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데아는 뚜벅뚜벅 다가가 캠코더를 뺏었다.
“어, 어어…….”
무력하게 캠코더를 뺏긴 스트리머가 겁에 질린 얼굴을 하든 말든 데아는 내부 파일을 쭉 넘겼다.
삑, 삑, 삑. 워낙 흔들리고 어두워 많은 것은 찍지 못한 것 같지만… 푸른 피를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 부분은 확실하게 찍힌 모양이었다.
데아는 쓰게 웃었다. 이걸 어떻게 항변하지. 아니, 항변해야 하나?
그때 용기를 낸 누군가가 소리쳤다.
“샤샤 헌터! 방금 그…….”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지만.
“그…….”
데아는 거짓말을 하는 대신 싱긋 웃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툭, 데아는 교묘하게 해당 파일만 빼낸 후 다시 캠코더를 스트리머에게 넘겼다. 그리고 얼굴을 쓱 문질러 피를 말끔하게 닦았다.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어젯밤에 이곳의 사람들 모두가 비명횡사할 뻔했다는 거죠. 여례아의 손에.”
그러니 지금 나를 경계하지 마.
사람들은 여전히 경계하면서도 묘하게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푸른 피를 데아가 아닌 남의 피로 착각이라도 한 걸까.
‘시간이 없어.’
데아는 이제 정말 시간이 없음을 직감했다.
그 무엇보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없었다. 상황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우리 일정을 앞당깁시다.”
“네? 그게 무슨…….”
“포세이돈 15층으로 가죠.”
데아는 숨을 내쉬었다.
“바로 내일 밤에.”
◈ ◈ ◈
데아는 스트리머를 다른 곳으로 불러냈다.
“15층에 따라올 수 있겠어요?”
“아, 아니 전, 그냥 일반인…….”
“F급 헌터죠? 그럴듯한 공격스킬은 없어서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는 없어 보이지만…….”
데아는 친밀하게 웃었다.
“거물을 물어다 줄 테니까 잘해 보자고요. 재밌게.”
예전부터 그리기만 했던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다.
그렇게 여기고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잠시.”
“네.”
데아는 아무도 없는 숲 쪽으로 서둘러 달렸다. 깊은 어둠 속에 고개를 숙였다.
“쿨럭!”
뇌가 그대로 빠져나오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푸른 피가 손바닥을 넘치고 흘러내렸다.
“…….”
어쩐지, 그렇게 능력을 썼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그래도…….”
데아는 슬쩍 능력을 썼다. 물을 불러내고, 게이트를 만들었다. 물론, 시도만 했다.
“아.”
그러나 그 즉시 핑― 도는 현기증이 일었다.
철창 안의 괴물이 얄팍한 막 너머 웃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그 정도의 힘을 다시 한 번만 더 쓰면 나는 곧 자유가 될 거야.
그렇게 된다면 너는 두 번 다시 이성을 다시 찾게 될 수 없을 거야.
태초는 자애로운 주군이 아닌 괴물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될 것이라고.
◈ ◈ ◈
“저는 분명 말렸습니다, 길드장님.”
연구원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샤샤 헌터에게 한번에 죽어버린 괴물들. 그 모든 괴물들이 완성작에 가깝다지만 최종 승인을 거치지 않은 시험작이라는 것은 여기은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눈앞의 초조함에 강제 출전 명령을 내렸다.
결과는?
역시나였고.
진작 칸나니아에게 태초의 정체를 들어 알고 있던 정소진만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연구의 진척도가 상당히 밀렸어요. 이제는 정말… 저희도 한계입니다. 길드장님도 아시잖아요. 투자는 하나둘 끊기고 있고, 세간에서는 포세이돈에 대한 불신을 품는 헌터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투자자들의 여론도 심상치 않아요. 이러다 정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게 생겼단 말입니다.”
―…….
“지난번 헌터 홀에서 있었던 인어와의 결탁 의혹, 다 부정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다는 걸 아시죠. 길드장님이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남은 투자가 다 끊기기 전에 뭐라도 수습을 빨리…….”
‘그러니까 왜, 왜, 못 이길 시비를 거냐고……!’
