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2. One Punch girl (1)
“후아!”
유선은 그간 쉬지 못했던 숨을 몰아쉬듯 숨을 들이켰다. 단단하게 들어갔던 어깨에 힘이 빠지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옛날 성격이 나와 버렸네.”
홀가분했지만 불안함도 없지 않았다. 헌터가 사람을 폭행했다는 건 중죄 중 중죄이다. 상대는 아무래도 유니콘 컴퍼니에 몸을 담그는 사람이다 보니 분명히 빵빵한 스펙으로 무장한 변호사들을 데리고 올 것이다.
“그래도 뭐, 고소하려 들거나 보복하려 들면 터트려 버릴 거리는 많으니까.”
유선이 그 상황을 대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조금 전 구타를 제외하고는 모든 상황을 휴대폰으로 녹음해 놓은 상황. 그간 사역수를 매매하고 다녔다는 것, 회사 내부의 테이머가 그 사역수를 다룬다는 사실도. 기밀을 모두 자기 입으로 까발린 데다, 음질도 아주 좋았기 때문에 조작된 정보이니 뭐니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돈으로 유혹해서 내 새끼를 팔라는 말에 울컥했다고 하면 동정 여론을 몰아 유선 쪽으로 기울기 충분했다.
‘좀 더 패버릴 걸 그랬나······.’
그래서인지 유선은 분이 삭이지 않았다.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한 것도 모자라서 돈으로 쉽게 매수될 거로 믿은 것이 명백히 자신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마음 같아선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박차고 나간 문 사이로 엘레노어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그냥 걸어서 나올 애가 벽에 몸을 가리다니.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엘레노어?”
“유선 님아······.”
-무서워.
그녀의 머리 위에 뜨는 속마음이 크게 보였다. 그녀가 처음 보인 공포의 감정이었다.
진종오 과장의 몰골을 보고 겁을 먹지는 않았다. 그녀는 유선의 분노 섞인 목소리, 그리고 차마 감추지 못한 표정을 보면서 겁을 먹었다.
유선은 미안한 한편, 한 번 더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저게 어떻게 봐서 괴물 새끼야?’
유선은 엘레노어를 EX 등급 판정을 받은 괴물로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로 보일 뿐이었다.
유선은 얼른 표정을 감췄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식혀서 다시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어디서 무서운 걸 봤어? 왜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짓지?”
“화······났어?”
유선은 경계하는 엘레노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엘레노어 때문에 화난 게 아니야. 남은 생각 안 해 주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화난 거야. 그런 사람한테는 화내야지 자기가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화낸 거야.”
그러자 겁먹은 표정을 짓던 엘레노어가 벽에서 나와 작은 두 손을 유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화내면 안 돼.”
마치 반죽하듯 얼굴을 만지려는 게 얼굴 가죽을 뜯을 생각인가 싶었지만, 그게 웃는 얼굴로 만들려는 의도임을 알았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떼어 내며 미소 지었다.
“자, 자. 웃을게. 엘레노어한테는 화 안 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지?”
“응.”
미소를 지어 보이자,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겁먹은 표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유선은 엘레노어를 데리고 협회장실에서 나왔다. 다급하게 달려가는 진종오 과장을 본 협회장이 뒤늦게 돌아와 유선과 마주쳤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 젖은 와이셔츠가 눈에 띄었다.
“아, 저, 정유선 헌터님, 이야기는 어떻게······ 히익!”
유선은 엘레노어 모르게 인상을 쓰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경고가 귓속으로 파고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유선은 협회장 옆을 지나자마자 다시 엘레노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얼른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오늘 뭐 먹고 싶어?”
“나면!”
늘 먹던 거로 같은 대답이었다. 유선은 그놈의 라면은 도대체 언제 질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서울 내는 여전히 매일 수십 개 던전이 생겨났고, 그중 절반은 발현된 날짜에 공략을 완료했다. 그들의 목적은 언제나 돈이었다.
어김없이 돈을 벌려고 한 공격대가 던전을 진입하기 전, 최종적으로 물건들을 점검했다.
검사 후임은 자신의 선임 상태를 보고 달라진 것을 느껴 말을 걸었다.
“선배, 무기 바꾸셨어요?”
선임은 알아봐 주는 게 고맙다는 듯이 으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정비 보러 갔는데, 더는 가망이 없다더라고. 그래서 C 클래스로 바꿨어.”
