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9. 님아? 님아!
사람의 말은 또 다른 말을 낳는다. 그리고 몇몇 사람은 귀신같이 그 말을 잡고, 구체화해서 기회로 만들어 버린다.
그 기회를 희생양이라 칭한다면 유선은 그에 대한 희생양이었다.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유선은 무감각해진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어 보았다.
엘레노어가 각성한 다이얼 울프를 잡은 지, 벌써 3주가 지났다. 엘레노어의 힘을 함구해 달라는 말은 안 했지만, 제 회사 사정이 있기 때문에, 유선을 자신의 회사로 끌고 오려면 경쟁 회사에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유지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안일한 생각이었다. 늘 어딘가는 정보가 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게 2주일 만에 새어 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유선은 지난주부터 폭탄 같은 문자 세례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정유선 헌터님. 헌터님에게 문자를 드린 건 다름 아니라, 지금 소속된 회사가 없으시다면, 우리 회사에 방문하셔서 협의를······.
“뒤로 가기, 뒤로 가기, 뒤로 가기······.”
더 읽어 볼 필요가 없었다. 똑같은 섭외 문자였으니깐. 벌써 15번째 본 내용이었다. 그것도 오늘만이었다. 소문이 점점 확산한다고 확신할 정도로 나날이 문자 양이 증가했다.
‘내 신상 정보가 걸레짝이 됐나?’
유선은 공개하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정보를 구하고 돈 냄새를 맡아 15번째 문자가 왔는지 의문이었다.
문자만 오면 다행이었지, 그것도 아니었다.
띠리리리-.
전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유선은 알 수 없는 발신자에게서 날아온 전화에 한 번 더 반사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러 받았다. 제발 이번에는 다른 전화이기를 바라면서.
-안녕하세요, 정유선 헌터님. 제가 전화를 드린 이유는 우리 회사에서······.
“아, 안 가요! 안 가!”
유선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끊었다. 오늘만 세 번째 전화였다.
보류하면 재다이얼로 끊임없이 괴롭히고, 친절하게 거절하면 계속 달라붙었기에 딱 잘라서 거절했다. 흐느적거리며 반응해 버리면 얼마 안 가서 집 앞까지 찾아올 기세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밤낮으로 끊임없이 날아오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인기 많은 놈이 짜증이 나 죽겠다는 게 이런 소리였군.’
단순히 부러우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인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방어 감각을 허물어 치고 들어오려는 영업 본능을 막으려고 발버둥 치는 유선의 뇌세포가 과부하 되다 못해 하나둘씩 터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유선은 제의 문자나 전화가 더 오면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아서 휴대폰을 아예 꺼 버렸다.
“유선 님아.”
메마른 사막을 횡단하는 모험가를 구원해 주는 오아시스 같은 목소리가 귀를 적셨다. 엘레노어의 목소리였다.
옷깃을 잡아당기는 감각에 눈을 돌리자, 그녀의 하얀 머리 위에 뜬 글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놀고 싶어.
엘레노어의 현재 생각이었다. 이젠 어느 정도 문장까지는 보였지만, 아직 그녀가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건 알 수가 없었다.
“유선 님아.”
그녀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유선을 한 번 더 불렀다.
“왜 그래?”
“같이 책 읽자.”
“그래. 책 가져와.”
엘레노어는 미리 뽑아 놓은 책을 들고, 유선의 다리에 앉았다.
엘레노어는 책을 상당히 좋아했다. 글자를 몇 개 가르치고 나서, 도서관에서 유아용 책 몇 권을 빌려 와 엘레노어에게 보여 주니 얌전하게 책에 빠져들었다.
귀찮기도 하지만, 다리 위에 앉아서 다리를 못 움직인다는 것과 가끔 모르는 것들이 있으면 물어보는 정도여서 충분히 감수할 순 있었다.
만약 책에 흥미를 못 느꼈다면, 놀아 달라고 보챌 게 안 봐도 비디오였으니······.
“유선 님아, 이건 머야?”
“어디 보자······. 이거? 이거는 ‘자동차’라고 읽는 거야.”
“자, 좌동차. 자아동차······.”
호기심이 많아 뭔가를 알려는 것도 많았고, 습득도 빨랐다. 아쉬운 점이라면, 지식 습득 속도보다, 발음은 아직 적응이 안 되는지, 말하는 데 드는 시간이 컸다. 그것 빼곤······.
