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3. 돌아온 탕아
자리라 해 봐야 경찰서 안에 배치된 검은 소파일 뿐이었다. 안락감이 드는 소파이긴 했지만, 유선은 여전히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큐앤 관리 지부에서 나온 유재민 팀장입니다.”
대기업 계열사의 팀장이었다. 유선은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었다.
“큐앤이면 그 대기업······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남자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정유선이라고 합니다.”
“네, 유선 씨로군요. 알겠습니다. 서로 바쁜 몸이니 빠르게 이야기가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유선은 그 속에 가려진 묘한 역겨움에 인상이 구겨졌다. 물론 내색해선 안 됐기에, 유 팀장이 보기 전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유 팀장이 중지로 안경을 밀어 넣으며 그에게 물었다.
“구현된 던전을 신고하지 않고, 민간인이 출입한 경우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하게 따진다는 사실을 아시죠?”
헌터 자격이 없는 일반인들이 함부로 던전 안으로 들어갈 경우, 가중 처벌을 받는다.
한창 헌터들에 관한 법률 제정을 진행 중이던 도중, 던전 속에 있는 보물을 노리고 던전 안으로 들어가다 사망한 사례가 있어, 최근에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유선은 헌터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저기, 헌터 자격증이 있긴 한데······.”
“아, 헌터로군요. 헌터라면 당연히 사유지 쪽에 발현된 던전의 처리법은 잘 아시리라 생각하는데, 그렇죠?”
유선이 뭔가 말하려던 중, 유 팀장은 유선의 말을 끊어 버렸다. 재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잘 알기에 입 다물어야 했다.
“죄송하지만, 저도 딱히 악의가 있다거나 그런 의도가 없어서 그런데 선처해 주시는 건 안 되겠습니까?”
“선처라······.”
그러자 유 팀장은 미소 지었다. 사람 좋은 듯한 미소로 착각하겠지만, 유선은 유재민 사원이 단순히 접대를 위한 미소라는 게 아님을 알았다.
갑의 입장에서 을들이 빌빌 기는 모습을 즐기는 미소였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말씀은 잘 알겠지만, 그래도 저는 개인적으로 정유선 씨를 만나러 온 게 아닙니다. 회사에는 정유선 씨가 우리 사유지에 생겨난 던전에 출입한 것에 대해서 명백하게 따지고 넘어가라는 지시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돈을 뜯겠다는 말뿐이었다.
“그렇습니까? 하아······.”
유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불안하게 짓던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저기, 죄송하지만 ‘큐앤’ 기업에서 오셨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만.”
큐앤이라는 확답을 얻은 유선은 최종 오의를 꺼내는 주인공처럼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유재민 사원에게 물었다.
“잠깐 전화 찬스 좀 써도 되겠습니까?”
“전화······ 찬스 말입니까?”
퀴즈 대회에서나 쓰일 단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장난 같은 말이 유 팀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유선은 진지했다. 이건 정말로 전화 찬스였으니까.
“쓰십시오.”
“감사합니다.”
유 팀장의 허락이 떨어졌고, 유선은 재빠르게 이름을 검색했다. ‘차’라고 치는 순간, 바로 보이는 이름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고, 바로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형님! 오랜만이오! 그간 전화도 안 하고 사셔서 죽은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오?
“아, 야······. 하하, 미안하다, 기율아. 너한테는 웬만해선 전화 안 하려고 했는데······.”
전화 받는 사내는 하이 텐션 상태로 그에게 말했다.
-아니지, 아니지. 형님이 전화하는 거라면 언제든지 오케이니깐! 부담 말고 전화하시오!
“그러냐?”
자신은 관대하다는 듯 나왔지만, 엄연히 뜻을 잘못 파악한 소리였다.
웬만해서 전화 안 하려고 했다는 말은 그가 하기 싫었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아무튼 내게 전화한 거 보니, 되게 곤란한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요?
“그게 말이지······.”
유선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대충 요약해서 설명해 주었다. 기율도 그가 곤란한 상황임을 파악하고 그에게 말했다.
-아, 그렇소? 그런 문제라면 내 손으로 해결하겠구먼. 그러면 내가 거기로 갈게. 형님 위치나 알려 주소.
“네가 온다고?”
직접 와 준다면 고마운 일이었지만, 과하지 않나 싶었다.
“너도 할 일이 있을 텐데, 여기까지 올 시간이 있겠어?”
-에이, 형님. 내가 누군지 알잖소! ‘돌아온 탕아’! ‘환영받지 못하는 막내아들’! 그런 녀석이 무슨 일이 있다고 바쁘겠소?
“······그렇지?”
유선은 안 좋은 별명에 당당하다는 게 어찌 보면 존경스러웠다.
-아무튼 내가 거기로 가겠소. 마침 근처이니 10분 정도면 되겠네. 딱, 기다리쇼.
“기다리기 싫어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빨리 와.”
그렇게 유선은 전화를 끊었다. 상당히 시끄럽고 톡톡 튀는 음색 탓에 유 팀장도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톡톡 튀는 밝은 분위기가, 유 팀장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유선에게 물었다.