“오, 메이커예요?”
“우리 주제에 무슨 메이커냐? 신X동에 있는 무기 장인 점포에서 샀어.”
“되게 예쁜데. 메이커인 줄 알았어요.”
“은근히 장인 점포 물건들이 좋다니까. 날도 잘 서고, 경도도 좋고, 무게 조절도 잘해 주고 말이지.”
“헤에, 뭐, 저는 메이커 말고는 관심 없는지라 어찌 됐든 상관없어요. 오늘 시간 있으시면 같이 밥이라도 먹으러 가실래요?”
“좋아. 근처에 백반 맛있게 하는 곳 아는데 거기로 가자.”
백반이라는 말에 후임은 인상을 찌푸렸다.
“으엑, 무슨 백반이에요? 무슨 할아버지 같은 발상을 하시네, 돈도 잘 버는 사람들끼리······. 오랜만에 한우 갈비나 먹으러 가요.”
“거절한다. 형은 돈 아껴야 해. 이거 산다고 돈 엄청 깨졌어. 너 인마, 선임으로서 조언하자면, 계속 아끼고 돈은 무기나 방어구에 투자해 줘야 해. 나중에 돈 없으면 후회한다?”
금전 문제를 아직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는 후임이 어깨를 들썩였다.
“아직은 제 피지컬이 받쳐 주니까 상관없어요. 무기보단 당장 차나 좀 바꾸고 싶다는 생각만 드는데요?”
“어휴, 노답 같으니.”
선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는 간섭하려 들지 않았는데, 어차피 실력만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탐사 물자를 확인하던 중에 누군가가 뒤늦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공격대장에게 달려갔다.
“혹시 늦었습니까?”
“아닙니다. 출발하실 시간에 딱 맞춰 오셨군요.”
“그렇군요. 후유······.”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백발 소녀에게 ‘다행이다.’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사람인가 보군.”
“뭐예요, 저 사람? 관전 견학자?”
“관전 견학자? 설마. 저 사람은 난입 대기자야.”
난입 대기자라는 말에 후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입 대기자요? 그거 등급이 높고 유명한 사람들이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물어본 후임은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유선을 보았다.
“저렇게 약하게 생긴 사람이요? 저 사람 장비 아무것도 안 둘렀잖아요. 난입 대기자라면 적어도 A급 무기라도 쥐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 사람이 문제가 아니야. 저 여자애가 문제지.”
“저······ 여자애가요?”
사내가 고개를 숙여 소녀에게 시선을 뒀다. 소맷자락을 잡으며 서 있는 모습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소녀의 상이었다.
“말도 안 돼요. 무기도 없고, 방어구도 안 두른 애가 어떻게 난입 대기자예요? 거기다가 오빠한테서 떨어지지 못하는 애처럼 옷자락이나 잡는데요?”
“너 SNS 안 하냐?”
“SNS요? 하긴 하죠. 근데 내 자랑할 때나 쓰지, 남의 거는 보지 않아요.”
“인생의 낭비를 참 대충하는구먼.”
선임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뭔가를 찾아 후임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봐 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모든 걸 설명해 주는 영상이다.”
“별로 관심 없어요.”
“아, 야. 조금만 봐 봐.”
“저 물자 정비해야 해요, 선배님.”
“새끼. 까칠하기는······.”
선임은 투덜거리면서 휴대폰을 거뒀다. 후임 백발 소녀와 검은 머리 남자가 사기꾼으로만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후임은 이 공격대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본 난입 대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메이커로 둘둘 치장한 사람을 내심 기대했지만, 처음이 이렇게 초라한 사람인지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들어가는 던전의 주적인 ‘오거’를 잡으려고 이동할 때도 후임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유선 님아.”
“왜 그래?”
“심심해.”
“가는 길에 도서관이나 들르자. 옷 안 버린다면 말이지······.”
그 소녀와 사내는 애랑 보호자가 함께 이세계에 관광을 온 것 같은 분위기에 가까웠다.
일상적인 얘기를 서슴지 않게 했다. 전혀 긴장감이 없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작전 중이니 잡담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 죄송합니다.”
후임의 지적에 유선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좋은 사람처럼 웃으면서 넘어가는 걸 보고, 후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별것도 아닌 사람이네.’
