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2. 당신은 누구? (1)
“미치겠네.”
이빨로 손톱을 뜯었다. 유선이 어릴 적에 불안하면 했던 버릇 중 하나가 그가 모르는 사이 튀어나왔다. 상당히 당황했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머리를 혼란케 하는, 그 혼란의 중심지인 침대 한구석을 다시 한 번 더 보았다.
여자아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여자아이였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새근새근했다. 유선은 그런 소녀를 보며 생각했다.
‘환상이 아닐까?’
술을 너무 퍼마신 나머지, 뇌에 손상이 가서 환상을 보리라는 의심을 피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헌터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서 환상을 보고 은퇴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 유선 자신도 예외는 아니리라 믿었다.
‘확인해 보자.’
유선은 이 여자애가 환상이 아님을 확인하려고, 소녀의 몸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가장 자극이 적은 머리카락부터, 작은 머리, 젖살이 조금 빠진 볼, 가느다란 목, 아담한 어깨, 팔, 허리······ 모든 게 자신이 보는 것과 일치했다.
“하하, 이거 정말 미치겠군.”
유선은 환상이 아니라는 게 더욱 불안했다. 차라리 미쳐 버렸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이게 환상이 아니라는 건 확실······.”
유선은 소녀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감겼던 두 눈을 뜨고 나온 눈동자. 해가 중천인 바다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듯한 푸른색이었다. 그것이 유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신을 더듬은 탓인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들었던 소녀가 눈을 떴다. 약간의 뒤척거림도 없이 번쩍 눈을 뜬 바람에 예상치도 못하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
유선은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뗐다. 늑대를 만난 것처럼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런 경계와 다르게,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유선을 가만히 보았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게 순수하다.
-?
한참을 보더니 소녀의 머리에서 물음표가 솟아올라 왔다.
‘이건 또 뭐야?’
말 그대로 물음표였다.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뭔가가 튀어나와 당황하고 말았다.
‘이 애의 생각인가?’
소녀의 표정이나 상황을 봐서 나온 추측이 그러했다. 특정한 단서가 있지도 않았고, 말 그대로 머릿속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소녀도 뭔지 모르는 것 같은 상황이었는지라, 유선이 먼저 말을 걸어 보았다.
“아, 안녕?”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유선이 먼저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누워서 유선을 보던 소녀가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유선을 바라보는 건 여전히 변함없었다.
-?
그리고 물음표도 똑같았다.
“······.”
소녀는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유선을 쳐다만 보았다.
“혹시 외국인? 그 영어가 뭐였더라······. 아, 알 유 그······ 포리지넌? 포리지넌이 맞나?”
수능 이후로 관둔 영어 회화에 다시 손을 대, 소녀에게 물어봤지만, 소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답답하기 짝이 없군.’
어떻게 해서 자신의 집에 왔는지에 대해 너무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해 줄 사람이 아니니, 유선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큰 고민에 빠졌다.
“혹시 내가 이 조그마한 애한테 뭔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술김에 뭔가 무례한 행동을 저지른 게 아닌가 싶어,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직접 물어보았다.
‘그렇게 되면 헌터 자격도······.’
품행 유지의 의무를 져버렸다며, 자격 정지 먹을 것이 분명했다. 백도 없는 상황인지라, 선처해 줄 리도 없기에, 상상도 하기 싫었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리에 물음표만 달던 소녀가 뭔가 알아들었는지, 소녀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은 왜······ 이건······.”
유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도자기 인형 같은 작은 손등 위에 검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단순히 그림이라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 윤곽이나 형태가 그가 알던 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계약의 인장이잖아?”
계약의 인장.
테이머 직업에 <조련> 특성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진 능력이었다.
“이 애가 테이머라는 건가? 그런 것치곤 나이도 어려 보이고······. 아니면,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유선은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그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오른손에 소녀의 손에 찍힌 인장과 똑같은 모양이 자리 잡았다.
동일한 모양은 확실히 정유선이 계약했다는 의미였다.
‘잠깐만, 이게 사람한테도 돼?’
계약의 인장이 묶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몬스터뿐. 사람을 향해서 인장을 발동하여, 귀속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그건 조련 레벨이 얼마나 높든지 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는 말은 유선이 가진 스킬이 예외라는 것이든, 아니면 그 소녀가 몬스터라는 뜻이다.
유선은 후자가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백발인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자세히 보면 생김새 자체도 이질적이었다. 외국 여자 느낌도 아니고, 뭔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온 느낌만 물씬 풍겨 왔다.
유선은 고개를 들어 소녀의 머리 위에 뜬 물음표를 보았다.
-?
“그렇다는 말은 이건 교감 특성으로 떠오르는 건가?”
교감은 몬스터의 생각 일부를 엿보는 특성. 이것도 마찬가지로 사람한테는 적용되지 않고 몬스터에게만 적용되는 특성이었다.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인 데다, 개인마다 특색이 있는 탓에 교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선은 이게 교감 스킬이 맞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고전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나 볼 법한 연출이었으니까, 자신이 단순히 미쳐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여겼다.
