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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코드 네임: 어비스 (3) (2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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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코드 네임: 어비스 (3)

유선은 머리가 아파 왔다. 그가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목소리를 들으면 감이 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끌려 의심하지 않고 믿기는 힘들었다. 감언이설에 이끌려 실수하면 큰일이었으니까.

-내 목소리를 들은 시점부터 루데릭의 손바닥 안에 있는 인간일 뿐이다. 순순히 네 운명을 받아들여라.

“미안한데 좀 닥······ 조용히 좀 해 볼래?”

재촉하는 말투에 짜증이 나 악마에게 거칠게 반응했다. 유선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나온다면, 자네에게 도움을 주지. 자네에게 맹세하마.

“맹세?”

-악마는 맹세하면, 그 맹세를 절대로 어길 수 없다. 그러니 여기서 맹세하지. 그대에게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말이다.

단순한 말일 수도 있었다. 베일을 벗길 수 없는 목소리에서 그래도 감정은 눈치챘다. 이건 진실을 말하는 소리였다. 맹세는 지금 끝난 상태였고, 유선은 다시 루데릭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정체가 뭐냐?”

-말했지만, 나의 이름은 루데릭. 어둠을 먹고 자라났으며, 인간들의 그늘 속에서 지식을 탐구하고, 초월했으며, 내 동족에게마저 위협으로 여겨져 갇힌 악마이다.

상세하게 자신의 처지까지 말해 주었다. 유선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이 거래로 내가 얻는 게 뭐지?”

-자네들을 괴롭히는 벨제브의 영원한 안식, 그리고 인간들의 안전.

“내가 너한테 해 주었으면 하는 건?”

-약간의 부탁과 무력. 사실 옆에 있는 꼬마한테 부탁하는 거나 다름없지.

“그걸 통해서 얻고 싶은 게 뭐냐?”

-복수.

적개심이 담긴 목소리.

-그리고 형제라 여긴 동료가 맹세를 어긴 것에 대한 최후.

그 감정이 얼마나 강한지 한순간 자신을 향한 건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유선은 루데릭의 목소리에 긴장하며 그에게 재차 물었다.

“그게 정말로 내 손으로 가능한 일이냐?”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교섭은 의미가 없을 테지. 저 아이의 힘을 빌린다면 분명히 금방 해낼 것이다.

유선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결심이 선 듯 루데릭에게 말했다.

“좋아, 거래하자.”

-그래! 드디어 했군! 수락해 줘서 고맙다, 인간.

유선은 기뻐하는 모습이 영 꺼림칙했다. 하지만 이미 거래는 시작되었기에, 유선은 발록을 쓰러트리려면 뭘 해야 하는지 루데릭에게 물었다.

“뭘 하면 되지?”

-우선 계획을 진행하기 전에 자네에게 ‘약간의 부탁’이자 인간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방법을 먼저 말하지.

“말해 봐.”

-그 꼬마에게 이렇게 말해라.

“어떤 말?”

-카, 투스, 페르아.

“카, 투스, 페르아······?”

언뜻 들어도 다른 세상의 언어 같았다.

“이게 뭐지?”

-마법 주문이다. 하루 동안 인간들이 가진 모든 능력을 이끌어 내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들조차 다시 아물게 할 주문이지. 이게 인간들이 벨제브의 공격에서 살 유일한 방법이다.

유선은 그의 말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서 네 부탁도 있다는 말인데, 이 치유 마법으로 네가 바라는 게 도대체 뭐지?”

그러자 루데릭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 마법은 마나를 모두 소진하는 축복 마법이다. 내가 바라는 부탁은 저 꼬마의 마나를 전부 잃는 것이다. 마법을 쓸 수 없도록 말이야.

“뭐?”

유선은 그 말에 격분해 소리쳤다.

“지금 엘레노어의 마나를 전부 잃게 만들라는 말이냐?”

-진정해라. 그대가 나를 의심하듯 나도 그대를 의심한다, 인간. 이건 나를 위협할 수단을 모두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맹세대로 거짓말한 적 없다.

루데릭은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대가 내게 적대감을 드러낼 이유는 없다. 마나를 모두 소모하는 마법이라 해도 어차피 하루뿐이다. 그 후에는 다시 원 상태로 돌아올 것이다. 거기다가 네 꼬마가 다치거나 무리 가는 일도 없을뿐더러, 걸어 준 마법으로 이제 네가 데려온 인간들이 죽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마나가 없다 해도 그 힘으로 인간들과 함께 싸운다면 분명히 벨제브는 안전하게 쓰러트릴 수 있다. 다 생각하고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

그전까지 엘레노어가 없이도 발록을 공략해 왔던 사람들이다. 엘레노어가 축복만 한다면, 분명히 이번도 능숙하게 넘어갈 것은 확실했다.

