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식인인어는 죽어야 한다-223화 (223/223)

※ 223화

“너……”

“왜요? 이상한가요?”

트리야는 그대로 데아를 지나쳤다.

데아의 머릿속에 주군의 관심을 얻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던 자잔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까지 눈길 하나 주지 않은 트리야까지.

‘어쩌다 저런 애가 나왔지?’

“제가 이상해요?”

끼이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트리야가 톡톡 문을 두드렸다.

“어쩌겠어요. 여긴 결국 이런 곳인 걸.”

트리야의 웃음소리가 데아의 뒷목에 달라붙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후련해 보였다. 자잔의 방치에 대해서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래.”

여긴 이런 곳이다.

그리고 트리야는 원래 그랬다.

“가려고?”

“네. 그래도 당신에게는 생각날 때마다 올게요. 안녕.”

하지만 트리야는 바로 가지 않았다.

그는 우뚝 서서 가만히 있는 데아를 계속 바라봤고, 성큼성큼 다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대로 가기는 좀 아쉬운데, 한 번만 더 물어볼게요.”

트리야의 머리카락이 데아의 이마를 스쳤다. 눈동자에 그림자가 가득 들어찼다.

“나랑 같이 안 갈래요?”

트리야는 데아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예전처럼 여행 같이 다녀요. 제왕의 자리는 피파글랜에게 줬으면서, 뭐가 문제야.”

“…….”

“내가 원하는 건 들어준다며. 그렇게 약속했던 적이 있지 않았나?”

수천 년 전의 어린아이처럼, 트리야는 그렇게 졸랐다.

“인간계 일도 정리되었고, 나는 이곳에서는 사형수지. 당신만 결정되면 우린 어디든 떠날 수 있어요.”

그리고 트리야는 눈썹을 내렸다.

“응? 주군.”

트리야는 선수다.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책략가이자 연기자다.

“주군의 허락만 있으면 뭐든 가능한데.”

“나 바빠.”

물론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리고 릴림과 다른 애들이 우주 끝까지 쫓아올 텐데, 제정신이야?”

“하, 진작에 알을 다 부숴버렸어야 했는데.”

“뭐?”

트리야는 심드렁하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창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트리야. 그는 어디로 향할까?

“나중에 날 찾아와. 이 알이 부화하고 난 후에.”

데아는 자신의 이마를 팍팍 치고 싶었다.

젠장, 말해버렸어.

그러나 이미 뱉어버린 말이다. 저것 봐. 트리야 벌써 귀신같이 알아듣고 얼굴을 피잖아.

“그때 가끔씩 가자.”

“뭐를요?”

“…여행.”

톡, 그때 트리야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데아의 코를 쳤다. 그 짧은 접촉에 데아의 번쩍 고개가 들렸다. 트리야가 놀리듯 웃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넘어오면 어떡해요, 주군.”

데아의 귀가 뜨거워졌다.

날 속여? 미친 새…….

“하지만 좋네요.”

트리야는 후련하게 뒤를 돌았다.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 말 잊으면 안 돼요.”

잠시 멍을 때리던 데아는 어느새 사라진 트리야를 알아챘다. 후다닥 밖으로 나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트리야의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멋대로 오고 가네…….”

그게 트리야의 특징이었지만. 데아는 피식 웃었다.

“아주 제멋대로야.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어?”

데아는 트리야가 있던 책상 위에 놓아진 그림 액자를 보았다. 이게 여기에 왜 있지?

“분명… 트리야가 가져다 놓았겠지.”

그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데아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트리야가 알을 부수고 가지 않았다. 앞으로 트리야는 자기 멋대로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내킬 때 데아에게 와 인사를 하고 갈 것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데아는 만족스러웠다.

◈          ◈          ◈

“예전에 너와 비슷한 면상을 가진 놈이 있었지.”

권도언은 말없이 커피를 들이켰다.

“물론 생긴 건 달라. 그런데 인상이 비슷해. 단명할 상이라는 게 특히…….”

“그분도 단명했어?”

“아니. 더럽게 오래 살았어.”