“이 협상에 충분히 도움 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유선은 유 팀장의 우려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누가 옵니까?”
유 팀장은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 유선은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 ‘차기율’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차······기율?”
그 이름 석 자를 들은 유 팀장의 얼굴이 굳었다. 승기를 쥐었다고 생각해 자신만만한 표정이 싹 사라진 얼굴이었다.
유선은 그 표정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큐앤 기업 회장님, 아들내미요.”
***
10분이 지나기 무섭게 경찰서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차기율. 돌아온 탕아.
그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드라마에서 봄직한 전형적인 방탕한 재벌 2세 차림이었다.
하얀 정장을 입고, 금시계에 마피아 보스 같은 선글라스. 거기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완벽한 재벌 귀족의 상이었다.
그러다가 구석 소파 쪽에 앉은 유선을 발견했다.
“오오! 형님, 오랜만이오! 얼굴을 보니······ 제대로 먹고살진 못한 것 같구먼.”
“여러 일이 있었지. 지금 그 일이 일어나는 중이기도 하고 말이야.”
“아무튼 그 곤란한 일을 해결하러 이 해결사, 차기율이 등장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기율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그리고 유선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슬쩍 보며 물었다.
“여기 계신 분이, 우리가 협상해야 하는 사람인가?”
“어, 협상······. 네가 그렇게 부른다면 협상이겠지.”
협상이라기보단 일방적인 대화가 이루어질 거라는 걸 예감했다. 상대는 재벌가 아들과 그 재벌이 운영하는 그룹의 팀장이다.
“큐앤 관리 지부 1팀 팀장, 유.재.민.이라고 합니다!”
대기업에 입사해 자존감이 하늘을 솟구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신입 사원 같은 깍듯한 모습을 보였다.
“아, 우리 그룹에 다니는 유재민 팀장이구먼. 나한테 높임말을 쓸 필요는 없어. 어차피 권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인간이니깐 말이야.”
“아, 아닙니다. 제가 무슨 낯으로 도련님께······.”
어떤 직책이 없어도 큐앤 회장의 아들이라는 칭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갑의 위치에 섰다.
그건 순순히 내려놓을 수 없는 위치였다. 그런 대우에 익숙한 기율은 유선 옆에 앉으며 말했다.
“우리 유 팀장님께서, 아니지, 우리 큐앤의 뜻을 대변하러 왔으니, 큐앤 기업에서 상당히 화가 난 건 알겠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니, 대충 넘어가기로 합시다.”
기율의 말에 유 팀장은 적잖게 당황했다.
“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 쪽에서······.”
열렬한 사원답게 이번 건으로 인한 손해를 말하려고 했다. 기율은 유 팀장의 말을 가로막고 한 번 더 얘기했다.
“이봐, 나는 이번 건을 좋게 넘어가자고 말했어.”
“그러나······.”
“아,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먼.”
기율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유 팀장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유재민 사원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번 일 가지고 걸고넘어져서, 우리 형님한테 손해 배상이라도 걸어 돈 좀 챙기고 싶다는 말은 충분히 알아듣겠는데, 장기적으로 생각합시다, 우리 유재민 팀장님.”
상당히 진지해진 표정으로 유 팀장을 노려보았다. 유 팀장은 잘 벼려 놓은 칼을 가진 망나니를 본 것처럼 바짝 긴장했다.
“큐앤 기업은 친인간적인 기업이야.”
“그, 그렇습니다.”
“회사 사람이니깐 그게 개뻥이라는 사실을 알겠지만, 요즘 회사에서 그런 이미지를 만들려고 엄청 노력한다는 것도 알겠지?”
“그렇습니다.”
“그런 친인간적인 기업이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어쩌다 한 번 던전에 발을 들인 것 가지고 걸고넘어지면 뭐가 되겠어?”
“······그, 그게······.”
대답을 망설이는 모습에 기율이 재촉했다.
“요즘 학벌에 차별 두지 않는 사회 만들자고 했는데, 그게 너무 악효과였나? 왜 사람이 대답이 없지? 제 의견도 피력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업에 남을 이유가 없다고 회장님께서 마르고 닳도록 얘기했을 텐데······.”
“회사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습니다.”
기율은 표정이 어두운 유 팀장의 말에 손뼉을 짝 쳤다.
“그래! 그 이미지 실추로 인해 오는 불이익을 생각해 보라고. 대기업은 이미지가 곧 돈인데, 그걸 잃는 거야!”
기율이 호들갑 떠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잠깐 이익을 포기하면 어때? 우리 형님이 잘못한 일에 선처해 주었다고, 큐앤 기업은 짱 좋은 기업이에요! 이러면서 선전해 줄지 누가 알겠어?”
“그, 그렇습니다.”
유 팀장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애써 미소 지으며 그의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깐, 이번 건은 상부에 보고하지도 말고, 천천히 덮자고. 던전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던 거로 하고. 알겠지?”
“······알겠습니다.”
기율은 슈퍼 갑만이 해낼 직격타를 날리고 모든 상황을 종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