“유선 님아, 이건?”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유선을 부르는 이 호칭 자체에도 아쉬운 점이 컸다.
이해 속도는 빠르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이해하지 못한 개념이 한 가지 있었다. 엘레노어가 유선을 부를 때, ‘님’이라고 붙이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다시 생각해 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엘레노어에게 존댓말을 가르치려던 그 당시를 잠깐 되돌아보자면······.
“엘레노어, 앞으로 나한테 말할 때는 존댓말을 써야 해.”
“그게 머야?”
“그게 뭐냐 하면 나이가 적은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말을 높이는 건데······.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안녕하세요?’ 나 ‘뭐뭐 해 주세요.’라고 말하잖아?”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깐 엘레노어도 다른 사람들이나 나 같은 연장자를 보면 높임말로 말해 주면 좋겠어.”
유선은 시간을 들여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었고, 그 설명을 들은 엘레노어의 반응은 이러했다.
-????
이해하는가 싶더니,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기 그러니깐 보자······. 여기 책들 보면 나오잖아. 이렇게 어린애가 할아버지에게 인사할 때랑 할아버지가 어린애에게 인사할 때가 다르듯이, 너랑 내가 나이 차이가 나니까······.”
이해시키려고 더 풀어서 얘기한 성과는 더욱더 처참했다.
-?????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존댓말의 개념을 이해시키는 데 하루를 써먹어 보지만, 그녀는 그 개념만큼은 이해 못 하는 것 같았다.
‘존댓말이 없으면 뭐 어때? 어차피 앤데, 그럴 수도 있겠지.’
유선은 그날 그런 생각을 하며 엘레노어를 내버려 뒀다.
그래선 안 되는 이유는 바로 다음 날이 돼서야 알았다.
“유선.”
“······응?”
“이거 줘.”
“그래.”
그리고 머지않아.
“유선아. 배고파.”
“······.”
엘레노어가 앳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신경 쓰지 말자고 생각하면, 말버릇이 문제고, 고치려고 하면 존댓말을 이해 못 하고, 또 포기하면, 말버릇이 문제인 순환 문제에 빠졌다.
러브콜은 러브콜대로 오고, 교육은 교육대로 하는데, 거기다가 엘레노어는 오랜 친구처럼 이름을 부른다.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유선은 최대한 기분이 나쁘지 않게 타협 보는 방안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엘레노어를 앉혀 놓고 교육했다.
“엘레노어, 앞으로는 사람들 이름 뒤에는 ‘님’자를 붙이도록 해.”
“님?”
“그건 말이지······.”
존댓말에 붙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 개념을 이해시키지 않는 이상 왜 시키려는지 이해 못 할 것이다. 그래서 유선은 그런 어려운 것을 싹 치워 버리고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게 다른 몬스터랑 사람이랑 구분하는 기준이야.”
“아, 아.”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거의 사람들에게만 붙이고, 몬스터들에겐 안 붙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레노어는 바로 실천에 옮겨 갔고, 그렇게 자신을 ‘유선’이 아닌 ‘유선 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반말로 말을 걸어도 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순화되어서 상당히 나았다.
‘역시 오빠가 나았나?’
사태를 급하게 수습하면서, 뒤늦게 조금 후회했다. 남자들의 로망이긴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속 보이는 행동이었기에 지금 호칭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유선은 오른손 인장을 문질러 엘레노어의 상태를 확인했다. 3주 동안 교육과 돌봄으로 얻은 스테이터스를 결산 차 열어 보았다.
이름: 엘레노어.
계약 날짜: 2042년 04월 06일.
호감도: 42%.
스트레스: 25%.
적응도: 5%.
-엘레노어는 유선을 믿습니다.
3주간 엘레노어와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테이머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적응도는 엘레노어의 스트레스나 호감도처럼 자신의 상태에 대한 스테이터스가 아닌, 유선이 그 사역수에게 얼마나 적응했는가였다.
요컨대, 제일 쉬운 개념으로는 정보 창 같은 것이었다. 엘레노어의 일면을 알아내면, 적응도가 올라가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따라서 올라가는 퍼센트도 다르다.
그녀에 대한 적응도가 5%에 도달하자, 새로운 정보를 얻었는데, 그게 바로 적응도 밑에 있는 문장이었다.