거기다가 루데릭은 맹세대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충분히 숨길 불편한 사실도 말이다. 유선은 엘레노어에게 말했다.

“엘레노어.”

“응?”

“카, 투스, 페르아······라는 걸 해 줘.”

“카, 투스······ 페르아?”

엘레노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단어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모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카, 투스, 페르아······. 카 투스······. 아!”

엘레노어는 기억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동굴 밖으로 나가더니 하늘을 향해 양팔을 뻗었다.

“카 투스 페르아!”

엘레노어가 뻗어 올린 손을 중심으로 환한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또 다른 태양이 깃든 것처럼 눈부시게 밝아졌다.

“이게 무슨 빛이에요?”

“무슨 마법을 쓰는 거야?”

뱃맨을 해체하던 헌터들은 엘레노어가 만들어 낸 빛에 주목했다. 빛은 한참 동안 엘레노어의 손에 모여들었고, 태양처럼 밝게 빛나던 것들이 터져 나갔다.

파아앗!

“꺄악!”

“으앗!”

동굴 전역을 비추는 섬광이 터졌다. 한순간 밝아져 시야를 가리던 빛이 멎어 들고 잔잔한 빛 가루가 남았다.

그 빛은 단순히 효과로만 그치지 않고 전역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몸에 그 환한 빛 가루가 녹아들기 시작했다. 빛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상태에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챘다.

“으으······, 다친 사람 있어?”

“그냥 단순한 섬광······. 어라, 뭔가 이상한데?”

겁먹던 사람들이 자신의 몸 상태가 바뀐 것을 하나둘씩 눈치챘다.

“뭐야, 몸이 가벼워졌어?”

“힘이 강해진 것 같아요!”

“세상에, 대체 이게 뭐야!”

모두가 자신의 상태를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가져온 UST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스탯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선배, 지금 모든 스탯이 올랐어요! 그것도 1.5배 가까이요! 피통은 거의 두 배는 찼어요!”

“뭐라고? 정말이야?”

“네, 못 믿겠지만 사실이에요! 선배도 한번 확인해 보세요!”

“UST, 우리 중에 UST 가져온 사람 없나?”

한 사람을 시작으로 저마다 UST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말대로 모두 능력치가 대폭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여태껏 클레릭 계열 중에서 이만큼 힘을 끌어낸 사람은 없잖아요?”

“단일 효과 마법도 이것만큼 끌어낸 사람은 없을걸?”

단일 효과 축복 마법보다 더 강한 마법이 광역 축복이었다. 그들은 평소에 감히 상상도 못 해 보았을 체험이었다.

‘대단하네.’

유선도 톡톡히 체험 중이었다. 특성에서 마법이 괜히 있던 게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녀가 여태 마법을 쓰지 않았을 뿐,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적응도가 올라갑니다.

유선의 앞에 메시지 창이 떴다. 엘레노어에 대한 적응도를 확인하자 3%씩이나 오른 걸 보았다. 엘레노어에 대한 적응도. 그녀에 대한 이해가 이 마법을 통해서 많은 걸 알려 주었다는 뜻이었다.

마법을 퍼트린 엘레노어는 유선에게 달려가며 말했다.

“잘했지?”

“응? 아, 응, 응. 잘했어.”

유선은 엘레노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유선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마법이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고, 고위급 마법도 부담 없이 한 번에 사용한다는 정보로 기억했다.

유선은 축복 마법이 전역에 퍼진 걸 보며 루데릭에게 말했다.

“말대로 카 투스 페르아라는 걸 했다. 이제 어떻게 하는지 알려 줘. 너를 위협할 수단은 없어졌어. 그다음은?”

-그대가 보는 동굴 중 하나에 환영으로 세워진 벽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왔던 벽을 하나씩 뒤지다 보면, 분명히 작게 그림 문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 문자에 손을 올리면 자네랑 그 아이 둘이서 올 길이 만들어질 거다.

“어떤 동굴인데?”

원형 다리 범위에서 뚫린 구멍은 8개였다. 깊이는 대강 50m로 하나씩 뒤지면 시간이 꽤 걸릴 게 분명했다.

-그건 그대가 할 일이다. 어차피 전부 똑같이 생겨서 자네에게 말해 보아야 의미 없을 것이다.

알아서 하란 말이었다. 능력 범위 내가 아니라기에 유선은 어쩔 수 없이 동굴을 하나씩 뒤지기 시작했다.