어찌 됐든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유선은 소녀를 일단 몬스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계약을 마친 상태라면, 뭔가 상태 창 같은 게 있다는 말이······. 으악!”
이게 끝이 아니란 생각에, 매뉴얼대로 자신의 오른손을 무심코 문지르자, 유선의 앞에는 게임에서 볼 법한 상태 창이 하나 떠올랐다.
이름: 엘레노어.
계약 날짜: 2042년 04월 06일.
호감도: 30%.
스트레스: 10%.
적응도: 0%.
거기다가 화살표 하나가 소녀의 머리 위에 뜨는 것이 그녀를 가리키는 상태 창이 분명했다.
“몬스터들의 상태를 수치로 본다는 게 이거구나.”
어제까지만 해도 그걸 볼 날이 올까 했지만, 정말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유선이 먼저 확인한 것은 계약 날짜였다.
“2042년 4월 6일······.”
정확히 오늘 날짜였다. 왜 오늘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새벽에 어디선가 개지랄을 했다는 거로구먼.’
후배들에게 고기를 사 주고 나서 유선은 집으로 곧장 들어간 게 아니었다. 그에 대한 궁금증이 꽤 있었지만, 눈앞의 문제가 우선이었다. 유선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꼬르륵.
그때, 공복의 신호가 미약하게 울린다.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자신의 배인가 싶었지만, 자신의 배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소녀 쪽에서 난 소리였다.
소녀는 자신의 배를 만지더니, 물음표가 튀어나올 때와 비슷하게 뭔가가 나왔다. 이번에는 단어였다.
-밥.
지금 상황에서 알맞은 한 단어였다. 저것이 소녀의 생각이라는 건 확실해졌다. 유선은 소녀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엘레노어.”
-?
엘레노어라는 이름을 부름과 함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인지하는 모양이었다.
“밥 먹고 싶어?”
유선의 물음에 엘레노어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리 위를 떠다니던 밥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말을 알아들었다는 의미이다.
“밥, 밥······. 밥이 집에 있으려나······?”
집을 나와 자취한 지 3년이나 지났지만, 한 번도 제대로 밥해 본 적이 없는 유선이었다.
유선은 급한 대로 먹을 것이 있나 찾아보았다. 냉장고 안까지 싹싹 털어 본 결과, 먹을 거라곤 라면뿐이었다. 유선은 라면이라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라면 좋아하니?”
“······나면?”
엘레노어는 어눌한 말투로 그에게 되물었다. 라면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았다.
“응, 꽤 맛있는 거야.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맛있다는 말에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선은 라면 한 봉을 뜯어 끓이기 시작했다.
부글부글부글.
수프를 풀고, 면을 넣어 익히기 시작했다. 양념 냄새가 퍼지기 시작할 때, 유선이 슬쩍 고개를 돌려 보자, 가만히 앉아 있던 엘레노어가 가까이 다가왔다.
-밥!
느낌표가 붙었다. 매콤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 것 같았다. 다 끓인 것을 확인하고, 유선은 냄비를 들고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자, 먹어.”
엘레노어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라면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나면.”
그리고 자신의 손을 냄비 안으로 집어넣었다.
“야, 야! 그걸 쥐면 뜨거워!”
엘레노어가 냄비 속으로 담그려던 손을 유선이 얼른 빼 버렸다. 너무 돌발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에, 손은 이미 국물로 흥건하게 젖었다.
“이런, 얼른 식혀야······.”
유선은 젖은 손을 보고 얼른 차가운 물에 식히려고 끌고 달려가려 했지만, “뜨거워?”
뜨거운 김이 손에서도 모락모락 피어오르지만, 엘레노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안 뜨거워? 안 아파?”
엘레노어의 머리에는 여전히 ?밖에 뜨지 않았다. 뜨거우면 적어도 !가 하나 정도는 들어갈 테니 뜨거운 감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면.”
“손으로 먹으면 안 돼.”
소녀는 다시 냄비로 걸어가 손으로 집어먹으려 했고, 유선은 한 번 더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제아무리 내성이 있다 해도, 유선은 손으로 퍼먹는 걸 보려 하니, 마음이 걸렸다. 그는 싱크대에서 씻어 놓은 쇠젓가락을 한 쌍 가져다주었다.
“밥 먹을 땐, 젓가락 쓰는 거야.”
그녀에게 젓가락 한 쌍을 가져다주고 사용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걸로 면을 건져서 먹는 거야.”
대충 시늉해서 보이자, 엘레노어는 자신의 젓가락을 국물 안으로 담갔다. 사용하는 게 어려운 모양인지, 양손으로 잡아 꼬챙이로 만들어 건져 먹기를 시도했다. 그런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으.”
엘레노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젓가락질이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앞에 메시지 창이 하나 떴다.
-‘엘레노어’의 스트레스가 올라갑니다.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