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화
피파글랜의 전기가 가라앉은 것도, 모든 이의 능력이사라진 것도. 백리서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를 알고 있었다.
“100년 전 그때와…….”
인간 남자 필립의 뒤를 밟던 도중 마주친 병기. 한순간에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들었던 필립의 병기. 그것과 느낌이 아주 유사했다.
피파글랜은 눈을 찌푸렸다.
“이 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멀지 않은 곳, 힘을 못 쓰는 상태의 이데아가 있다.
그것을 깨달은 피파글랜과 백리서는 칸나니아를 제치고 달렸다.
◈ ◈ ◈
모체의 능력이 환각계였던가? 그런데 이게 마력 제어를 곁들인…….
“그래…….”
데아는 연구소에서 김유라. 유우라를 보았을 때 느낀 환상을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번쩍 눈을 뜨고 유리창을 쾅쾅 두드린 그 끔찍한 환상을.
그런 능력이었군. 역시.
스르륵!
―이런!
“!!”
마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로 인해 태초의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해룡은 그 순간 터지듯 사라졌고, 데아는 엉덩방아를 찧기 전 가까스로 착지했다.
“해룡!”
머리가 지끈거린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력이 없어져 당황하는 무수한 군대들이 보였다.
―데아! 데, 아니, 태초 님!
“유리. …지금 상황은?”
―마력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이유는 불명이고…….
―저, 저기를 보십시오!
저 멀리서 가짜 인어들과 새롭게 들어온 여례아의 헌터들이 기세등등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병기…….’
칸나니아는 인간들에게 인어의 권능을 선사했다. 인간들은 병기의 설계도를 발견했고, 그것을 토대로 포세이돈에 접목시켰다.
그리고 포세이돈이 지정한 ‘던전’은 전부 그 병기의 사정거리 안이 되었다.
“이곳을 나가!”
그러나 늦었을 거다.
마력이 없는 인어는 느리고, 약하다.
“지금 인어들은 힘을 못 쓴다!! 공격해!”
“우리가 이기는 싸움이다!! 물에 들어가면 건져내서 죽여!”
인간 헌터들은 일제히 주머니에서 파훼석을 꺼내 깨뜨렸다.
저 돌멩이가 저렇게 많았다고?
“안 돼…….”
인어들은 동요했다. 힘이 나오질 않는다.
갑작스럽게 변한 승패의 판도. 저 멀리 스트리머가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무력하게 당해야 하는가?
―피, 피파글랜 님은! 어디에!
―므아나 님은 도대체……!
사실 데아는 그 둘이 이 자리에 없음에 감사했다.
둘이라고 해서 상황이 100년 전과 다르진 않을 거다. 그 둘이 무너지는 걸 보느니, 차라리…….
―도와줄까?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뻗는 목소리. 데아는 눈을 감았다.
이마를 만지니 불보다 뜨거웠다. 내가 이렇게나 열이 나고 있었구나. 그걸 이제야 알았다.
―내가 말했었지. 너는 분명 다시 나를 찾게 될 거라고.
시발, 시발. 차라리…….
‘너는 무슨 방법 없어?’
“거의 다 왔다!! 인어를 죽여라!!”
“배를 갈라서 마석을 꺼내!”
그때 익숙한 붉은 거창이 눈앞에 내리꽂혔다.
데아는 인간과 인어 사이에 서서 자신만만하게 미소하는 칸나니아를 흐린 시선으로 보았다.
저 얼굴. 그래. 저 의기양양한 얼굴.
정신이 흔들렸다. 데아는 철창 밖의 괴물의 멱살을 잡았다.
그래, 너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너는. 내가 비는 이 순간을.
‘너는 무슨 방법 없냐고!!’
그러자 철창 밖의 괴물. 분명 자신의 모습이었을 과거의 태초가 웃었다.
―나에게 방법이 있다고 하면, 따라 줄 건가?
그 순간 눈앞에 상태 창이 펼쳐졌다.
마지막 미공개 스킬. 그것이 환하게 빛났다.
[상태 창]
[등급 : N]
이데아―헌터명 : 사샤
마력 : 21(+53)(+50)
체력 : 20(+12)(+50)
생명력 : 30(+12)(+50)
속도 : 21(+12)(+50)
―획득한 스킬―
[물속의 발자취(N) : 물속에서 제약 없이 빠른 행동력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심해의 눈(N) : 당신은 승리할 것입니다.]
[타고난 몰이꾼(N) : 인어의 주목을 받는 동안 속도가 +60 증가합니다.]
[바다의 경배(N) : 머리끝까지 물에 젖은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강력한 죽음입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서(N) : 이건 유폐된 자들의 목소리이다.]
[인어화(N): 나는 그대의 본질. 그대의 자유는 하얗다.]
[우리의 온화한 종착지(N) : 우리는 당신으로 인하여 서로와 대화합니다.]
―미획득 스킬―
[○○○ ○○○ ○○](??)
