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우당당탕!
그러나 곧이어 또 다른 의자가, 꽃병이, 그리고 휴대폰이며 온갖 물건이 날아왔다.
마지막에는 역시나 주먹이었다.
턱!
“잠, 잠시만…….”
“닥쳐. 네가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에 와? 네가 무슨… 무슨 자격으로……!”
당장의 분노에 눈이 돌아버린 하영주가 달려들었다. 하영주는 데아의 멱살을 잡고 한참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주르륵 주저앉았다.
“시발, 진짜…….”
하영주는 힘없이 마른세수를 했다.
“눈 색 존나 특이하네…….”
“…….”
떠오르는 아침 아래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 가장 많은 색의 빛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이데아의 색을 빼앗아간 것 같아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게 느끼는 스스로에게 기가 찼다.
“빨리 해봐.”
하영주는 힘없이 속삭였다.
“변명.”
“난… 몰랐어.”
커튼이 흔들린다. 바람이 들어오고, 데아의 치료를 받은 가윗에게 혈색이 점차 되돌아온다.
“정말 난 몰랐어…….”
데아는 울먹이지도, 구차해지지도 않았다. 그저 사실이라는 듯이 낮게 읊조렸다.
“나도 내가 태초였다는 걸 몰랐어.”
그 안에는 거짓이 없었다. 하영주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시발.”
“어?”
“왜 안 찾아 왔어? 살아 있었다면 소식이라도 알려 줬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야 내가 아, 살아 있구나, 못 오는 사정이라도 있구나, 했을 거 아냐!”
그러나 하영주는 직감했다. 이데아, 얘는…….
“나는… 무서워서, 언니가 배신감을 느낄까 봐……”
이데아, 얘는… 지독한 회피형이었다.
아, 진짜!
“진짜 내가, 진짜, 하… 됐어.”
하영주는 자리에서 탈탈 털고 일어났다. 주홍빛 해가 기다랗게 다리를 뻗었다. 병실을 가로질렀다.
“그래 예전에도 이상하게 인어들이 널 공격 안 하더라니…….”
“…….”
“그래, 어쩐지……. 그럼 나 혼자 개고생한 거네.”
“미안.”
“아냐. 그냥… 그래…….”
하영주는 과거를 회상했다.
5년 전, 이데아의 마지막 모습. 칸나니아에게 공격당해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그때를.
“안 아팠어?”
데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안 아팠냐고.”
“…….”
이렇게 쉽게 풀릴 줄 알았다면 진작에 말을 하는 건데, 왜 그렇게 숨기려고 애를 썼을까?
“아팠어.”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래. 아침이 떠오른다.
“무지하게.”
그때 인간 이데아는 죽었다. 죽고, 태초로서 다시 눈을 떴다.
데아는 말을 아꼈지만 하영주는 어느 정도 짐작한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고, 데아 또한 말을 아꼈다.
먼지가 부유하는 침묵 안, 기적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어…….”
“……?”
가윗의 손이 움찔, 떨렸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눈꺼풀이 파르르 열리고, 색색, 숨이 내쉬어졌다.
덜커덩!
하영주가 의자를 밀치고 일어섰다. 데아 또한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의 재회는 따뜻한 아침,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졌다.
“뭐…….”
가윗이 입을 열었다.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해 쩍쩍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그럼에도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데, 데아 누나, 머리 색 왜 그래……?”
쩍쩍 갈라진 목소리. 어눌하고 느릿하게 내뱉은 첫말에 데아는 작게 웃었다. 하영주가 너스 콜링을 하는 동안, 데아는 뒤로 빠졌다.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환자분!”
확인했으니 되었다.
“누, 누나……?”
“안녕.”
병실이 벌컥! 열리고, 의사와 간호사가 우르르 몰려왔다. 데아는 하영주의 어깨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가윗에게 까딱까딱 손 인사를 하고는 조용히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 그 모습에 가윗의 눈이 커졌다.