그래, 모를 수 있었다. 몰라서 용감해질 수는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학습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샤샤에게 그렇게 깨져 놓고 또 덤벼? 정말 이기고 싶으면 샤샤가 없는 곳으로 사람들을 유인해 습격하거나, 치밀한 관찰과 조사를 통해 후일을 도모해야 하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무작정 부딪쳐?
“길드장님. 제가…….”
정소진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이제부터 제가 모든 권한을 사용하겠습니다. 길드장님의 권한을 없애겠다는 거, 맞습니다.”
휴대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내 툭, 끊겼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이 빌어먹을 회피형 인간이!
정소진은 다시 여기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여례아 비서실로 전화를 걸었다.
“제가 전에 요청한 자료는 준비되었나요?”
―그게… 길드장님이 열람 허가를 해주지 않으셔서,
“…왜…….”
―헌터 홀 오프닝 파티 참가 명단이라니……. 주최자분께 연락을 넣었지만 그분은 현재 인어와의 결탁 혐의로 인해 자택 구금 처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아…….”
정소진은 분명히 보았다. 헌터 홀 오프닝 파티에서 본 동생을.
동생과 가족을 찾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시간을 썼다. 여기은은 그런 절박한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네가 나를 돕는다면… 나도 네 가족을 찾는 일을 도와줄게. 너무 걱정하지 마, 정소진. 그리고 혹시 네가 유명해지면 가족들이 너를 보고 찾아오지 않을까……?”
그것에 넘어갔다. 이토록 여기은의 말을 듣고, 여기은 아래서 그를 도왔던 것. 성과를 내어 언론에 얼굴을 비추었던 것. 그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 자신의 가족을 찾아준다는 그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은은 헌터 홀 오프닝 참가 명단을 넘기는 일을 극도로 회피하고 있었다. 여동생과 관련되어있다고 말을 했음에도 소용없었다.
이쯤 되니 정소진은 알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 안에 여동생, 연가을이 있었어.’
그리고 여기은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모종의 이유로 숨기고 있다.
정소진은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내 가족에게 해만 끼치지 마세요. 해를 끼쳤다간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감히 너까지 날 무시해?’라고 하는 여기은의 환상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정소진은 그대로 연구실 문을 발로 차고 나갔다.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 ◈ ◈
데아는 변환석을 착용하지 않았다.
석파란이 다급하게 설한지 어디 있는지 아냐며 묻고 다녔지만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거나, 모른다고 대답했다.
“이번 일로 인해 사람들이 또 죽었어요. 시체도 못 찾는 경우도 많고요…….”
석파란이 훌쩍였지만 위로해 줄 틈이 없었다. 데아는 본모습 그대로 섬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들과 밤새 계획을 짰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흘러갔고, 마침내 실행할 때가 왔다.
“저는 던전 안에 참여 안 할게요.”
둘만 있을 수 있는 장소로 데아를 부른 연가을이 말했다.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정소진. 그러니까 저희 언니를 설득해 보려고요.”
연이은 죽음의 위기는 연가을의 소극적인 태도를 바꿔 놓았다.
“헌터 홀에서 분명히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했거든요. 그 얼굴은… 여기은 길드장님이 말한 것처럼 매정하지 않았어요. 전 분명 제가 언니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러면 어쩌면 MBL이 우리 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마음대로 해.”
데아는 사탕을 아그작 깨물고 픽 웃었다.
“조심하고.”
“네.”
◈ ◈ ◈
모두가 잠든 밤. 데아는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 백리서.
“내일이야. 릴림.”
―그렇게 서둘러 날짜를 잡으신 겁니까?
“당연히 너도 올 거지?”
―당연히…….
“그래. 그럼 됐어.”
백리서는 잠시 침묵했다.
“알겠습니다.”
백리서와의 통화를 종료한 데아가 또 전화를 건 사람은 권도언이었다.
“길드장님. 혹시 023 길드장님 하고 연락돼요?”
―지금 저한테 연락하고서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게 다른 여자 안부예요?
“지금 저랑 장난할 시간은 있으시고요?”
―하하, 안 넘어가네. 무슨 일이에요?
