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프롤로그
“네 앞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뭔가가 떨어지면 어쩔래?”
유선의 고등학교 시절, 그의 아버지가 유선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유선은 대답했다.
“그걸 가지도록 노력해야죠.”
전형적인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일궈 낸 유선은 아버지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가지도록 노력해야지! 껄껄!”
유선의 아버지는 기분 좋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대답한 유선은 별생각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걸 말이다.
27년 인생에 감당할 수 없는 것이 굴러들어왔다.
1. 클래스의 차이(1)
“형, KOHA 시험 통과 축하해요!”
“선배, 축하드려요! 이제 선배도 그토록 바라던 헌터가 되었네요!”
테이블에 앉은 두 남녀가 자리의 주인공을 축하하려고, 잔을 들었다.
“고맙다. 이것들아.”
그 축하 대상인, 정유선은 후배들이 들어 올린 맥주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들이켜, 맥주잔을 깔끔하게 비워 냈다.
“이제 곧 헌터 할 사람인데, 두 명만 데려다 놓고 조촐하게 해서 미안하다.”
유선은 더 좋은 것을 사 주지 못한 것에 사과했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야, 받아먹기만 하면 얼마나 좋은 자리인데!”
남자 후배인 남주혁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선배. 오히려 우리가 사 드려야 하는데, 선배가 내잖아요. 선배 사정 모르지도 않는데요. 우리가 한우 같은 거 원하면 그것도 양심 없죠.”
여자 후배인 오도연도 너무 좋다는 듯 미소 지어 보였다. 불평 없는 후배들이 너무나도 고마운 유선이었다.
“취직하면 한 번 더 쏠 테니깐, 그때 같이 먹으러 가자.”
“그때는 한우로 사 줄 거죠?”
“A급은 무리일 거 같고, B급으로…….”
“우아, 쪼잔해!”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시시덕거리며 주혁의 말을 받아쳤다.
“KOHA 시험도 통과했겠다, 형도 이제 남부럽지 않은 헌터네요. ……부럽다.”
한국 헌터 협회, 줄여서 KOHA. 협회에 들어가려고 치르는 시험을 KOHA 시험이라고 한다.
필기와 실기 시험까지 치르는 극악 난이도에다가, 공무원 임용 시험보다 더욱 높은 70대 1이라는 경쟁률!
유선은 그 난관을 뚫고, 당당하게 헌터 협회에 자리 잡았다.
주혁은 그런 시험을 통과했다는 유선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형, 그거 보여 줘요.”
“나한테 뭐라도 맡겨 놨니?”
“에이, KOHA 시험 통과하면 다 주는 그거 있잖아요. 그게 이름이 뭐더라······.”
“ID 카드 말하는 것 같아요.”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답답해하던 주혁 대신 도연이 대답해 주었다.
“그거 하나 못 떠올리냐? 여기!”
유선은 지갑 속에 넣어 둔 투명한 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카드를 건네받은 주혁의 눈이 빛난다 싶을 정도로 반짝거렸다.
“오옷!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헌터 ID 카드구나. 주변에서 인증하는 사진으로만 봤는데, 실제로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진짜 부럽다······. 이거 저한테 주면 안 돼요?”
“그거 어디다가 써먹게? 어차피 본인 아니면 인증도 안 되는데, 인마.”
“농담이에요. 근데, 형. ID 카드 밑에 적힌 게 뭐예요? 주 특성 <교감 Lv. 4>?”
주혁의 물음에 도연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적성 검사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가진 특성이 주 특성이잖아. 그게 사실상, 헌터의 클래스를 선택하는 거고. 넌 헌터하고 싶다는 녀석이 그런 것도 몰라?”
“아하, 그랬지······. 근데, 원래 알았거든요. 너만 잘나지 않았으니깐 걱정하지 말래?”
“내년 시험 점수는 안 봐도 비디오구먼.”
도연이 빈정댔지만, 주혁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유선에게 물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Lv. 4는 정말 대단한 거잖아요. 이건 상위 클래스 수준 아니에요?”
대부분은 레벨 2로 시작하며, 3으로만 해도 재능이 보이는 인재로 취급받는다.
레벨이 4인 경우는 그야말로 슈퍼 루키 취급 받는다. 맨몸으로 카드 한 장만 들고 가도 대기업 문짝을 박살 내고 들어갈 정도로 많은 회사가 바라는 능력이다. 제아무리 헌터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슈퍼 루키 앞에선 꼼짝 못 할 정도이다.
카드를 들여다보던 주혁이 유선에게 물었다.
“형, 이 특성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다른 특성도 있어요?”
“있긴 있어.”
“몇 개 더 있어요?”
“3개. 그 아이디카드, 주 특성 쪽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면, 아마 홀로그램으로 표시될 거야.”
유선은 직접 주 특성 칸을 눌렀다. 그러자 교감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던 특성이 홀로그램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조련 Lv. 1>, <공감 Lv. 2>, <감지 Lv. 2>
도연은 몸을 기울여, 카드를 슬쩍 보며 말했다.
“특성 개수 자체는 헌터가 되려면 무난하네요.”
“뭐, 그렇지······.”
도연의 말대로 정말로 무난하기 그지없는 숫자였다.
특성 개수는 3개 정도가 무난하게 나오는 평균이며, 운이 없어 1개나 2개 같은 경우에는, 소생이 불가능한 둔재로 취급받으며 헌터 세계에서 사실상 제명이나 다름없었다.