그래서 유감이라고, 백리서가 짜증을 냈다.

그랬다. 지금 권도언은 백리서의 분노 대상이 되었다. 다른 인어들처럼 가볍게 투덜거리는 정도가 아닌, 진심 어린 분노를 마주하니 아무리 권도언이라고 해도 식은땀이 났다.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이데아에게 보내려는 꽃을 사다가 걸린 것이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던 쥐새끼……. 분명 주군이 죽였었지.”

“…….”

“조심해.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으면.”

물론 여기서 순순히 질 권도언이 아니었다.

“와아, 그럼 데아 씨는 나를 봐주신 거네. 영광이어라.”

“아직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텐데?”

“그렇겠지. 네가 날고 기어 봤자 주군에겐 한끝 위협도 되지 못하니까.”

그 전에 그의 권속들이 나서 상대를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흐음, 그래?”

권도언은 능청을 피웠다.

“그런데 곧 제국의 축제라지? 그곳에 초대를 받아서 가려고 해. 아, 물론 데아 씨에게 말이야.”

백리서가 희번덕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누가, 너를.”

“너의 주군이.”

권도언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나를.”

물론 권도언이 반쯤 달라붙어 징징거리며 플러팅을 날린 끝에 얻어 낸 초대권이었다. 그러나 백리서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었으므로 권도언은 마음껏 승리의 순간을 즐겼다.

“이…….”

“아, 시간이 됐군.”

하루하루가 바쁘게 흘러갔다. 다음 미팅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권도언이 일어섰다.

그렇게 축제날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인어 제국의 축제는 평범했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권도언에게는 아픈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          ◈          ◈

“데아 씨를 보면 인어공주가 떠올라요.”

되도 않는 수작이었다.

데아의 옆에 서있던 피파글랜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권도언을 돌아보고, 백리서가 마시던 음료를 그대로 퉤, 바닥에 뱉었다.

“뭐지? 이 데자뷔? 태초에게 이런 수작을 부렸던 인간 남자가 분명 하나 더 있던 것 같은데…….”

“아, 그 죽은 놈?”

“뭐야, 저 자식… 그놈의 전적을 이어받는 게 꿈인가?”

데아의 근처에 서있던 인어들이 권도언을 흉흉하게 바라보든 말든, 권도언은 축제 한가운데에서 데아에게 말랑하게 굴었다.

데아는 내내 권도언을 무시하며 축제를 즐기다가 결국 푸하하 웃고 말았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요?”

“네. 그 동화 속의 존재가 마치 데아 씨와…….”

“글쎄요.”

데아는 하얀 인어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건네준 음료로 목을 축이고 다시금 웃었다.

“전 공주가 아니고… 길드장님은 왕자가 아니죠.”

거절의 뜻을 뱉는 인어는 눈은 사무치도록 아름다웠다. 권도언의 눈동자 위로 하얀 빛무리가 달라붙었다.

“제 이야기는 새드 엔딩도 아니고요.”

참으로 다정한 거절이다.

권도언은 쓰게 웃었다.

“너무하신 거 알죠.”

“길드장님이 더요.”

“정말 너무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권도언은 단념하지 않았다.

그는 데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려 본인의 뺨에 갖다 대었다. 그 행동해 저 멀리서 백리서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나를 가질 기회를 줄게요.”

당신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나라도 당신에게 주리라.

“원래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눈을 찡긋 올려 웃었다. 자신은 이 생이 다 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고, 사랑이 되지 못한다면 가장 가까운 인간의 위치라도 되겠다며 권도언은 속으로 다짐했다. 몇 번이고.

◈          ◈          ◈

그 후로부터 4년이 더 흘렀다.

인간계의 소식은 간간히 들려 왔다.

석방한 정소진과 함께 찾아온 연가을. 해외에서 이름 꽤나 떨치는 중대형 길드가 된 ‘정의’,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파…….

“권도언 영원히 내쫒으면 안 돼? 저 새끼 영 불길한데.”

“그래, 그래!”