‘돌아가야지. 내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데아는 뒤돌아보지 않고 게이트를 넘었다.
◈ ◈ ◈
수많은 나날이 흘러갔다. 길드 여례아와 연구소 MBL 사태를 정리한 건 바로 전 연구 소장 정소진과 여파의 부길드장 하영주였다.
“게이트를 클리어해서 인어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말을 믿었었는데,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언론에 진실을 밝히기 전, 하영주는 정소진을 만났다.
“연구소의 목적은 인어 제국의 몰락이 아닌, 그저 명성만 이용해서 최대한 많은 투자를 받는 것……. 나에게 거짓말을 했었군요, 연구 소장님.”
“전 연구 소장입니다.”
“그래도요.”
하영주는 그 이상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정소진 또한 더 묻지 않았다. 무엇이 서로를 변하게 했는지, 무엇이 서로가 내부 고발자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두 내부 고발자의 증언 아래, 여기은이 구속되었다.
대기업 ‘상연SY’의 차녀. 한국의 독보적인 S급 헌터. 거대 길드 여례아의 길드장. 여기은은 포세이돈과 길드원들을 이용한 살인 혐의와 사기, 협박, 납치 및 뇌물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너무 적게 받은 거 아냐?”
“뒤에 대기업이 버티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을걸.”
“빌어먹을 한국 법…….”
그러나 기업 상연 측에서는 민폐 덩어리에게 마지막 기회라도 주는 듯이 여기은을 대하고 있었다.
이미 내부에서 끈은 떨어졌고, 여례아 소속 헌터들의 내부 고발은 끝없이 이어졌다. 징역 20년을 다 채우고 나온다 해도 분명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으리라.
“얼굴 다 팔린 유명인이니 재활도 쉽지 않을 거야. 아무런 일도 못한 채 사회에 나오는데 그게 무슨 자유겠어.”
길드 여례아는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남아 있던 여례아 헌터 중, 여기은의 뜻에 따랐던 헌터들 또한 줄줄이 구속되었고, 뜻에 따르지 않아 불이익을 받았던 헌터들은 다른 거대 길드들의 스카웃을 받아 모조리 길드를 옮겼기 때문이다.
“여례아 건물 가봤어?”
“아니.”
“텅텅 비어 있어. 건물 유리는 깨져 있고 사람들은 그 안으로 밀가루랑 계란 던지고 있지.”
“아깝게.”
그러나 시민들의 분노는 여례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연구 소장 정소진도 구속됐다는데?”
사각사각 돌에 글을 새기던 펜촉이 우뚝 굳었다.
“그래?”
“으응. 그래도 정소진은 순순히 조사받고 있대. 모든 죄를 인정하고 죗값을 치르겠다고…….”
그리고 연구소 MBL도 실질적으로는 해체되었다. 수많은 사건들로 인해 지친 연구원들이 하나둘 연구소를 떠난 탓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언니, 영영 헌터 기억나? 하영주.”
데아는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벌써 그날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이위로가 인어 꼬리를 만지며 하품을 했다.
“사람들이 지금 포세이돈 연구에 투자한 투자자들 다 멸치 잡듯 잡아내고 있나 본데, 아니나 다를까 여파 길드한테도 따지고 있나 봐.”
“여파 길드는 왜?”
“하영주 부길드장의 직위를 해제시키라고?”
부길드장의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압박이었다.
“그래서, 내려왔대?”
“글쎄? 거기까지는 모르겠는데… 많은 사람들이 요구하니까 내려왔지 않을까?”
데아는 탁,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아가 갑작스레 창을 열자 이위로가 놀라 후다닥 일어섰다.
“어, 어디 가?”
“잠깐 밖에.”
“같이 가!”
이위로는 데아의 창을 타고 훌쩍 넘어갔다.
건너간 창의 건너편은 어둑한 휘장이 늘어지고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순찰을 도는 작은 바닷속 방이었다.
방에 놓인 포근한 침대의 중앙에는 마력으로 만든 알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알은 데아가 제국에 오자마자 만들어 낸 알이었다.