―내가 도와줄게. 저들을 지켜야 하잖아? 내가 그 힘을 줄 테니…….
본성이 웃었다.
―내 말을 따라.
아무래도 뇌가 홀린 모양이다.
데아가 그 손을 잡는 순간,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괴물, 태초가 홀로 일어섰다.
그가 히죽 웃었다.
―좋은 선택이야.
거대한 손이 다가와 데아의 눈을 가렸다.
그래. 이렇게 쉬운 방법을 왜 이제야 찾고 그래. 나 섭섭하게…….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데아는 그대로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 ◈ ◈
―데, 아니, 태초 님?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정예 호위 기사의 명예를 살려 인어들을 진정시키고 무기를 뽑아들던 참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 내가 가장 먼저 나서면, 가장 먼저 죽지 않을까?
두려움으로 손이 떨렸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탁! 자리를 박치고 나가려고 했을 때, 방금 전 까지 지친 기색으로 앉아 있던 데아가 일어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언제 일어섰는지도 알 수 없었다.
―태초 님? 기력을 차리신 겁니까?
그렇다면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그래, 태초 님이다. 그는 바로 사해의 신이었다! 그가 기운을 차렸다면 아무리 마력이 없어도 뭔가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턱!
―……어?
태초는 웃으며 유리의 검을 빼앗았다.
―태초 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이질감.
‘이게 뭐지? 누구지?’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존재. 유리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윙윙 돌아갔다.
―데…….
유리는 저도 모르게 뱉었다.
―……누구세요?
뭔가 다르다. 아주 다르다. 그러나 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유리의 검을 대충 휘둘러 보더니 산뜻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적군 쪽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이 마치 만족스러운 만찬을 향해 가는 귀족 소녀처럼 가벼웠다.
유리는 소름이 돋았다.
―잠……!
―유리, 뭐 하는 거야?
―아니 그게…….
―태초 님이 왜? 우리를 위해 나서 주시고 있잖아!
인어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태초 님! 태초 님!
―므아나 님과 피파글랜 님은 어디 계셔?
유리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서 빨리 그분들을 불러 와!!
데아는 이제 뛰고 있었다. 광활한 폐허를 밟는 발걸음은 하얗고, 웃음소리는 들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돌멩이 하나 깨뜨렸다고 이런 마력 제한 상태에서 멀쩡하다니, 그 원리가 너무 궁금한데…….’
“다시 만나 뵙습니다.”
카앙―!
칸나니아가 데아의 앞길을 막았다. 흑색 암석을 가르는 무거운 힘의 원천.
그래. 칸나니아. 데아는 환하게 웃었다. 칸나니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너의 공격은 너무도 그대로야. 그래서 재미가 없어.”
챙! 카앙!!
고작 보급형 검. 그것 하나를 들고 데아는 칸나니아의 급소를 단번에 공격했다.
늘 자신의 권속들에게 최대치의 힘으로 공격하지 않는 태초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 이럴 수 있었잖아……!”
그 눈이 붉었다.
심해의 눈, 타고난 몰이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을 아낌없이 이용해 목표물을 절망으로 이끌었다. 사냥꾼의 면모가 아낌없이 분출되었다.
“뭐야……!”
칸나니아는 거창을 바닥에 꽂고 몸을 돌렸다.
휘익! 발이 그대로 수직으로 솟고, 그 여파로 인한 광풍이 거세게 불었지만 정작 나가떨어진 건 칸나니아였다.
“뭡니까!”
휘이익!!
“!!”
칸나니아의 얼굴에 푸른 선이 그어졌다.
“무슨……!”
현재의 태초는 분명 마력이 없을 텐데, 예상대로라면 100년 전에 인간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무너져야 하는데!
“헉, 허억. 하아…….”
피부가 찢기고 근육이 베여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칸나니아는 자신을 향해 야차처럼 달려드는 포식자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크게 달라졌어.
―미획득 스킬―
[○○○ ○○○ ○○](??)
해당 상태 창의 글씨는 끊임없이 변했다.
[사○○ ○키○ 염원](N)
고양되는 해방감. 데아는 다시 한번 칸나니아를 찌른 다음 옆으로 베어 냈다.
칸나니아의 팔이 갈라졌다.
“넌 학습 능력이 없어. 지난번에 나를 공격해서…….”
데아는 살짝 칸나니아의 화상자국을 농락하듯 만졌다가 떼어 냈다.
“이런 걸 달아 놓고. 또 홀로 나에게 달려드니?”
칸나니아는 결국 신호를 보냈다. 그의 신호에 따라 뒤에서 몰려오던 사람들이 연막을 피우고, 가짜 인어들은 미친 듯이 달려와 데아를 포위했다.
칸나니아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나쁘지 않았다.
“하나, 둘…….”
죽여도 괜찮은 생명들. 마음껏 공격성을 드러내도 괜찮은 자들. 그것들이 참으로 많구나.
