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나는 모든 것을 보고 있었어요. 동시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죠.
음성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조금 후회가 드네요. 그냥, 그냥. 처음부터 이런 폭군 연기는 그만두고… 주군의 옆에 있을걸. 인간인 당신 옆에서, 나도 인간인 척 그냥 살아버릴걸. 세상에 던전이 창궐해도, 모른 척 평범하게 살걸. 언젠가 당신이 혼란스러워 하면 그때 담담하게 위로나 해줄걸. 그럴걸…….
데아는 자신의 앞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하얀 손을 보았다.
어둠 속의 유일한 밝음. 그 손은 참으로 따스했다.
―다 지난 일이죠. 괜찮아요. 그러니까 다시 만나요.
하얗게 피어나 파랗게 지리라.
트리야는 데아의 머리를 어설프게 토닥이다가 검지를 들어 코를 툭, 쳤다.
―그러니까 이제 정말 끝.
“어……?”
그 순간 데아는 눈을 번쩍 떴다.
새파란 창공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은 추락하는 중이었다.
어어?
피비린내가 입 안에서 번졌다.
바람이 귓가를 쉬이익 거칠게 스치는 소리, 어어 하는 소음들, 놀란 비명 소리. 온몸을 강타하는 중력.
“이게 뭔……!”
‘돌아왔다. 현실에 돌아왔어!!’
그것을 깨달은 순간 누군가가 데아의 팔을 잡았다. 떨어지던 중력이 뚝 끊기고, 데아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안겼다.
하늘을 배경으로 휘날리는 익숙한 녹색. 창백한 피부의 대단한 미인. 바로 전에도 봤던 익숙한 얼굴.
“트리…….”
언제 게이트 밖으로 나왔을지 모를 트리야가 추락하는 데아를 덥석 안고 몸을 빙글 돌렸다.
“왜 떨어져. 당신은 위로 올라가야지.”
그는 데아를 위로 올리고, 자신은 떨어져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자신이 일으킨 파도를 딛고 선 주군을 말간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태양 아래 보이는 그의 얼굴이 환했다. 건너편에서 트리야를 보고 경악하는 백리서나, 피파글랜, 다른 인어들의 반응 따위는 알 바 아닌 것 같았다.
“그, 그, 당신! 당신……!”
그때 여기은의 새된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기어코 포세이돈 안으로 들어온 걸까? 그는 칸나니아의 죽음을 보고 한참을 덜덜 떨며 서있다가 트리야를 보자마자 냅다 소리쳤다.
“지원군이었잖아! 지원군이잖아!”
“그는 우리 편이야!”
그리 말하던 칸나니아의 음성이 아직도 생생했다.
‘뭐지? 방금 샤샤 헌터를 도와준 것 같은데. 샤샤 헌터는 태초와 같은 편이잖아? 그러면 저 지원군도 태초의 편인가? 설마 배신?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내 착각인가?’
여기은의 심정을 읽은 건지, 때 맞춰 트리야가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5년 전, 데아가 열어 준 게이트를 넘어갈 때와 완전히 다른 밝은 분위기였다.
“네가 여기은?”
아니다, 정정하겠다. 그는 그냥 누군가를 골려 줄 생각으로 들뜬 상태였다.
“네, 네… 맞습니다.”
“아하, 칸나니아에게 얘기는 미리 들어서 알고는 있는데…….”
‘뭐지? 지원군이 맞나? 방금 그건 역시 내 착각이었나?’
트리야는 답지 않게 제법 친절했다. 그래서 절박한 상황 속, 조금이라도 보이는 동아줄을 믿어버린 여기은은 바로 그 줄을 잡아챘다. 썩은지도 모르고.
“세상에, 신이시어 감사합니다. 당신이 준 마력은 포세이돈 건축으로 잘 썼어요. 그래.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이곳을 나가야만…….”
“그 전에.”
트리야는 손을 내밀었다.
“포세이돈의 핵, 모체는 그 자리에 아직도 있나?”
“네? 네. 네.”
“그것만 있다면 이런 포세이돈을 다시 만드는 건 일도 아냐. 그럼, 모체의 마석은 가져왔나?”
모체의 작동에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핵과 마석.
핵과 달리 마석은 자유롭게 빼내어 이동이 가능했다.
“예? 이, 있는데 왜…….”
“그것만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손을 볼 수 있지.”
상황이 촉박했다. 여기은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안고 인벤토리에서 모체의 마석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선뜻 건네려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자, 잠시만. 내가 당신의 뭘 믿고 이걸 지금……!”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트리야는 그대로 여기은을 발로 밀치고 마석을 빼앗았다. 여기은이 능력을 쓰며 빙결로 트리야를 둘러쌌지만 소용없었다.
와그작!
과자가 부서지듯이 마석이 으깨졌다. 트리야의 손 안에서 한 줌 가루가 흩어지는 마석의 결정들이 바람이 섞여 사라졌다.
태초와 가장 닮은 마력 트리야. 그가 모든 야심의 종말을 선고했다.
여기은 기절할 듯이 놀라고 바로 반격하려다가 바로 제압당했다.
“이……! 이! 아악! 악!”
자기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치던 여기은은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빠르게 이동 스크롤을 꺼내 북북 찢었다. 상급 이동 스크롤을 다섯 개 겹쳐 그냥 찢어버린 그가 도망치듯 게이트를 넘어갔다.
