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비켜, 비켜!
인어 제국에 도착한 데아가 바로 행동한 건 인어화였다.
반가운 검은 인어 꼬리가 휘영청 늘어지고, 굴러다니던 천을 잡아 얼굴을 가렸다. 곧장 혁명군 본부…로 향할까 했지만,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왕궁으로 향했다.
‘여기 시간대가 언제지?’
그때였다.
뿌우우우―!!
뿔피리 소리. 밤이 왔다.
거리를 지나다니던 인어들이 화들짝 놀라 집으로 돌아가고, 거리에 간부들이 돌아다녔다. 당연하게도 데아는 갈 곳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잡혀버렸다.
―너 뭐야!
―이름과 얼굴을 밝혀!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저놈은 도서관에서 나섰다가 그대로 죽은 인어고, 쟤는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2세대 인어고…….
―왜 왕궁 앞을 서성이고 있지?!
데아는 머리를 굴렸다.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왕궁으로 들어갈 방법. 거기서 더해, 트리야의 흥미를 이끌어 나를 찾아오게 만들 방법.
그건 하나뿐이었다.
“이곳에 계신 제왕님을 만나러 왔어요.”
―어? 뭐야, 왜 성대로 말을…….
―뭐야? 제왕님을 왜! 수상한 놈이다!
휘익! 창이 내리꽂혔지만 데아는 능숙하게 피한 다음 이어 말했다. 얼이 빠진 건 눈앞의 인어들이었다.
―실, 실력자야. 다 소집해!
“잡아가세요.”
데아는 냉큼 양 손목을 내밀었다. 소란을 듣고 몰려든 인어들이 얼떨결에 데아의 손목을 묶었다.
“대신 제왕님에게 전해 주세요.”
트리야. 너는 이미 이데아가 누군지 안다.
“작은 나라의 절벽, 그곳에서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고.”
◈ ◈ ◈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제왕님이 누구를 구한 적이 있대!
―뭐? 그 폭… 아, 아니. 말이 헛나왔다. 못 들은 걸로 해줘.
―나는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제왕님은 강하시고 정의로우시지. 진정한 군주의 자질을 가지셨어!
―그렇다고 해도 감사 인사를 하겠다며 무작정 들어온 그 인어는 좀 이상해.
―그나저나 들었어? 그 인어… 성대로 말을 한다던데?
데아는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초조함 따윈 없었다. 그저 ‘곧 있으면 트리야가 나를 찾으러 오겠지!’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 없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기어코 사흘, 나흘이 지났을 때 데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트리야가 날 만나러 오지 않는다.
“뭐야, 넌?”
물론 아무도 데아를 보러 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소문의 죄수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찾아온 도라안이나, 몇 2세대 인어, 그리고 데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인하기 위해 온 링이 가끔 얼굴을 비추었다.
“인어인데?”
“얻다 대고 반말이야. 너도 내가 세력이 적은 인어라서 무시하냐? 어?”
도라안이 펄펄 뛰었다. 그러가나 말거나, 데아는 귀를 후볐다.
“왜 제왕님은 날 안 만나러 오는 거야, 도라안?”
“이상하지, 분명 기억 속에 없는 인어인데 성대로 말을 하고, 인간이 둔갑한 게 아닐까 싶었는데 꼬리는 인어의 꼬리가 맞고……. 게다가 물속에서 숨도 쉰다니…….”
“내 말에 대답 좀 해줘.”
“혁명군 쪽에서 보낸 첩자인가? 하지만 이렇게 티 나게 보냈다고? 썩 똑똑한 것 같지도 않은데……. 흐응,”
“야.”
“야? 너 방금 나한테 야라고 했냐?”
도라안은 펄펄 뛰다가 제풀에 지쳐서 나갔다.
데아는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다.
결국 감옥에 갇힌 지 다섯째 날이 되는 날, 데아는 감옥을 탈출을 감행했다.
우지끈!
철창은 엿가락처럼 곱게 휘었다. 데아는 부드럽게 밖으로 나가 간수 한 명을 때려잡은 뒤, 옷을 뺏어 입었다. 모자를 쓰고 브로치를 매고 망토를 걸쳤다. 그리고 후다닥 복도로 나가 소리를… 칠까 했는데, 성대로 말을 하는 건 티가 나니까 관뒀다.