데아는 짤막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포세이돈 15층에 들어가 뭘 할 것인지. 그리고 여파가 취해야 할 자세와 도움 또한.
―흥미롭네요. 그나저나 그 방법이 통하려면 아마… 포세이돈 공략 시작하기 전에 여파에 들르셔야 할 거예요.
“그런가요?”
―네. 서로 준비할 게 많거든요. 아직 하루의 시간이 남았네요. 기자들은 제가 모을게요.
‘기자…….’
“괜찮겠죠?”
―그건 제가 데아 씨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기자. 양날의 검. 그러나 데아에게는 치명상만 입혔던 짜증나는 작자들.
하지만.
“쓸모가 있다면 이용하는 게 합리적이겠죠.
―네. 요즘 사회는 단순해서 정공법이 잘 통하니까요.
“지금 저 단순하다고 비꼬신 거예요?”
―설마요.
그리고 권도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해드려야 하는 말씀이 있어요. 하영주가 사라졌더라고요.
“네?”
아니, 길드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포세이돈 앞에서 하영주의 차량과 동승인은 발견되었는데, 정작 본인은 없었어요. 근처 CCTV를 돌려본 결과, 비틀거리며 포세이돈 안으로 들어간 것까지는 확인되었는데 그 이상의 소식은 없는 걸 봐서는…….
“설마 죽은 건 아니겠죠.”
―글쎄요?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권도언이 으음…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선 알고만 계세요. 혹시 찾으면 따로 말씀드릴게요.
“네. 네.”
―그리고 요청 주신 건도 제가 차현에게 따로 말해 놓을게요. 수고 많았어요.
뚝, 전화가 끊겼다.
“수고가 많기는, 이제 시작인데…….”
◈ ◈ ◈
그다음 날 아침, 전국이 뒤집혔다.
노출된 정보 없이 홀연히 클리어된 포세이돈 14층. 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어떤 경로로 14층을 클리어 했는지 몹시 궁금해했지만 나오는 정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제까지 형식적인 정보라도 제공되었던 이전 게이트 클리어와는 딴판이었다.
주전자의 관심이 끓는 물을 부글부글 끓이기 시작하는 찰나,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을 소식이 떠올랐다.
[속보] 포세이돈 15층 공략 확정… ‘샤샤 헌터의 참전’
[사회] 포세이돈 마지막 층 공략. 이제 시간문제? 그에 따른 헌터계의 주목… 중략.
[속보] ‘전설의 귀환’ 헌터 샤샤. 15층 전격 출전. 공략 날짜는 바로 오늘 밤.
이제 남은 층은 15층 단 하나인 상태에서 초대형 미끼가 던져졌다. 사람들은 그 떡밥을 향해 와르륵 달려들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아직 5년 사이의 일이 불투명한데, 혹시 말해 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갑자기 나타나 포세이돈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 포세이돈 14층 공략과 관련이 있으십니까!”
엄청난 수의 기자들은 숫제 승냥이처럼 달려들었다.
샤샤는 현재 대한민국 최고 몸값, 최고 인기를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헌터다. 전설이기도 하고, 신화이기도 한, 대체 불가능의 헌터. 기자들은 기자로서, 그리고 인간적인 호기심으로 샤샤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노코멘트. 노코멘트.”
끊임없이 길을 막자 결국 데아가 능력을 써서 사람들을 헤쳐 나갔다.
“다 도착했어요?”
“헌터님이 가장 늦으셨어요.”
“저 기자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데아는 머쓱하게 웃었다.
사실 포세이돈을 담당하는 협회에서는 데아에게 포세이돈 공략권을 주지 않았다. 물론 예상했던 바였다. 그 협회의 뒷배는 다름 아닌 여례아였으니까.
그래서 데아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8톤 트럭이 되기로 했다. 부아앙 달려 포세이돈 입구에 냅다 박아버리는 무데뽀 말이다.
“이거 서동요 기법 같았어요. 공략권 받지도 않았는데 소문부터 내서 무작정 돌진하는 거!”
“비슷하네요.”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번쩍이며 서있고, 모든 국민들의 관심도 이곳으로 쏠렸다. 아무리 협회라도 여기서 돌아가라고 하지는 못…….
“돌아가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