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당신은 누구? (2)
스트레스?
유선은 상태 창에서 본 듯한 스탯명에, 자신의 오른손을 문질러 상태 창을 꺼냈다.
이름: 엘레노어.
계약 날짜: 2042년 04월 06일.
호감도: 30%.
스트레스: 40%.
적응도: 0%.
10%였던 스트레스 지수가 단숨에 네 배로 뛰었다. 그것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젓가락 꼬챙이 질을 시도할 때마다, 엘레노어의 스트레스가 올라갔다.
“이걸 쓰렴.”
유선은 소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거두었고, 대신 포크를 꺼내 손에 쥐여 주었다. 포크라면 분명히 금방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다행히 그의 생각대로 바로 사용법을 알아차리고, 면 가닥을 건져 먹기 시작했다. 쥔 게 아직은 어색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방법을 습득해 가며 먹는 모습이었다.
-‘엘레노어’의 스트레스가 내려갑니다.
-‘엘레노어’의 호감도가 내려갑니다.
라면을 먹기 시작하니 메시지가 두 개 떴다. 유선은 다시 계약의 인장에 손을 얹어, 엘레노어의 상태를 보았다.
이름: 엘레노어.
계약 날짜: 2042년 04월 06일.
호감도: 29%.
스트레스: 24%.
적응도: 0%.
스트레스가 내려간 대신, 호감도도 함께 줄어들었다.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엘레노어의 얼굴을 보니 공복을 채운다는 즐거움이 없어 보였다. 곧 그녀의 머리 위에 구름이 하나 떴다.
-불편.
그녀의 머리에서 뜨는 단어. 손으로만 먹는 데 익숙하다가, 도구를 쓰니 나름대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리라. 불편하게 만들어 미안했지만 그래도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잘 먹네.’
싫증을 내며 포크를 집어 던지려 들 줄 알았지만, 소녀는 순종적으로 도구를 이용해서 잘 먹었다. 뜨거운 건 둘째 치고, 매워 못 먹는 게 아닌가 걱정한 것도 아무 의미 없었던 모양이다.
후루루룩 후루룩!
음식을 먹는다는 표현보단 흡입이 맞는 말일 정도로 잘 먹으니까. 포크질을 열댓 번 정도 하자, 소녀의 포크에는 더는 면 가닥이 건져지지 않았다. 누가 코라도 빠트린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냄비에 얼굴을 박아 넣을 것 같던 소녀는 유선을 보며 말했다.
“나면.”
“더 먹고 싶어?”
유선은 당황하며 물었고,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 자신도 라면 한 개 이상을 먹어 본 적이 없는데, 자신보다 마른 소녀가 한 그릇을 더 요구하니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한 개 더 끓여 줄게. 기다려 봐.”
한 그릇을 더 요구했기에, 유선은 냄비를 들고 일어났다.
딩동-.
가스레인지를 켜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집 초인종을 눌렀다. 유선은 냄비를 올려놓은 채로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집을 잘못 들였나 하는 생각에 문을 열고 물었다.
“누구십니까?”
“정유선 씨 댁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만······.”
가죽 코트를 입은 남자 두 명. 얼굴은 30대 중반쯤으로 보이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그런지,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유선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시나리오다!’
유선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의 신분증을 펼쳐 보였다. 금색으로 빛나는 정의의 독수리와 태극 마크. 경찰 배지였다.
“이만석 형사입니다. 잠깐 서로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장면. 유선은 그건 단순히 드라마나 영화, 아니면 뉴스에서나 일어나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름.”
“정유선입니다.”
“나이.”
“그······ 27세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진행 중이었다. 유선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유선은 형사 맞은편에 앉은 채로 진술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는 중이었고, 같이 따라 나온 엘레노어는 뒤에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본인이 어제 무엇을 했는지 진술해 보시겠습니까?”
인적 사항을 모두 기재한 형사가 유선을 보며 물었다.
올 것이 왔다. 하지만 유선은 자신이 뭘 했는지, 기억하는 게 없었다. 어젯밤에 대한 기억이 모두 하루아침에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으니깐.
우물쭈물하다가 진술하라는 말에 유선이 어떻게든 진술하려 했다. 문제는 반쯤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해 버렸다.
“이런 말을 해도 모르겠지만,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저도 모르는 마수가 뻗친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걸로 형량을 합의하겠다는 의도는 아니고, 저 자신도 반성하는 데다, 아이에게 손대진 않았으니, 부디 제 이름에 빨간 줄이 그어지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횡설수설하다시피 하는 진술 도중에 형사가 말을 끊었다.
