머지는 알아서 한다.”
루데릭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유선은 수많은 창 중 가운데를 잡아 뽑았다. 견고하게 박힌 줄 알았지만, 그것은 유선의 힘으로도 쉽게 뽑혀 나갔다.
루데릭의 말대로 그는 창 하나를 뽑자마자, 제힘을 되찾은 것처럼 꿰뚫은 무기들을 모조리 떨쳐 버렸다.
와장창! 투두둑!
루데릭이 벽에서 빠져나오자, 그와 동시에 잔해만 떨어지던 움직임이 이젠 커다란 파편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수단은 있지?”
“내 능력을 얕보지 마라. 그것도 생각 안 해 놨는 줄 알겠느냐?”
흐물흐물하게 녹은 루데릭의 형체 속에서 커다란 뭔가가 펼쳐졌다. 커다란 두 쌍의 날개였다. 루데릭이 녹아 가는 팔로 유선의 팔을 붙잡고 엘레노어를 안아 들었다.
“인간, 아니 내 주인.”
“왜?”
주인이라는 호칭에 유선은 살짝 당황했다.
“지금부터는 좀 아플 거다.”
“네?”
“알려 줬으니, 그 꼴사나운 비명은 지르지 말도록.”
말하기가 무섭게 루데릭의 날개가 날카롭게 섰다.
파아앙!
그리고 소리를 꿰뚫는 속도로 긴 통로를 향해 날아갔다.
***
“모두 줄을 맞춰서 탈출해 주십시오!”
“지금 다급하게 나가면 오히려 위험해집니다!”
상황이 끝나고 헌터들은 재빠르게 굴속에서 탈출했다. 윤수현 대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한 명씩 확인했다. 물처럼 밀려 나오던 헌터들이 점점 숫자가 줄어들었고, 낙오자가 있는지 주변을 수색하던 헌터마저 빠져나왔다.
“마지막입니까?”
“네, 우리가 마지막입니다.”
수현 대장은 마지막으로 나온 헌터를 보고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유선과 엘레노어 두 명이 아직 안 나왔기 때문이다.
‘젠장, 어디로 갔지?’
이계의 틈이 점점 닫혀 갔다. 안에 있던 안전장치로 일단은 이계의 틈을 유지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더 오래 벌리면, 이계의 틈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사령관님! 어떻게 합니까?”
윤수현 대장은 고민만 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렸다.
“어쩔 수 없습니다, 닫으십시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뭐야? 누가 외부인을 들였어?”
차기율이었다. 그가 흥분한 채로 윤수현 대장을 향해 걸어왔다.
“틈을 닫는다니! 아직 형님이 나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헌터들의 귀감입니까?”
멋대로 헌터들의 구역으로 들어온 기율이 윤수현 대장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윤수현 대장도 좋아서 틈을 닫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더 벌릴 수는 없습니다. 이건 한 명의 공격대장으로 있을 때와 다릅니다. 용감하고 과감한 선택을 내리기엔 너무 많은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자신이 공격대장으로 있었을 당시에 보였던 문제와는 달랐다. 그 틈으로 죽지 않은 발록이 튀어나온다면, 자신의 문제를 넘어서 나라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여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뭐가 걱정이란 말입니까? 장비 유지비가 문제입니까? 그깟 유지비라면 제가 지급하겠습니다! 제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유지할 테니까 그 틈을 유지하십시오!”
기율의 생떼를 받아 줄 만큼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 우리는 국민이 최우선입니다. 안타깝지만 포기하십시오.”
“안 된단 말입니다! 당장 계속 유지하십시오! 유지하라고 이 개 같은 새끼들아! 형님이 안에 있어!”
요원들이 애써 기율을 막았다. 유지 장치는 꺼졌고 틈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유선이 달려올 거로 믿었지만, 신은 매정하게 기율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기율은 복받쳐 오는 감정에 그 틈을 향해 소리쳤다.
“형니이이이임!”
쒸이이익!
퍽!
좁아지는 틈새로 뭔가가 날아들었다. 그게 이계의 틈 정면에 서 있던 기율의 머리에 부딪혔다.
“쿠엑!”
“크악!”
절규하던 기율의 머리를 박더니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구급차 불러, 구급차!”
“도대체 뭐가 날아왔어?”
기율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기율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얼굴을 향해 날아든 물체에 관심이 쏠렸고, 그 머리를 박은 형체는 5m 정도 떨어진 장소에서 쓰러졌다. 그것은 자신의 이마를 잡으면서 신음을 흘렸다.
“하으으으······ 이런 씨부럴······.”
유선이었다. 그가 좁은 틈으로 귀환했다.
그것도 꼴사납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