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지금의 백리서는 내가 태초인지 확신을 못하고 있다.
데아는 생각의 가장 위에 해당 문장을 올렸다.
다만 심증으로만 확신하고 있겠지…….
“자아, 그럼 이제 헌터 등급을 말해 줄 생각이 생겼어요?”
백리서가 운전하는 세단에 올라타서 휙휙 지나가는 서울의 건물들을 구경하고 있던 참이었다. 데아는 멍하니 현실을 파악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원래의 나는 뭐라고 이야기 했었지?
‘상태 창’
[상태 창]
[등급 : N]
이데아―헌터명 : 사샤
마력 : 21(+53)(+50)
체력 : 20(+12)(+50)
생명력 : 30(+12)(+50)
속도 : 21(+12)(+50)
―획득한 스킬―
[물속의 발자취(N) : 물속에서 제약 없이 빠른 행동력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심해의 눈(N) :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
[타고난 몰이꾼(N) : 인어의 주목을 받는 동안 속도가 +60 증가합니다.]
[바다의 경배(N) :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서(N) : 이건 유폐된 자들의 목소리이다.]
[인어화(N): 나는 그대의 본질. 그대의 자유는 하얗다.]
[우리의 온화한 종착지(N) : 우리는 당신으로 인하여 서로와 대화합니다.]
[사해를 삼키는 염원](N) :모른 것을 탐욕스럽게 탐하십시오.]
‘상태 창은 그대로야.’
“저는…….”
백리서와 권도언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데아는 결심했다.
“N이네요.”
우선 예전과 비슷하게 가자.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니.
그리고 동시에 확신했다. 이건 꿈이다. 정신세계에 의식만 살아 5년 전을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잠깐, 그러면 인어 제국은? 지금 그 폭군 트리야가 지배하고 있는 상태인 건가? 설마 나 처음부터 다시… 다 해결해야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아니지?
‘분명 뭔가가 있어.’
데아는 여파 길드 안에 들어가 기숙사를 배정받았다. 모든 것이 5년 전과 그대로였다. 데아는 거울을 봤다. 5년 전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단발의 이데아가 보였다.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열쇠가 있을 거야.”
그리고 대부분의 열쇠는 원인과 일치하다. 그러니까 데아가 이 꿈에 들어오게 된 원인을 찾아 해결만 하면 나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게 뭐였지?”
바로 백리서와 싸우던 나. ‘태초’옆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게이트였다. 그 게이트를 보자마자 중력을 느꼈고, 빨려 들어가는 느낌 끝에 5년 전에 도달했다.
‘그래. 그 게이트와 관련이 있어!’
똑, 똑.
“네?”
노크 소리에 기숙사 방문을 열자 인상 좋은 헌터가 서있었다.
“훈련장으로 오시겠어요? 등급 측정을 해야 해서요.”
그래, 그러고 보니 대강 등급 측정을 하고, 주작을 행했던 때가 이쯤이던가.
데아는 곧바로 훈련장으로 올라갔다. 정말 기묘하게도 모든 것이 같았다.
“안녕!”
하영주도, 가윗도. 공략 1팀의 반가운 얼굴들도.
“우리 이기고 오는 거야!”
갑작스러웠던 공략도, 보스 인어의 죽음도. 데아는 모든 것을 멍하니 관망하며 해결책을 찾았다.
어차피 이곳은 꿈이니까 누가 죽든, 누가 살든 상관없어. 나는 내 목적을 찾아야 해. 하루빨리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헌터와 길드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이긴 하거든요.”
모든 것이 과거와 같도록 노력했다. 알아도 모르는 척, 행동해도 행동하지 않은 척. 모든 것이 그대로인 세상 속에서 나만 눈치챌 수 있는 변수가 있나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헌터명 생각해 둔 건 있어요?”
“…있어요.”
그러나 이때는 그냥 넘어가지를 못했다. 충동이었다.
“아하, 있어요?”
스포트라이트가 팡팡 터지는 어느 날의 밤. 기자들이 시끄럽게 데아의 헌터명을 요구하던 첫 번째 던전 공략 직후.
혹여나 백리서 앞에서 어색한 모습이 티가 날까 일부러 백리서를 피해 다니던 데아는 이 순간만큼은 그냥 넘어가질 못했다. 후회할 걸 알면서.
“뭔데요?”
“샤샤.”
백리서의 노란 눈이 잠시 멈췄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 감정을 예측하기 힘든 표정. 데아는 재차 말했다.
“샤샤, 요.”
수천 년 전, 릴리므아나가 태초에게 지어 주었다가 트리야에게 곧바로 기각당한 그 이름.
데아는 웃었다.
“이상하게 이 이름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
“누가 애기해 줬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요.”
“…….”
“이름도 어쩐지 빛나는 것 같고, 좋잖아요. 쉬워서 기억도 잘 되고. 이걸 어디서 들었었지? 꿈에서 들었나?”
오기였다. 지금쯤 데아가 태초인지 아닌지 분명 헛갈려하고 있을 백리서에게 주는 아량이기도 했다.
어차피 꿈인데 뭐 어때. 그래. 다 꿈인데, 이제까지 다 같게 행동했었는데 발견한 게 하나라도 있었나? 어쩌면 다르게 하면 뭔가 힌트가 나올지도 몰랐다. 데아는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어울려요?”
“네.”
백리서가 배시시 웃었다.
신에게 맹세코 데아는 그가 그렇게 웃는 걸 난생 처음 봤다.
“정말 잘 어울려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움이 찾아왔다.
“네, 네. 연옥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제 손녀딸이에요.”
“저 사람이야?”
노인으로 둔갑한 채. 저 옆에 있는 손녀딸은 분명 3세대 인어 유우라겠지.