이위로는 괜히 알을 쓰다듬었다.
“아 여기 오는 거였구나.”
“뭔 줄 알았어?”
“갑자기 언니가 인간계라도 넘어가는 줄 알았어.”
그 일이 있던 직후, 데아는 가윗의 병실에서 곧바로 인어 제국으로 넘어왔다.
수많은 피해가 났지만 제국민들은 태초를 이해했고, 동시에 감싸 주었으며 모든 사태의 수습을 위해 모두가 으쌰으쌰 힘을 냈다.
포세이돈의 여파로 인해 여전히 폐허인 곳도 있었지만, 제국 안은 여전히 평화로웠으므로 모두가 그 사건을 금방 잊었다.
“이제 곧 축제가 열려. 갈래?”
피파글랜의 제국에서는 1년에 한 번씩 큰 축제가 열린다. 원래 지지난달에 열렸어야 했던 축제였으나, 지연되어 이제야 열리게 되는 것이다.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 전에, 끝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데아는 이위로가 신나서 알을 끌어안고 축제 때 쓸 가면을 고르는 사이, 몰래 게이트를 열어 넘어갔다.
◈ ◈ ◈
“나 보러 온 거예요?”
권도언이 데아를 보자마자 곱게 웃었다.
“아뇨. 릴림은요?”
“여기요.”
백리서가 묘하게 불만 서린 얼굴로 나타났다.
포세이돈이 무너진 후, 움에게서 ‘이제 제국으로 돌아가도 된다.’라는 말을 받아 냈음에도 데아가 ‘아직은 오지 마.’라고 한 게 꽤나 불만이었던 것 같았다.
물론 다른 뜻은 없었다. 그냥 인간계 일이 정리될 때 까지 S급 헌터로 있어 달라는 요청이었는데…….
데아는 싱긋 웃었다.
“릴림, 곧 제국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같이 갈래?”
백리서의 눈썹이 까딱였다. 그 말인즉슨…….
“이제 돌아오라는 얘기지.”
모든 것은 원래 있어야 하는 곳으로. 바다로. 바다로.
백리서가 그제야 웃었다.
“당연하죠.”
“저도 가도 돼요?”
“올 수 있다면요.”
게이트를 만들지 못하는 가여운 권도언…….
데아는 권도언을 대충 놀리고는 자리를 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영주는 직위 해제가 되지 않았다. 시민들의 무서운 요청을 권도언이 산뜻하게 무시해버린 탓이었다.
“영영 헌터가 직위 해제를 해도 된다며 찾아왔었는데… 뭐, 조금 방황했을 뿐 일을 잘하는데 제가 왜 내치겠어요.”
“반발이 많지 않아요?”
“참 어이가 없죠. 그만큼의 인재를 옆에 갖다 놓고 말을 하던가.”
여론은 하루에 수십 번 바뀌었다. 이 시대 완벽한 핫이슈. 데아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던 랭킹1위 샤샤 헌터가 사실 살아 있었고, F급 헌터로 위장해 길드 통합 팀에 참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더군다나 그가 사실 인어들의 신, 태초였다는 사실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반응이 엇갈렸다. 그러나 그 무엇도 데아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데아 또한 해당 소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 본인을 둘러싼 일상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문의 주인공이 반응이 없으니 곧 반응은 들끓다 사라질 것이다.
“욕만 먹고 있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렇다고 해서 여론이 인어에게 완전히 우호적인 건 아니었다. 인어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도 분명 있었으므로.
그러나 샤샤에 대한 여론은 예전보다 많이 가라앉았고, 적어도 사해의 신이 없던 상태의 인어들의 공격성이, 사해의 신이 돌아오고 나서부터 가라앉은 건 사실이었으므로 시민들은 잠자코 말을 아끼며 상황을 살폈다.
그러던 중, 모두를 사로잡을 이슈가 나타났다.
공식 석상에 이데아, 태초가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