칸나니아는 적이 늘어날수록 짙게 웃는 데아를 혼란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격.
그 순간 붉은 핏물이 사방에 퍼졌다.
“으으, 으아, 으아악!!”
“으아악!!으악!!”
“유리하다며! 힘을 못 쓸 거라며!!”
[사해를 ○키는 염원](N)
데아는 굴러 떨어진 사람의 시체를 짓이기며 나아갔다.
발밑에 붉은 핏덩이가 구르고, 사람의 뼈가 부러졌다.
그래, 이럴 수 있었잖아……. 이러고 싶었잖아. 그 모든 날의 밤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할 때마다. 자신에 대해 저항하는 무리가 보일 때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잖아.
[사해를 삼키는 염원](N)
: 모른 것을 탐욕스럽게 탐하십시오.
“흐아악!!”
데아는 쓰러진 가짜 인어의 목덜미를 잡아 뜯었다. 그리고 그대로 집어삼켰다.
가짜 인어에게만 기록된 새로운 것들. 데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대로 손을 휘둘러 능력을 사용했다.
[사해를 삼키는 염원](N)
100년 전, 병기가 여전히 작동되고 있었음에도 능력을 쓸 수 있던 이유. 대륙에 가까웠던 필립의 왕국이 물에 잠겼던 이유.
마력이 없다면, 끌어오면 될 일.
바다는 온 세상에 있을지니. 승리는 그대의 손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데아는 손을 올렸다. 구름이 몰려들고, 세상이 점차 그의 뜻대로 움직였다.
쿠르릉…….
“뭐, 뭐야?”
인간 헌터들의 당황은 개미들의 하소연과 같고, 그들의 공포는 미천한 미생물의 생존 의지만도 못하다.
먼 과거의 실패의 보안. 같은 상황 다른 결과. 먼 과거, 머저리 왕자 필립이 꾸몄던 모략의 엔딩.
그건 나의 새로운 각성임을 모두가 몰랐다.
“이게 무슨 소리야!!”
“잠시만! 저, 저게 뭐죠?!”
바다가 없다면 옮기면 될 일. 마력이 없다면 불러오면 될 일. 너희들은 이렇게나 신기한 발전을 이륙해 냈구나. 그래, 이건 배울 만하지. 이건 얻어갈 만하지.
“…이건 나쁘지 않지.”
태초의 고목은 온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호흡한다. 데아는 그곳에서 마력을 빌려와 스킬을 발동시켰다.
너희들이 발을 디디고 선 육지를 감싸는 건 그 무엇도 아닌 바다. 데아는 모두의 시선 안에서 손을 뻗었다.
하얀 손가락이 허공을 덧그리고, 그것이 주먹을 쥔 순간,
퍼억―!!
“……!!”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체 없이 흩어졌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철퍽! 붉은 피가 데아의 하얀 머리카락에 튀었다. 피에 흥건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마치 5년 전처럼 검었다.
“흐, 히이익……!”
“말, 말도 안 돼!! 저런 힘이 있다고는 아무도 말 안 해줬잖아!!”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아니. 바다다.
두두두두―!!
저대한 지진이 몰려들며 바다와 하늘이 뒤바뀌었다. 자신의 머리 위로 몰려드는 거대한 해저. 그것이 해일처럼 내리꽂혔다.
콰과과과과―!!!
“시, 시청자 여러분 보, 보이세요? 이게 무슨……!”
육지가 가라앉고, 바다가 그 자리를 메꿨다.
어푸어푸, 가까스로 한 인어에게 올라탄 스트리머는 기가 질려 헐떡였다.
검은 파도 위에 고고하게 선 핏빛 인영. 허공을 밟고 인간들의 죽음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
샤샤 헌터. 그가 불러온 바다 아래서는 그 어떤 마력제어도 기능을 다하리라.
“이리 나와, 해룡.”
충만해진 마력 속에서 해룡이 다시 태어났다.
“와……!”
인어들도, 스트리머도, 그 광경을 방송을 통해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도 입을 틀어막았다.
고고한 어둠 속 탄생하는 바다의 용. 거친 곡선을 그으며 하늘에 획을 긋는 영물. 모든 이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러나 스트리머는 다른 이유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채팅창도 난리가 난 상태였다.
“보이십니, 까? 와, 이건, 이건…….”
수많은 소문에 의하면 해룡은 태초 전용의 소환수이다.
“저, 저도 제가 이상한 생각 하는 것 같긴 하거든요. 그렇죠? 그도 그렇잖아요. 하지만 물론, 사람이 어떻게 저런, 바다를 다루고, 예? 인어가 따르고…….”
캠코더 화면이 덜덜 떨렸다.
“어쩌면 말이죠, 태초는, 태초는, 바로…….”
그때 샤샤 헌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여전히 붉었다. 그가 살풋 미소했다. 이토록 많은 학살을 저지르고도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듯한 괴물의 얼굴로.
“…샤샤. 그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