“정신 차리세요, 정유선 씨. 제대로 진술만 하신다면 정유선 씨에게 올 불이익이 적습니다.”
“네, 네. 그러니깐 저는 술을 마시고 아무것도 기억 못 한 채로 한 여자애를 데리고 그대로 계약해 버······.”
쾅! 쾅!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에 짜증이 난 형사가 책으로 책상을 쳤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정유선 씨?”
“지, 지금 진술하는 중인데요?”
이만석 형사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유선에게 말했다.
“지금 정유선 씨는 기업 사유지 쪽 던전에 들어가셔서 혐의 조사를 받으시는 중입니다. 그것에 관한 진술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유지 던전이요?”
유선은 이건 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다.
당연히 엘레노어와 관련된 것이겠거니 생각했고, 그것에 대한 처벌에 겁을 먹었다. 그러자 형사가 파일을 들어 보이며, 유선에게 말했다.
“2042년 4월 6일, 1시 20분에 발생한 이계의 틈이 발현했고, 사유지 내에서 정유선 씨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걸 CCTV로 발견했습니다. 한 번 보시지요.”
형사가 건네준 CCTV의 사진, 네 개로 분할되어 작은 이미지인데도 얼굴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건 유선 자신이 봐도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아······.”
그때, 유선의 머릿속에서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이 맞춰지며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선배, 혼자서 들어갈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 별로 안 취했어.
안 취하긴요. 선배 지금 비틀거리는데요?
약간 균형 감각이 떨어지는 것뿐이야.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어차피 집도 여기서 별로 안 머니깐. 걱정하지 마.
걱정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어요.
그래, 잘 가라.
선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후우······.
좆같은 인생.
집에 들어가기 전에 술이나 한 병 더 까자. 마침 편의점도 있겠다.
치익! 탁!
꿀꺽꿀꺽.
크아! 취하니깐 좋구먼. 술 없었으면 이 세상 어떻게 살았냐?
그 망할 윤정도 새끼······. 두고 봐라. 내 발밑에 빌빌 기면서 바짓가랑이 잡아당기면서 매달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줄 테다.
그러려면 적어도 몬스터나 사역수가 있어야 할 텐데, 그걸 누가 구해 주려나······? 하, 시발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던전에 직접 들어가서라도 하나 잡아야지, 뭐.
제발 던전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응? 여기에 던전이 있네? 익스플로러도 없는 걸 보면, 방금 발현했나?
헌터 되어도 들어가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미리 한번 견학이나 해 봐야겠다.
안에 술이 더 있으면 좋겠네.
***
“앗, 아아······.”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자, 유선은 짧은 탄식을 흘리며 머리를 잡았다. 던전에 들어가서는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전까지는 또렷하게 떠올려졌다.
‘나 술 처마시고 미친 짓을 했구나.’
유선은 장비나 사전 지식 하나 없이, 막 발현되어서 등급도 안 정해진 던전 속에 들어갔다는 게 상상만 해도 핏기가 싹 가셨다.
살아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취조를 받는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방금 무슨 여자애에 대해서 진술하셨던데, 그건 도대체 뭡니까?”
“······어제 본 영화에 대해서 진술하라는 건 줄 알고 그만······.”
엘레노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아 둘러댔다. 형사도 혼란스러워하는 유선의 진술이 썩 신빙성이 있는 말은 아니었기에 그대로 넘겼다.
“어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다시 진술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니깐 제가······.”
유선은 성실하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모두 대답해 주었다.
술을 마시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에 형사는 타이핑하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유선을 보았다.
“음주 상태에서 던전으로 들어가셨다······. 한강 대교에서 떨어지는 거랑 다름없다는 거 아시죠?”
“······네.”
당연히 얘기하는 당사자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유선은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얼굴을 푹 숙였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진술하고 기다리던 중,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정장을 쫙 빼입은 사내였다. 이만석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 사내와 악수했다.
“안녕하십니까, 이 형사님?”
“어이구, 유 팀장님, 오셨습니까? 주신 자료로 수월하게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우리가 사람을 빨리 찾아서 좋지요. 이분인가요?”
“네, 두 분께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 보시고 어떻게 할지, 말씀만 해 주시면 됩니다.”
이만석 형사는 자신이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두 사내만 남자, 유 팀장이라는 사내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넣으며 유선에게 말했다.
“자리를 좀 더 편한 곳으로 옮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