홀로 남은 트리야는 뒤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이것도 못하고 있었다니. 실망이 커, 릴리므아나.”
“닥쳐. 안 하고 있던 거니까.”
백리서가 검을 치켜들었다.
“사형당할 준비나 해.”
“저런… 그건 좀 별로인데.”
미안하지만 죄를 뉘우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트리야는 악인답게 웃었다.
한편, 위로 올라간 데아는 그대로 높은 곳에서 미친 듯이 돌진하는 해룡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정신을 차린 건가!
“어.”
능력을 쓰니 다시 거부감 없이 능력이 방출되었다. 그러나 철창이 복구된 것도, 괴물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괴물이 당장은 몸을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하는 것이 좋아.
괴물의 원인은 지나친 억눌림. 데아는 끝에 끝까지 가고서야 그것의 이유를 깨달았다. 해결할 수 있는 방안 또한.
―그저 솔직해지면 돼.
다정한 주군을 ‘연기’하지 말 것. 최고의 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외면하지 말 것.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되, 그것이 본인이 되게 하지 말 것.
그래. 이 모든 건 트리야가 예전부터 누누이 말했던 모든 것과 일치했다.
―어디로 갈 거지?
해룡이 물었다.
“이제… 하나가 남았지.”
모든 것의 종착지. 포세이돈의 모체. 그 자체.
“연구실로 가서, 핵을 부숴야해.”
연구실 안의 그것. 유우라. 그를 구원해 주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어도 어쩔 수 없었다.
데아는 어느 결국 타협했다. 미안해. 그러나 가능한 빠르게 널…….
피우우우―!!
“어?”
“저건…….”
그때 하늘을 뚫고 날아오르는 한 줄기의 빛이 보였다. 신호탄. 그것도 범위가 넓은…….
“저 위치 어디지?”
“제국이야. 신전 쪽.”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데아는 곧바로 창을 열었다.
“나부터 갈게!”
지금 제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 ◈
―잘, 보고 있는 거 맞겠지?
마지막 1세대 인어. 헤타는 아무래도 믿음직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물론 신분이 신분인지라 입 밖으로 이 말을 뱉지는 못했지만…….
―이 씨… 무섭네.
자잔은 땀이 나는 손을 문질러 닦았다. 흰 천을 뒤집어쓰고 미끼 역할을 수행한 지 몇 분째. 침입자는 점차 자잔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무작정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인어 맞아? 인간 아냐? 하지만 어떤 간 큰 인간이 제국, 심지어 신전에 처들어오겠…….
턱!
그때 자잔은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갑자기 튀어나온 턱에 발을 부딪혀 중심을 잃은 것이다.
―어어!
잘 보니 그건 우연히 튀어나온 턱이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던져 놓은 장애물이었다. 설마, 설마!
“드디어!”
휘익! 억센 손이 자잔의 목덜미를 잡았다. 자잔은 곧바로 천을 벗기려는 괴한의 손길을, 그리고 즉각적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날카로운 날붙이를 보았다.
젠장, 젠장! 지금 죽게 생겼잖아! 마지막 1세대 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자잔은 손을 들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그는 하늘을 향해 신호탄을 쏘았다.
◈ ◈ ◈
나무토막을 주워, ‘태초’의 발을 향해 날린 하영주는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잡았다!”
피우우우―! 신호탄이 날아갔다.
어? 잡고 보니 비로소 위화감이 들었다.
태초가 호위 하나 없이 거리를 걸어 다닌다고? 이런 애들 장난 같은 함정에 쉽게 빠진다고?
“설마…….”
천을 벗기자 그 안에는 연기가 나는 권총 모양 신호탄을 손에 든 누군가가 보였다.
혼란이 가득 들어찬 눈동자. 이 인어는 태초가 아냐.
그렇다면 어디에?
“잡아라!”
―아, 알았어!
휘익!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헤타가 그대로 벽을 밟고 들이닥쳤다. 하영주는 그대로 얼굴로 불쑥 들어온 검을 너클로 비틀어 막았다. 코끝에 검이 닿았다 떨어졌다.
“뭐야!”
익숙한 얼굴이지만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영주는 발을 딛고 그대로 돌려 차 헤타의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헤타는 하영주의 발을 엎드려 피하고, 그대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두두두…….
“!!”
그때, 근처에 있던 돌들이 진동하며 떠올랐다.
그 순간 하영주는 본인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이동 스크롤!’
찢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전에…….
“너라도 대신 죽이고 가마!”
헛수고를 하게 한 미끼 역할. 흰 천을 내던진 낯선 인어에게로 창끝의 방향을 바꿨다.
자잔이 뭐야! 소리를 질렀지만 하영주는 발악하듯 주먹을 치켜들었다. 어두운 빛이 몰려드는 차가운 너클. 하영주의 몸이 낮춰지고, 그대로 자잔의 급소에 주먹을 처넣으려던 순간.
파악!
바람이 멈췄다.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하영주는 하얀 빛 중앙에서 자신과 인어 사이를 가로막은 한 인영을 보았다.
자신의 공격을 허무하리만큼 흘려보낸 실력자. 능숙하게 주먹을 막고 그대로 힘을 줘 하영주를 뒤로 밀쳐낸 익숙한 악력.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모두를 대변해 앞에 선 군림자.
“너…….”
익숙하지 않은 머리 색, 익숙하지 않은 투명한 눈 색. 그러나 익숙한 얼굴.
하영주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데아…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