연옥. 움. 데아는 하영주와 가윗과 함께 그들을 창문으로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같았다.
“만나고 싶어서요.”
“아무리 데아 씨라고 해도…….”
“아, 샤샤 러브 콜이 얼마나 왔더라?”
데아는 곧바로 움과 만났다.
“안녕하세요. 헌터님. 연옥이라고 합니다.”
기억 속의 얼굴. 그래. 이런 순한 얼굴을 하고 날 속였단 말이지. 다 지나간 일에 뒤끝을 두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네, 예언자님. 제가 뭐 하나만 여쭈어봐도 될까요?”
“헌터님의 부탁이라면 들어 드려야죠. 뭔가요?”
데아는 음… 뜸을 들이다가 싱긋 웃었다.
“꿈을 꿔요.”
“꿈이요?”
손에 쥔 코코아가 따뜻하다. 여기서 내가 너에게 힌트를 줘도 될까? 주면 너는 많은 것을 알아차리지 않을까. 예언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꿈속에서 저는 인어예요. 바다를 헤엄치죠.”
“…….”
“이상하죠. 저는 인어를 사냥하는 헌터인데, 꿈에서는 인어가 되다니.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아 더 큰 걱정이에요.”
움은 눈치가 빠르다. 움은 언제나 기민하게 상대를 파악했다.
아니나 다를까 움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비산했다. 미래 예지. 너와 나의 미래.
“…흥미롭군요.”
“그렇죠? 단순 개꿈일까 생각을 해봤는데…….”
어쩌면 움에게는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좋은 책사가 되어 주었으니까.
그래. 움에게는 말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너무 기가 차서 말이죠. 그냥 넘어가질 못하겠더라고요.”
“기가 차다면…….”
작은 힌트면 충분할 것이다.
“뭐겠어요. 잃어버린 인어 하나 찾겠다고 애먼 남의 세계를 망가뜨린 행위죠.”
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이걸 칭찬을 해야 할지, 타박을 해야 할지…….”
“…….”
“그래도 같은 1세대끼리는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데아는 피식 웃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목격한 움을 향해.
“뭐 해, 움. 왜 능력을 쓰다 말았어.”
데아는 살며시 키득거렸다.
“마저 써봐. 너라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여기에 온 이유.”
“…….”
“나에겐 이게 꿈이거든.”
과거로의 회귀. 환상계 능력의 연장선.
움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데아는 역동하는 움의 눈을 보며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내가 과거로 돌아온 것이 새롭게 생겨난 게이트와 관련이 있다면 그건 아마…….
“트리야.”
움이 툭 뱉자마자 데아의 상념이 깨졌다.
“그를 찾아가세요. 므아나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움이 속삭였다.
“그에게 답이 있어요.”
설명은 필요 없었다. 묘하게 익숙했던 게이트의 기운. 데아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밖을 향해 뛰쳐나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당장 가야 해.”
릴림에게는 알려서 안 돼. 릴림은 내가 혼자 가는 걸 무척이나 싫어할 거다. 그건 예감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데아는 몰래 자리를 뜨려다가 갑작스러운 던전 공략 인원으로 차출되어 끌려왔다.
“또 공략이요?”
“어. 이런 일이 한두 번이냐?”
“그건 그래요…….”
오히려 좋았다. 던전 안에서 몰래 길을 잃은 척, 뒤로 빠져 바다로 잠수해 가는 제국으로 가면 더 빠를 테니까. 오히려 더 신중하게 제국에 다가설 수 있겠지!
“인어가 나타났다!”
“뒤로 수비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데아는 뒤로 빠져 몸을 숨겼다. 좋아 여기 아무도 안 보지?
그대로 일어서 밖으로 나간 다음, 마침 바다로 통하는 강을 발견해 신발을 벗고 뛰어들려는 찰나.
“데아야, 뭐 해.”
백리서가 바로 쫒아왔다.
데아는 천연덕스럽게 뒷짐을 지고 빙글 몸을 돌렸다.
“음, 잠시 길을 잃었어요.”
“거짓말하지 마.”
분위기가 바뀌었다. 백리서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바다로 가려고 했어?”
‘뛰어들려고 했어?’가 아닌 ‘바다로 가려고 했어?’라니.
“뭐야, 무슨 일이야?”
“누가 낙오됐어?”
심상치 않은 기운에 같이 공략하던 헌터들도 하나둘 몰려들었다. 데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건 다 거짓이야. 내 꿈이야. 의식 세계.
일어나면 기억뿐일 허상.
“네. 바다로 가려고 했어요.”
백리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곳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 너는 따라와서는 안 된다. 이건 오롯이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니.
“하지만 곧바로 가면 릴림, 네가 따라오겠지?”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가장 빠르게 제국으로 향하는 길. 태초의 권능. 데아는 가볍게 선을 그어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 모두에게 충격을 끼얹은 하얀 빛이 비처럼 쏟아졌다. 하영주와 가윗이 입을 틀어막고, 백리서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주군.”
데아는 대답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주군!”
그대로 빛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바다의 경배를 빼어 들고 백리서에게 따라오지 말라 경고를 하며.
“다음에 만나.”
제대로 된 세상에서. 진짜로.
“주군!!”
백리서가 소리를 치는 순간, 데아는 게이트 속으로 완전히 뛰어들었다
가자. 모든 것을 바로잡으러.
눈을 뜨자 익숙한 해저의 도시가 나타났다. 밤이 되면 뿔피리가 울리고, 간부들이 짝을 지어 거리를 순찰하는 공포의 제국. 트리야가 제왕으로 군림한 도시.
정말 이곳에 다시 올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