“움 언니가 그러는데, 영 미심쩍은 놈이라 그랬어. 예언자 말을 믿자고!”

태초에게 품는 음습한 눈깔을 파버리고 싶었노라 이위로가 열변을 토했다. 그 옆에서 같이 포도를 주워 먹던 자잔 또한 맞장구를 쳤다.

“좋아. 다음번에는 그렇게 해.”

“어? 정말로?”

“정말?”

4년째 매달 꽃을 사들고 오는 권도언의 직진에 데아 또한 어이없던 참이었다.

최근에는 인간계 가십 예능에 나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에 ‘네. 그러나 연인 관계는 아닙니다.’라고 답한 적이 있었다. ‘왜 연인 관계가 아니죠? 권도언 길드장님이라면 정말 멋진 상대인데!’라는 뒤이은 질문에 반지르르하게 웃으며 ‘그 사람에게 저는 세컨… 아니, 서드일 뿐이더라고요.’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근데, 그게 뭐가 자랑이라고 떠들어 대?

“길드장님은 서드도 아니세요.”

물론 데아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때문에 가장 인기 많은 남자 순위 1위를 달리는―그딴 순위표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싫다― 권도언을 세컨드도 아닌 서드로 두는 눈 높은 사람이 누구냐며 인간계가 시끄러웠다고 했다.

아 진짜… 더 싫다.

“아, 시간 됐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풍경의 태초의 섬 위, 해먹에서 끼익거리며 놀고 있던 데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지금이에요?”

“응. 가자.”

“헉, 대박!”

내면의 마력이 꿈틀 움직였다. 때가 온 것이다.

데아는 다른 인어들을 소집하는 이위로와 자잔을 등지고 바다로 첨벙! 뛰어들었다.

“주군.”

어느덧 대부분의 인원이 보였다. 위치는 어두운 해저의 작고 포근한 방. 트리야를 제외한 모든 1세대 인어가 한곳에 모였다.

“이거야?”

“응.”

여전히 유배 생활을 하지만 예전에 비해 비교적 활동범위가 자유로워진 도라안이 알을 톡톡 건드렸다. 4년 전에 제국에 돌아와 본인들의 권속들과 행동을 함께하는 움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방랑하던 헤타도, 오늘만큼은 이 자리에 있었다.

“뭐야, 므아나는 어디에 있어?”

“여기.”

마지막으로 백리서. 4년 전 다시 제국으로 복귀해 제국 1공대 총책임자이자 기사로 임명된 릴리므아나가 들어와 데아의 옆에 섰다.

탁, 문이 닫히고, 작은 불빛이 바다를 타고 알 주변을 비추었다.

그래, 알. 데아는 4년 전 그대로 침대 위에 놓인 그 알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흔들린다.”

“어, 정말?”

알은 천천히 커지고 투명해졌다. 안에서 웅크린 무엇인가 알의 내부를 톡톡 건드린다.

“와, 와, 나온다!”

“쉿.”

1세대 인어와 2세대 인어, 집 안까지 들어오지 못한 다른 인어들까지 모두가 기다려 왔던 순간이 다가왔다.

생명의 탄생. 다시 돌고 도는 마력의 기적.

데아는 하얗고 작은 손가락이 톡,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작은 막을 찢고 작은 인어가 숨을 내쉬는 광경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아…….”

예상보다 더 대단하다. 수천 년 만에 다시 보는 새로운 권속의 탄생. 데아는 그 탄생의 기운에 가장 먼저 다가갔다.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환영해.”

데아는 작은 아이의 손끝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다정하게 미소했다.

수년이 흘러 조금 기른 하얀 머리카락. 모든 것을 투영하는 눈동자. 여전히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자태. 작은 아이는 자신의 주군을 눈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유우라.”

새롭게 탄생한 아홉 번째 1세대 인어, 유우라는 가만히 다시 만난 태초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온기가 가득 느껴졌다. 아. 이제는 춥지 않다.

모든 생명이 가득 찬 어느 날의 바다.

눈부신 하늘이 세상을 비추며 온 사방을 파도로 물들였다.

@KOI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