“유선 님, 뭐 찾아?”

“벽에 그림을 찾아. 엘레노어도 도와줄래?”

“응!”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쪽 벽으로 달려갔다. 숨바꼭질할 때처럼 들뜬 얼굴이었다. 그녀와 달리 유선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뱃맨이 다시 올라옵니다!”

“도대체 몇 마리야? 세 번째 웨이브라니!”

세 번째 웨이브가 시작됐다. 헌터들은 가벼워진 몸으로 뱃맨들을 다시 사냥하기 시작했다. 몇 차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유선은 조금이라도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네 번째 동굴로 들어가 벽을 관찰할 때, 상황이 종료되었는지, 뱃맨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유선 씨, 어디에 계신가요?

동굴을 뒤지던 중, 무전기에서 윤수현 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윤수현의 공격대 소속이라, 자신의 대원이 어디 있는지 확인할 생각인 것 같았다.

유선은 얼른 대답했다.

“저 지금 동굴 안에 있습니다.”

-동굴 안이요? 거기는 왜 계세요?

“아 그게······.”

-비밀로 해라.

사실대로 말하려는 찰나, 귀신같이 루데릭이 속삭였다. 유선은 윤수현 대장에게 거짓말로 대답했다.

“엘레노어가 지금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데려오려고 안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혹시 뭐 곤란한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잔챙이들 같은 경우에는 유선 씨처럼 힘을 아끼는 편이 좋죠. 아이를 찾으시면 우리가 있던 곳으로 돌아와 주세요.

“넵.”

그렇게 무전이 끊어졌다. 유선은 다시 동굴 탐사에 집중했다. 반대편에서 같이 문자를 찾던 엘레노어가 소리쳤다.

“유선 님, 찾았어!”

“오, 정말이야?”

“응, 이거, 이거!”

엘레노어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벽 하나를 가리켰다. 루데릭이 말한 그림이 분명했다.

유선은 그림 문자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잠시 뒤, 형상을 유지하던 벽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지만, 손전등이 있었기에 그거로 일단 시야를 확보하기로 했다.

“찾았어. 이다음에 뭘 하면 돼?”

-걸어라. 통로를 따라 그저 걸으면 된다. 자네는 이제 어비스라 부르는 밑바닥까지 내려올 거다.

“그래.”

-그전에 꼬마도 함께 와야지 않겠나?

“꼬마? 엘레노어?”

그러고 보니 소맷자락을 잡고 걸어오는 엘레노어가 보이지 않았다. 유선은 고개를 돌렸다.

“엘레노어?”

그녀가 움직이지 않으며 유선을 노려보았다.

“부으······.”

엘레노어가 뾰로통한 얼굴로 있는 게 호감도가 떨어질 것 같은 신호가 보였다.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뜨는 걸 보았다.

-나 잘했는데······.

-엄청 잘했는데······.

대번에 감을 잡았다. 유선은 그녀에게 다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잘했어, 잘했어. 우리 엘레노어뿐이다.”

칭찬해 주자 그제야 표정이 밝아지고 머리 위에 뜨던 생각이 사라졌다. 유선은 흡사 강아지를 다루는 것 같아 기분이 미묘했다. 그제야 엘레노어는 다시 유선의 옆에 붙었다.

-꼬마가 마치 강아지처럼 행동하는군. 사랑받고 싶어 안달이라니! 참으로 기묘한 일이로다. 아이처럼 행동한다는 게 말이야.

“시끄러워.”

루데릭이 키득거리는 걸 유선은 무시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유선은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그곳에는 경사도 없고, 계단도 없었다. 그냥 일직선으로 파인 동굴이었다.

‘이 길로 가면 어비스가 나오긴 하나?’

반신반의하며 걸어갔고, 그 끝에는 막다른 길이 있을 뿐이었다. 손전등으로 벽을 비춰 보지만, 그림이 있지도 않았다. 유선은 루데릭에게 물었다.

“뭐야? 설마 길 잘못 든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없다. 길은 정확해.

“근데 막다른 길뿐인데?”

-그럼 자네가 잘 찾아온 거다.

“잘 찾아왔어?”

이런 막다른 길에?

“이제 뭐 하는데?”

-더 할 필요 없다. 이제 곧 자네는 떨어질 거다.

“······뭐라고?”

-죽지는 않을 테니, 걱정은 마라.

“너 지금 뭐라······ 아아아아아악!”

말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유선이 서 있던 바닥이 마법처럼 사라지고, 중력에 이끌린 채로 그대로 수직 낙하 중이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아아!”

그 대신 동굴 안을 울리는 긴 비명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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