후임은 서열 정리를 마친 것처럼 씨익 웃었다.
-오거 발견했다.
-공격 준비.
목표물을 발견했고, 후임은 오거를 치려고 검을 뽑아 들었다.
***
-10분간 휴식하자.
-으아, 되게 순조로웠다.
공격대원들이 오거를 잡으려고 놓지 못했던 긴장을 풀면서 자리에 앉았다. 후임도 그들을 따라 앉으며 숨을 돌리려 했다.
그때, 후임의 뒤통수를 치는 손이 날아왔다.
“야, 인마.”
“아얏!”
후임은 누군가 고개를 돌려 봤고, 그게 선임임을 알았다.
“선배, 왜 때려요?”
“왜 때리긴, 몰라서 물어? 꼴 보기 싫다고 귀빈을 막 대하면 쓰냐? 내가 너를 그리 가르치든?”
선임은 후임이 하는 행동을 모두 지켜보았다.
“귀빈은 무슨······. 작전 중에 떠드는 건 엄연히 저쪽 잘못이죠.”
선임은 인상을 쓰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휴······, 저분이 성격이 좋아서 다행이지, 네가 그런 말을 해서 감정이 상했다면 큰일 났다고. 너보고 건방지다고 저대로 그만두겠다면 어쩌려고?”
그러자 후임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도움을 받을 일이 뭐 있겠어요? 여기는 C 등급 던전이고 지금까지 만난 것들은 전부 다 C-뿐인데요.”
“생각처럼 흘러가면 난입 대기자를 끼워 놓지도 않았지, 이 멍청아.”
선임의 말에 후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좋아요. 만약 저 사람한테 도움을 받는다면, 제가 저분께 사과할게요. 난입 대기자한테 몹쓸 짓을 했다고요.”
“······그 약속, 꼭 지켜라.”
선임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고, 후임은 여전히 위기의식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자마자, 선발대원이 무전기를 통해 보고했다.
-대장님, 자이언트 오거가 우리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대장이 일어서며 선발대원에게 무전했다.
“도대체 뭐 했는데, 그 녀석한테 걸려?”
-<은신> 특성을 가진 놈이라 뒤늦게 감지했습니다!
<은신> 특성이 있으면 <감지>하더라도 알아차리는 게 늦어진다.
“아, 이런 씹······. 너희가 못 따돌리지?”
-그렇습니다. 지금 도망치기도 버겁습니다.
“버거우면 거기서 죽어야지! 내 손에 뒈지고 싶으면, 발에 불이 붙도록 달려와!”
무전기에서 손을 뗀 대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유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에게 부탁했다.
“유선 씨, 부탁하겠습니다.”
후임은 그걸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평소에 사장에게도 허리를 안 숙이던 공격대장이 고분고분하게 허리를 숙이는 광경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이러라고 불러 주셨는데요, 뭘.”
유선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부탁을 받아 주었다. 뒤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유선과 엘레노어는 이제 공격대 앞으로 나갔다.
“엘레노어, 사냥하자.”
“사냥!”
엘레노어는 앳된 목소리로 유선의 말을 재창했다. 아무리 봐도 소풍 온 것처럼 들뜬 애로만 보였다.
곧 먼저 출발한 선발대원이 다시 공격대에 합류했다. 말처럼 거의 발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달려오다가 안전지대에 온 것을 보고 그대로 슬라이딩했다.
“자이언트 오거는?”
“오고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쿵! 쿵! 숲의 나무들 사이에서 묵중한 몸을 이끌고 달려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모든 것을 날려 버릴 것처럼 도끼를 휘둘렀다.
-인간! 나쁜 인간! 인간들은 오거를 죽이려 한다! 그러니 오거가 먼저 죽인다!
“존나 크구먼 진짜.”
계속해서 오거를 상대했던 공격대원들은 하나같이 그런 생각을 했다. 단순한 오거는 C-등급이지만, 자이언트라는 수식어가 붙은 오거는 B+ 몬스터로 거의 보스나 다름없었다.
키는 언뜻 봐도 3m가 넘고 그 도끼는 유선의 키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무게는 분명히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까닥하다가 저 도끼에 몸이 닿는다면 반병신으로 사는 것도 면치 못할 것이다.
백발 소녀는 그 위협적인 몸짓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