유선은 숫자로만 따진다면 평균에서 약간 위쪽을 바라보는 수준이었다. 도연은 그것도 좋게 여겼다.
레벨 4에, 특성 개수는 4개. 단순하게 보면 신입 쪽에서 상위권에 들었지만, 유선의 얼굴은 좀처럼 기뻐하지 않았다. 유선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주혁은 특성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다른 좋은 특성들도 있는데, 하필이면 주 특성이 <교감>이라니······.”
“······.”
주혁의 말에 따라 유선이 숙연해졌다. 특성이 있어도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그 특성이 가진 성격 때문이었다.
같은 경우에는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이 아닌,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을 주는 특성들은 회사에서 데려가 키워 주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적어도 2인분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투 자체에 영향력이 없는 스킬은 대우 자체가 달랐다. 그야말로 찬밥 신세일 뿐이었다. 유선이 가진 교감 특성이 딱 그 모양이었다.
물론 교감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모든 특성이 비전투 특성이었다. 사실상, 그의 특성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증 수표를 끊은 사람처럼 돈을 펑펑 쓸 수가 없었다.
도연은 그 말을 꺼낸 주혁의 어깨를 툭 쳤다. 주혁은 분위기를 환기하려 웃어 보이며, 유선을 위로했다.
“에이! 그래도 우리처럼 2차 시험도 못 본 떨거지들인데요! 형이 지금은 제일 잘났죠!”
“······그렇지? 너희도 노력하라고, 이것들아!”
유선도 굳이 침울하기 싫어서, 주혁과 도연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주혁이 분위기를 몰아서 다시 띄워 보려 소주병을 들었다.
“아무튼 형 축하해요! 헌터 지망생 나부랭이 잔 한 번 더 받아 주세요!”
“오냐! 한 잔 더 받아 보자.”
맥주에서 소주로 갈아타며 주혁의 술을 받으려던 찰나였다.
“어이, 정유선이!”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술을 따라 주는 주혁이나 할 것 없이 테이블에 앉은 애들이 그대로 굳었다. 그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야, 합격했다고 온 동네를 뒤집어 놓더니, 여기서 회포를 푸는 중이냐? 대단한 녀석, 이런 일이 있으면 형님을 불러야지!”
윤정도 그가 제비처럼 가르마 탄 머리에 유명 브랜드 슈트를 쫙 빼입은 채로 유선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놈들, 하늘 같은 선배님 오셨는데 인사도 안 하네. 응, 요새 아주 편해졌나 보다.”
정도가 다가오며, 주혁과 도연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말에 굳었던 두 명은 얼른 일어나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고 오시니깐 넋이 나갔지 뭐예요!”
주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고, 도연은 화기애애한 미소를 지으며 격렬하게 정도를 반겼다.
“아, 너무 반하진 말라고. 임자가 곧 있을 몸이라, 고백해도 못 받아 주니깐.”
도연의 말에 미리 고백이라도 받은 듯 재수 없게 선을 그었다. 도연은 순간 얼굴이 굳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정도에게 애교를 부렸다.
“에이, 선배님 너무해요!”
눈웃음 짓던 도연이 고개를 돌려 주혁을 보자, 여우같이 눈웃음치던 것은 어디 간들 없고, 혹한의 서리가 지나간 것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굴이었다.
‘너냐?’
도연은 주혁을 향해 매서운 살기를 뿜으며 눈짓으로 물었다. 주혁은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것처럼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야, 그래도 헌터 자격시험 통과했으면, 좀 품격 있는 데서 하지 그랬냐? 이런 고깃집에서 한다기에, 과 애들 전부 불러서 하는 건 줄 알았잖아?”
슈트에 냄새가 묻을까 봐 인상을 찌푸리며, 옷깃을 탁탁 털었다.
‘재수 없는 새끼.’
‘자기 잘났다고 무시하는 거 봐. 극혐이네, 정말.’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불쾌감을 표할 수가 없었다. 윤정도의 후배인 주혁과 도연은 당연히 내색도 하지 못했다.
“하하, 네가 와 줘서 고맙다, 야.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고.”
동기인 유선은 후배 두 명보다 더욱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친애하는 벗님께, 술 한 잔 받아 보자. 한번 따라 봐라!”
“어, 응······.”
정도는 다짜고짜 빈 소주잔을 들어, 유선에게 내밀었다. 유선은 당황하며 그의 소주잔을 채워 넣어 주었다.
그가 친근하게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그래서 우리 친애하는 정유선 씨, 클래스 배정은 어떻게 받았냐?”
“그, 그게 말이지······.”
유선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토록 헌터가 된 것을 자랑하던 유선이었지만, 정도 앞에선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눈치를 보던 주혁이 소주병을 들고 일어서서 정도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팔라딘 선배님, 한 잔 빠르게 들이켜시고, 제 잔 좀 받아 주십시오! 팔 빠지겠습니다!”
“오, 오냐! 미안하다. 이 눈치 없는 놈이 후배 잔도 못 받아 보고 뭐 하는 짓인가 했네!”
정도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소주를 들이켜고, 주혁이 주는 술을 받았다.
유선이 대화하는 걸 꺼려서, 정도의 입을 막으려고 한 배려였다.
하지만 유선은 정도가 그 정도로 그 물음을 잊어버릴 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 녀석은 자신보다 약한 놈들을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나르시시스트니깐.
그렇기에 유선은 대답했다.
“테이머(Tamer)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