대신 데아는 비틀거리며 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간수들은 곧바로 휘어진 철창과 난장판이 된 감옥 내부를 발견했고, 소리쳤다.
―죄수가 사라졌다!
―죄수가 탈출했어!!
소식은 간부에게까지 전해졌다. 당직을 서던 간부들이 우르르 나와 데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익숙한 얼굴들.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 그리고…….
“자잔.”
데아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 시간대는 아직 나와 자잔이 만나지 않은 시간대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지금의 자잔은 나를 모른다.
―어?
무장을 하고 달려가던 어린아이 모습의 자잔이 홀린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쏠리는 인파에 밀려 서로의 모습은 금방 사라졌다.
‘어디로 가야 하지?’
파란 물결이 일렁인다.
왕궁으로 가야 하나? 트리야는 그곳에 있을까? 내가 설령 트리야를 만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
이곳의 트리야는… 이곳이 꿈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그건 충동이었다. 데아는 발걸음을 돌려 지하 감옥,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아주 익숙한 시간의 향취. 한 번밖에 가지 못한 미지의 통로. 5년 전, 칸나니아의 공격을 피해 숨었던 곳.
트리야가 태초를 위해 만들었던 비밀 정원으로 가자.
“헉, 허억…….”
뭐에 홀린 듯이 뛰었다. 두 발로, 그리고 인어의 꼬리로. 어둠과 밝음을 순식간에 스쳐 밖으로 향했다.
그 끝에는…….
“…….”
홀로 정원에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있었다.
물결치는 짙은 초록. 데아는 그 얼굴을 담기 전에 목소리부터 귀에 담았다.
“어떤 동굴이 있었지.”
섬뜩한 음성이 속삭였다.
“아주 깊은 해저에, 나도 감히 정체를 알 수 없던 동굴이 있었어.”
두 눈이 마주쳤다. 트리야가 꿈결처럼 웃었다.
“결국 알아냈지만.”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이것이 꿈이라고 확신을 박듯이. 모든 것은 허상일 뿐이라고 말하듯이.
“역시 너였구나. 트리야.”
괴물에게 마력을 전달해 준 인어, 동시에 나를 도와줬던 누군가.
“네가…….”
“그 동굴에는.”
트리야의 모습이 흔들렸다. 그의 눈만이 실제처럼 또렷했다.
“철창이 있었지.”
트리야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그의 눈가가 휘었다.
“철창 안에 뭐가 있었는지, 그걸 본 내가 뭘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
“정말로… 상상도 못한 상황이었어, 이데아.”
트리야가 느릿하게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거 아나? ‘창’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아. 나는 네가 만들어 준 창을 넘어 간 후로, 제멋대로인 시간들을 스치고 수없이 많은 길을 잃어버렸었어.”
트리야는 이곳이 꿈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는 지금 데아가 창을 만들어 넘어가게 해준 후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해당 세계에서 수많은 시간을 다시 보냈어. 맞아. 그랬지.”
새롭게 넘어간 새로운 세계. 그곳에서 보낸 억겁의 시간들.
“그러더니 신호 하나가 오더군.”
그리고 찾아온 칸나니아의 신호.
트리야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온화했던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난 거부할 수 없었어요. 칸나니아의 의도가 어찌되었듯, 나는 나에게 주어진 힘을 통해 당신을 보러갈 수 있었으니까.”
수많은 시간을 떠돌고 얻은 능력. 태초의 창을 닮을 수 있는 능력.
트리야는 ‘창’을 다룰 수 있는 네 번째 1세대 인어가 되었다.
“내가 아까 철창 안에 뭐가 있었는지 말을 안 했었죠.”
손이 잡혔다.
“그 안에는 당신이 있었어요.”
트리야는 데아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주변이 밝게, 어둡게, 바다였다가, 지상이었다가. 끊임없이 바뀌었다.
“내가 늘 안타까워했던 당신이.”
트리야는 태초를 존경하는 동시에 동정했다. 주군의 의무에 먹혀 본인의 아픔을 숨기는 태초를 싫어했고 좋아했다.