사실상 아직은 별 의미가 없었다. 적응도가 더 올라야지 그나마 유선이 바라는 지식이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응도는 알아낸 반면, 가장 많은 메시지가 뜨는 호감도와 스트레스 관련은 아직 그에겐 아리송한 이야기였다.
호감도가 오른다는 메시지가 뜨면, 그건 언제나 1%도 되지 않는 양이다. 수치로 환산하면 0.12% 정도. 8~9번 정도 뜨고 나서야 호감도가 1%씩 올라가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렇게 놀아 줘도 떨어지는 속도는 빨랐다. 메시지가 떴다 하면 1% 정도가 깎였고, 심한 경우에는 3%까지 떨어진 적이 있었다.
꾸준히 놀아 주고, 알려 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을 반복해 호감도는 어떻게든 42%까지 끌어올렸다.
반면 스트레스는 호감도와 차원이 달랐다. 호감도가 마치 모래성을 쌓듯이 차곡차곡 쌓는 건가 하면, 스트레스는 주식 그래프와 비교해도 무색했다. 앞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스트레스가 시작되는 지수는 들쭉날쭉하며, 그때마다 해결하는 방법이 다르다. 먹는 거로 스트레스가 줄어들기도 하지만, 제아무리 놀아 줘도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가 있었다.
유선은 엘레노어의 스테레스 해소에 대한 생각이나 호감도를 유지하는 방법 같은 생각은 잠깐 접었다. 답은 언젠간 나오리란 생각에 방치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유선 님아, 이건?”
“이건 자유 민주주의라고······. 뭐야, 유아용 책에 왜 이런 단어가 들어갔어? 이런 건 나중에 알아도 돼.”
유선은 이렇게 엘레노어의 책 읽기를 도와주면서 나름대로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삐리리리리!
그 평온도 잠시라는 듯이 울리는 벨 소리.
유선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휴대폰은 꺼 놨으니 벨이 울릴 리가 없었다. 그 소리의 발원지를 찾자, 구석에 몰아 놓은 집 전화기에서 나는 소리임을 알았다.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은 집 전화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 경우라면 한 가지뿐이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가, 집에까지!’
유선은 짜증이 난 채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안녕하······.
“안녕이고 나발이고 집까지 전화해서 괴롭힐 생각이면 정말로 경찰서에 신고합니다! 적당히 하세요!”
-······안녕하세요, KOHA 소속의 한국 테이머 관리 협회의 이.선.미입니다.
“······.”
화낼 대상을 잘못 잡고 말았다. 유선은 머쓱해진 채 전화 받는 직원에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요즘 계속 이상한 사람들이 전화해서 그만······.”
-아뇨, 괜찮습니다. 헌터님에게 안 좋은 일이 있으셨다면 우리가 이해해 드려야지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정유선 헌터님께서 최근 한 달 내에 사역하신 몬스터가 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공공기관까지 소문이 흘러 들어간 것 같았다. 유선은 뭔가 해선 안 되는 걸 저질렀나 싶어 조심스러워졌다.
“그렇습니다만······.”
-조련에 성공하시면 사역수를 등록하셔야 하는데, 아직 등록하지 않으셔서 그렇습니다. 혹시 정보를 모르는 게 아닌가 생각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네?”
유선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 직원에게 물었다.
“등록한다거나 그런 게 있었습니까?”
-네. 대부분 테이머님들께서는 아시던데······. 혹시 모르셨나요?
알 리가 있나. 어느 회사에 소속되지도 않고, 테이머의 바닥은 좁기까지 한데 정보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내일 중으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한 번 방문해 주셔서 사역수를 등록해 주시겠습니까? 바쁘시거나, 원하신다면 기간을 연장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내일 등록하러 가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헌터님.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유선은 전화를 끊고, 엘레노어를 보았다. 그녀는 다리 위에 앉아 책장을 넘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만약 사역수를 등록하려면, 능력치 검사는 필수겠지.’
그렇게 되면 엘레노어의 전체적인 능력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게 어느 정도 공개될 것이다. 그리고 수치화된 엘레노어의 데이터를 보고, 냄새도 맡지 못했던 발 좁은 회사들도 합류해 유선을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별일 없겠지?’
유선은 내일은 제발 무사하게 일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