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4. 믿을 수가 없다
상황은 기율이 말했던 것처럼 깔끔하게 처리되었다. 유 팀장은 건수를 제대로 잡지 못한 데다, 회장의 아들에게 찍혔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지 발걸음이 무거워진 채로 차로 돌아갔고, 그런 모습을 본 유선은 속으로 고소함을 씹었다.
경찰서에 나온 유선은 먼저 기율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네 덕분에 이런 일도 모면하게 되네.”
그 말을 들은 기율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 하지 마시오, 형님. 우리가 복숭아나무 밑에서 술을 마시며 결의하던 날을 잊었소?”
“너랑 도원결의할 만큼, 친했던 것 같진 않았는데?”
“거참, 너무하시오. 고등학교 시절에 함께 소주를 나눠 마셨던, 그 나무가 바로 복숭아나무였소.”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기율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이렇게 구해 줬는데, 뭐 답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형님, 또 그러신다. 내 성격이 그런 사소한 빚 따위는 상관없다는 거 알면서 말이야.”
인덕은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기율은 유선에게 관대했다. 유선은 아직 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밥.”
그때, 엘레노어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굶주린 배를 움켜잡으며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기율은 그제야 질문할 타이밍을 잡은 듯 유선에게 물었다.
“아, 그나저나 그 아이는 누구요? 형님, 아는 동생이오?”
“그게 말이지······.”
고개를 돌리며 대답해 주려는 찰나에, 옷깃이 강하게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밥.”
엘레노어가 자신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엘레노어의 스트레스 지수가 팍팍 올라가려 시동 거는 게 들려왔다.
“일단, 어디 가서 뭐 좀 먹어야 할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오랜만에 이 동생이 형님에게 밥 좀 사겠소. 뭐가 먹고 싶소? 중식, 양식, 일식?”
전부 다 고급스러운 곳인 게 분명했다. 기율의 물음에 유선은 엘레노어를 보았다.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를 보고 기율에게 말했다.
“라면이면 될 것 같다.”
그녀의 머리에는 밥이란 단어와 먹다가 만 라면으로 가득 찼다.
***
유선과 기율은 경찰서 근처에 분식집이 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기율은 평범한 분식점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추억에 젖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분식집, 정말 오랜만이오. 고딩 때 이후로는 처음 오는 것 같구려. 역시 형님 같은 사람이 있어야 이런 데를 들르는 것 같소.”
“내가 아니면 죄다 입이 고급이신 분들이잖아. 분식을 좋아할 리가 있나.”
“나는 예외지. 달고 짠 거는 얼마든지 환영인 걸 보면 아직 온몸이 급식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 같소. 아주머니! 여기 떡볶이 중 자에, 튀김, 순대, 만두하고······.”
“라면.”
“라면 하나요!”
기율이 엘레노어를 슬쩍 보기에, 유선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음식 주문까지 마쳐 놓고, 기율은 고개를 흥미에 찬 눈으로 유선을 보았다.
“자, 그러면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밥값으로 그간 있었던 이야기부터 들어 봅시다.”
“놀라지나 마라.”
자랑거리가 생긴 유선이 피식 웃으면서 자신이 헌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반응은 예상대로 격하게 나왔다.
“형님, 헌터가 되었소?”
“응, 어제 결과가 날아왔어.”
기율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유선은 기분이 좋았다.
“형님, 너무하구려. 어째 이 동생을 남겨 놓고 혼자 헌터가 되었소?”
“넌 어차피 집에서 안 시켜 주잖아. 슈퍼 다이아 수저 아저씨.”
기율의 꿈은 헌터였다. 유선만큼이나 열렬했지만,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던 이유가 가족의 심한 반대 때문이었다.
헌터가 공무원급으로 인기가 많긴 했지만, 위험한 직업이다 보니 기율의 꿈은 집안에서 극구 반대했다.
그렇게 꿈을 잃은 차기율은 현재까지 철없는 재벌 2세에 돌아온 방탕아 타이틀을 가졌다.
“크윽,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축하는 나중에 해 드리고, 이야기 끊어 버린 것 같구려. 마저 얘기해 주시겠소?”
“어, 그러니깐······.”
큐앤 기업 사유지에 멋대로 들어갔다는 것, 집에 눈을 떠 보니 자신이 모르던 애가 옆에서 잔다는 것과 계약 인장이 찍힌 것까지 모두 말해 주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어. 그러니깐 얘는 몬스터라는 것만 알아 둬.”
“음, 인간형 몬스터라······.”
기율은 유선의 말을 모두 듣고 신기하다는 듯이 엘레노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만큼 완전한 인간형 몬스터는 되게 희귀한데······. 적어도 다리는 뱀이라든가, 거미 다리라든가, 그렇지 않소?”
“아라크네랑 라미아 같은 것이랑 비교하면 좀 특이하긴 하지.”
“이런 애를 어떻게 꾀어 온 거요?”
기율의 물음에 유선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에이, 계약한 자신이 모르면 어쩌잔 거요?”
유선이 맛집 비법처럼 자신의 레시피를 숨기리란 생각에 한 번 더 떠보지만, 자신은 확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짜 몰라. 이 애랑 계약했다는 것도 오늘 아침에야 알았어.”
“저 애는 알지 않겠소? 혹시 안 물어본 거요?”
