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15. 강해져야 한다! (1)
F급 던전이라 그런지 완전히 평원이었다. 주변에 눈에 띄는 몬스터들은 없고, 햇볕도 따갑게 비치는 평범한 평원이었다.
말 그대로 소풍 가기 딱 좋은 장소이자, 날씨였다. 엘레노어는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힘껏 외쳤다.
“사냥!”
완전히 들뜬 그녀의 머리 위에 뜨는 문구도 가관이 아니었다.
-얼른 사냥할래!
엘레노어는 들뜬 표정으로 평원을 누볐다. 아직 몬스터는 만나지 못했는데, 의욕이 먼저 앞섰다.
유선은 그런 엘레노어에게 불행한 소식을 가져다줘야 해서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엘레노어.”
“응?”
“엘레노어는 잠깐 얌전하게 있어 줘.”
“사냥 안 해?”
“엘레노어는 잠깐만 안 할 거야.”
그러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흡사 장난감을 주었다가 뺏은 표정이었다.
“왜에?”
“오늘은 내가 사냥 좀 하려고 그래. 엘레노어는 미안하지만, 사냥 안 하면 안 될까?”
엘레노어는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입이 살짝 튀어나오면서 중얼거렸다.
“소풍인데······.”
-싫은데.
-사냥하고 싶어.
-엘레노어의 스트레스가 올라갑니다.
그녀의 생각들이 정신없이 폭격해 온다. 들어오기 전 수치는 12%. 아마 이 한마디로 20% 정도까지 올랐을 것이다.
“한 번만 이해해 주지 않을래? 나도 사냥이란 게 해 보고 싶으니까. 우리 엘레노어는 그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그렇지만······.”
“응?”
“유선 님은 약한걸.”
“······.”
뜬금없이 팩트로 치는 엘레노어에게 한 방 먹고 말았다.
“하하, 약하니까 좀 더 강해져야지. 엘레노어만 의지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아냐! 내가 지켜 줄 거야!”
“······뭐?”
“유선 님은 내가 지켜 줄 거야! 평생!”
엘레노어의 말이 한순간에 심장에 꽂히는 듯했다. 사랑받는다는 기쁨과 어린애보다 못하다는 자괴감이 섞인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말은 고마워. 하지만 나도 마냥 놀 수는 없으니까······. 미안해, 좀 부탁할게, 응?”
“부으으······. 알았어.”
엘레노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허락해 주었다. 사냥을 못 하게 한다는 건 여전히 불만인지, 머릿속에 ‘사냥하고 싶어’라는 말이 요동쳤다.
유선은 애써 못 본 척하기로 했다. 그는 일정 지점까지 가서 중계기를 설치하고, 평원을 탐색했다.
멀지 않은 장소에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저게 유선이 상대할 첫 사냥 대상이었다.
유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했다. 가장 약한 몬스터이기도 하지만 유선의 첫 상대인 만큼 어떤 실력을 갖추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RPG 게임에서 간간이 보는 토끼들은 언제나 저렙 몬스터이고, 데미지도 사실상 없다시피 한 동물이고 단순한 경험치로 인식된다.
하지만 이 토끼는 다르다. 세간에는 이 토끼들을 ‘만렙 토끼’로 칭했다.
그 별명이 붙여진 계기는 어쩌면 농담일지도 모르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뉴스와 신문에도 실린 유명한 사건으로 시작했다. 사건은 이러했다.
처리하지 않은 F 등급 던전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몬스터 한 마리가 동물원에 있는 모든 동물에게 도장 깨기처럼 하나씩 부숴 버리고 가운데에서 우뚝 군림한 적이 있었다. 하룻밤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육사들이 출근할 당시엔 모든 동물이 벌벌 떨어, 이걸 비상사태로 착각해 A급 헌터들을 긴급 소집. 헌터들은 꿀 같은 휴식 중에 날벼락을 맞으며 부랴부랴 달려와 몬스터를 소탕하려고 모였다.
당연히 거대 몬스터에 보스급인 몬스터라고 생각해 중무장하고 달려온 헌터들은 어이없는 상황을 마주한다.
하룻밤에 모든 동물을 제패시키던 동물이 바로 이계의 틈에서 나온 토끼였다.
아주 손쉽게 처리해 냈고, 동물원을 공포로 몰게 한 정체가 드러나면서 ‘만렙 토끼’라고 유명해졌다.
헌터들의 입장에선 언제나 쉬운 동물이지만, 민간인들에겐 벅찬 동물. 유선은 그사이에 낀 스펙을 가졌기에, 시험 삼아 검을 들었다.
‘과연 만렙 토끼도 잡을 수 있을까?’
앞으로의 인생을 판가름하는 요소처럼 불안했다.
-행복.
행복하게 있는 토끼 뒤편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교감으로 만들어진 스킬, 마인드 워드에 변화는 아직은 없었다.
숨소리마저 죽이며 다가갔지만, 토끼는 넓은 귀로 작은 발소리를 감지했다.
-감······.
‘감지’라고 인식하기 직전이었다. 유선 쪽은 이미 거리가 충분히 좁혀졌기에 인식하기 전에 숏 소드로 토끼를 내리찍었다.
-끼익!
“젠장!”
검이 토끼에게 적중했지만, 토끼가 재빠르게 검의 궤도에서 벗어나려 해 치명상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데미지를 입은 토끼가 유선을 노려보았다.