“저는 그것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트리야는 연구실에서 우연히 본 이데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데아는 모체의 환상에 걸려 있었고, 바로 옆 연구실에서 그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트리야는 데아의 내부를 엿볼 수 있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는 철창 속의 괴물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것을 했어요.”
웅크린 재앙. 태초가 억눌렀던 그의 본성. 트리야는 그것을 해방시켰다.
작은 염원이면 충분했다.
트리야는 곧바로 마력을 집어넣어 철창에 금을 냈다. 데아는 뭔가가 자신의 손을 찔렀다고 착각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범인은 유우라가 아니라 트리야였던 것이다.
“도착했어요.”
트리야는 훅, 데아의 등을 떠밀었다. 뭔가를 눈치챈 데아가 뒤를 돌았다.
그곳에 놓인 우그러진 철창. 그 안은 비어 있었다. 트리야가 아프게 웃었다.
“왜요. 내가 사과라도 할 줄 알았어요?”
솔직히 머리에 딱밤을 놓아주고 싶기는 했다. 오십대 정도만.
“별거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첫 번째 권속. 나는 전 우주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인어. 우리의 마력은 아주 비슷해요.”
트리야는 빈 철창을 걷어찼다.
“비슷하기에 할 수 있었죠. 오직 나만이 당신을 해방시킬 수 있었어. 또 위험에 발 벗고 나서는 당신을 보기 싫어서 이 어두운 해저의 철창에 빛을 보여 줬어. 깨부수고 나오라 손짓했어. 그래서 했어. 했는데…….”
트리야는 잠시 침묵했다.
“당신이 싫어하네요.”
정적이 흘렀다.
“나는 언제나 사과나 하네요? 하지만 이미 늦었고 당신은 선택해야 해.”
주변 환경이 또 한 번 바뀌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수습하러 갈 테니까.”
나의 주군.
바뀐 환경에서 퐁당! 소리가 났다.
발 한쪽이 빠진 그곳은 처음의 웅덩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엔 이데아, 자신 혼자였다. 동굴도, 철창도, 왕궁도 정원도, 소음도. 트리야도 없었다.
막연한 정적 속에서 데아는 주먹을 쥐었다.
그래. 내가 선택해야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이 괴물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길. 인간을 먹어서, 인간성을 키우는 일.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뭐 어때요?
그때 트리야의 흐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꼭 인간이 아니어도 괜찮잖아요. 저기… 절반만 인간인 자가 있네요. 솔직히 저걸 먹어서 인간성이 커질 것 같지는 않지만, 당신에게 필요한 건 그것뿐이 아니니까.
웅덩이 안에는 여전히 백리서와 싸우는 이데아, 자신과 그들을 지켜보며 서둘러 여례아 헌터들을 모으는 칸나니아가 보였다.
―먹어요. 먹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요.
트리야가 재차 충동질했다. 그 순간, 웅덩이 속에 비치던 이데아가 어딘가로 훌쩍 뛰어내렸다.
‘어? 쟤 어디 가!’
철창 속에 갇혀 있던 태초는 정도를 몰랐다. 그는 백리서와 피파글랜을 훌쩍 지나친 다음, 인간 헌터들의 선두에 선 칸나니아에게로 뛰어들었다.
‘야!!’
그건 순식간이었다.
다가올 비극을 예감하고, 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몸 깊숙한 곳에서 비명이 터져 올랐다.
웅덩이 속의 이데아. 철창 밖의 괴물, 태초는 칸나니아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그 속을 헤집고, 마석을 꺼내 우걱우걱 씹어 넘겼다.
‘이런 미친……!’
칸나니아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했다는 듯이 데아를 쳐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무릎이 휘청이며 꺾였다.
그가 영광된 꿈을 놓고 절명했다.
숨이 막혔다. 슬프기보다는 이 상황이 갑작스러운 탓이 더 컸다.
그때, 데아는 기력을 잃고 휘청이며 허공에서 추락했다.
‘어……! 거기서 떨어지면 바닥으로 바로 추락하는 건데!’
동시에 생성되어 있던 하얀 게이트가 거칠게 휘몰아쳤고, 그 안에서 하얗고 긴 팔이 튀어나왔다.
뚝, 그 절정의 순간, 화면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자. 어서 가요.
트리야의 음성이 흐릿하게 울렸다.
―이제는 정말로 갈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