기율이 시선을 엘레노어에게 던지며 말했다. 그녀는 관심 없다는 듯이 포크로 라면을 흡입하기 바빴다.
기율이 제시한 방법에 유선은 바로 엘레노어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내가 너랑 어떻게 계약했는지 모르지?”
-?
유선의 물음에 엘레노어는 고개를 들며 머리에 물음표를 띄울 뿐이었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뭔가 단어라도 보이길 기대했지만, 그 물음표 하나가 끝이었다.
“쌍방으로 합의한 것 같은데, 그 쌍방이 어떻게 합의했는지 모르겠다라······. 이거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시나리오로군.”
기율은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에 반해 계약자인 유선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나면.”
“아주머니, 여기 라면 한 그릇 더요!”
엘레노어의 말에 유선은 주방을 향해 외쳤다. 기율은 가만히 엘레노어를 보다 뭔가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렇지. 계약한 몬스터라면 형님도 이 녀석의 스펙을 모르지 않겠소?”
“그렇지.”
계약의 인장을 통해서 보는 것을 제외하면 엘레노어의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그렇다면 측정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려.”
기율은 자신의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A4 용지 사이즈의 판이었다. 유선은 그걸 알아보고 의외라는 듯 물었다.
“너 아직도 그거 들고 다니냐?”
유선의 물음에 기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받아쳤다.
“들고 다니면 안 되오?”
“아니. 들고 다니는 건 네 마음이긴 한데, 네가 그렇게 헌터 하고 싶다고 노래 부르면서 가지고 다니던 거라서. 꿈을 접을 때 그것도 같이 팔아 버렸나 했거든.”
“지금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소? 지금 이 애 능력치 측정한다는 게 중요하지 않겠소?”
“그래, 자질구레한 건 넘어가자.”
기율 입장에선 어쩌면 아픈 추억이었고, 딱히 걸고넘어져도 이득일 건 없는 물음이었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그가 꺼낸 물건이 단순한 주황색 플라스틱 판자로, 단순해 보이지만 시가로 500만 원이 넘는 고급 장비이다. 사용자 능력 측정판(User Status Table)으로 줄여서 UST라고 부르는 측정 장비이다. 사용자의 능력치를 알아보는 장비이기 때문에, 회사마다 하나씩은 꼭 갖춰놓는 물품이며,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슈퍼 다이아수저인 차기율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 꼬마야. 여기에 손 올려 봐라.”
“후루룩.”
엘레노어는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거침없이 라면을 흡입했다. 기율은 머리를 기울여 엘레노어에게 말했다.
“어이, 꼬맹이. 여기에 손을 얹어 보라니깐.”
“쓰으읍.”
한 번 더 무시하자, 유선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 아니오?”
“응? 그건 아닐 텐데? 엘레노어, 여기에 손 얹어 볼래?”
유선이 말하자, 엘레노어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더니 말대로 UST에 손을 얹었다.
“형님 목소리를 들으니깐 바로 반응하네. 형님 목소리만 들리나 보오.”
“그건 아니겠지.”
단순히 반응하고 싶은 사람과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엘레노어의 작은 손바닥이 UST에 닿자, 단순한 유리판 같았던 패드 안에서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띠링-.
완료 음과 함께 소녀에 대한 정보가 UST에 표기되었다.
“흐음, 어디 한 번 수치를 한 번 봐 보······.”
단어와 숫자로 혼합된 UST를 보는 순간, 기율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차기율, 왜 그래?”
“······.”
기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유선에게 UST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유선은 왜 기율이 아무 말도 안 했는지 알았다.
“······기율아.”
“······네, 형님.”
“이거 혹시 고장 난 거 아니냐?”
“그럴 리가 있겠소? 어제 분명히 헌터 한 명 측정했을 땐, 정상이었는데······.”
“그런데 이만한······ 수치가 나온다고?”
상태 창을 읽은 유선과 기율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얼굴이 굳어 버렸다. 그들이 보는 엘레노어의 상태 창은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름: Unknown.
종족: Unknown.
생명력 13K/13K 마나 24K/24K.
근력 8,740 마력 5,328 민첩 6,753.
보유 특성: 30.
<강철 Lv. 4> <감지 Lv. 5> <마법 Lv. 5>······.
보유 스킬: 72.
······.
세계에서 생명력이 가장 높은 헌터의 생명력이 2,450이었는데 그것의 5배는 넘어갔고, 마나는 무려 10배가 넘었다. 무력 마력 민첩도 할 것 없이, 세계 기록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놀랄 거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보유 특성만 무려 30개가 넘어갔다. 자질구레한 것 따위가 아닌 레벨이 가장 낮은 것이 레벨 4일 정도!
보유 스킬은 특성 개수의 배가 넘어갔지만, 그 스킬들이 모두 으로 표시되어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버 스펙이라도 너무 오버 스펙이었다.
“형님, 대체 무엇을 데려왔소?”
“그러게 말이다.”
기율은 두려운 얼굴로 물었고, 그 출처도 알 리 없는 유선 또한 두려워진 얼굴로 소녀를 보았다. 엘레노어는 그런 유선의 속마음도 모르는 채로 포크를 내려놓으며 유선에게 말했다.
“나면.”
그녀의 옆에는 빈 그릇이 세 개나 쌓였지만, 엘레노어는 아직도 배가 고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