-분노!
분노라는 글자가 새빨갛게 물들면서 동시에 느낌표가 하나 붙었다. 만렙 토끼가 지그재그로 달려와 유선을 향해 반격했다.
“커헉!”
만렙 토끼가 괜히 만렙 토끼가 아니었다. 폴짝 뛰어오르자, 자신의 몸을 회전시켜 다리를 유선을 향하더니, 그대로 세게 걷어찼다.
데미지를 10% 감량시키는 팔찌이기 때문에, 데미지가 생각처럼 많이 줄어들지 않았다.
“이 자식이!”
유선은 독기가 들어 다시 한 번 더 토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제대로 적중하지 않아 데미지만 조금 입혔다.
-끼익!
“쿠헉!”
한 번 더 전력으로 옆구리를 걷어차는 놈. 옆구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유선 님아.”
“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가 꼭 잡을 테니까!”
유선은 걱정스레 보는 엘레노어의 난입을 제지했다. 아직 버틸 만했다.
‘저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잡고 말리라!’
독기가 바짝 뜬 유선은 다시 검을 잡았고, 토끼를 향해 돌격했다. 토끼도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다시 돌격해 왔다.
그렇게 싸움이 끝났다. 처절한 사투 끝에 유선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후우, 후우······.”
유선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토끼 몸에 박아 넣은 검을 거두었다.
“잘 싸웠다, 이 묘놈아······.”
욱신거리는 몸이 얼마나 자신에게 처절한 사투였는지 알려 주었다.
‘이렇게 한 마리씩 잡다 보면 뭐라도 생기지 않을까?’
가져온 포션도 꽤 있다. 수익을 많이 바랄 수는 없겠지만, 제 몸을 지킬 실전 경험을 쌓았다.
‘한 마리씩 잡으면 내가 유리하니까 한 마리씩 잡아 보자.’
유선은 안일하게 생각하며 평원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유선만 그런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평원의 모든 만렙 토끼가 유선의 생각에 동의했다.
-동족.
-죽음.
-분노.
-증오.
조금 전 사투가 시간을 길게 끌면서 지켜본 탓에, 쓸데없이 이 토끼들을 자극해 버렸다. 동시에 달려들면 쪽 수에서 한참 밀리는 유선이 당할 것이고, 뒷발길질만 해도 분명히 죽을 것이다.
-고오오!
위기의 상황인 그때, 한순간 뒤에서 뭔가가 튀어나오는 걸 느꼈다. 과연 범접할 수 없는 뭔가가 유선의 살갗을 파고들어 오는 것 같았다.
아니 파고들어 오다가 다시 사라졌다.
정확히, 토끼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꽁무니가 빠질 듯이 도망치기 시작할 때 사라졌다. 유선은 뒤에서 느껴진 칼날 같은 감각에 고마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 기운은 대체······?’
유선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는 아까 전의 살기와는 전혀 먼 가련한 소녀가 서 있었다. 엘레노어였다.
“방금 엘레노어가 했어?”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전혀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엘레노어의 특성에 <살기 Lv. 5>가 있었다. 그녀가 사냥할 당시에는 전혀 스킬을 안 사용하는지라, 의식하지 못했지 상상을 초월하는 특성들을 가진 소녀였다.
“살기라······.”
특성에서 파생된 스킬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스킬은 아직, 으로 떠서 문제지만.
“하지만 이거······. 트레이닝 방식에서 본 적이 있는데.”
유선은 언제 한 번 들어 본 트레이닝 방식을 떠올렸다.
요약하자면, <살기>를 통해서 <강인> 특성을 얻는 특훈이었다.
강인도가 생성되지 않은 초짜들을 위해서 일부러 고 레벨 몬스터와 눈을 마주치게 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혹독한 트레이닝이었다. 하나 특훈이 위험한 만큼 성과가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특훈 자체가 위험하므로 함부로 헌터들에게 시키지 않았다. 저 등급 던전에서는 어떻게든 굴려 써먹으면 되기 때문에 스스로 지원하지 않는 이상, 회사의 전력을 위해 건드리지 않았다.
‘해 볼 가치가 있다.’
<살기> 레벨이 5라면 리스크가 크겠지만, 그만큼 다시 돌아오는 것이 있을 것이다.
살기라면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엘레노어.”
“응?”
“그거 나한테도 한번 해 보겠어?”
“그거?”
엘레노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토끼들을 쫓아낼 때 쓰던 거, 뒤에서 막 튀어나오고······. 했던 거 말이야.”
“아, 알아!”
뭔지는 감을 잡았지만, 엘레노어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안 돼······.”
“왜?”
“유선 님, 아파해.”
분명히 다친다는 의미이다. <강인> 특성이 없는 놈이니 분명히 살기에 맞으면 오는 부작용을 아는 것이다.
“괜찮아. 나는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까. 분명히 괜찮을 거야.”
“그래도······.”
“만약 나중에 엘레노어가 없어서 우왕좌왕하면 어떻게 하겠어? 그때가 되면 꼼짝도 못 할 게 분명해. 그래서 엘레노어한테 부탁하는 거야.”
“······.”
엘레노어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했다. 유선은 미소 지어 보이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분명히 견뎌 낼 테니까 한번 해 줄 수 없을까?”
“······.”
엘레노어는 잠깐 망설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엘레노어는 마지못해 그의 바람을 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