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헤타가 딸꾹질을 했다.
“걱정하지마세요. 사해의 신은…….”
네놈들 눈앞에 있다.
“보통 신전 안에 있으니까요. 왕궁에는 잘 가지 않아요.”
“그 다섯 명은 너무 적어요. 샤샤 헌터. 저희 전부를 데리고 가세요.”
그때 석파란이 용기 있게 나섰다.
“이건 우리가 인어들을 신뢰해야 하는 만큼, 인어들도 우리 헌터들을 신뢰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협업이죠. 그동안 적대했던 역사가 더 많은 만큼, 그 길이 쉽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해요.”
석파란은 숨을 골랐다.
“그러니 모두를 데리고 가주시면 안 될까요? 꼭… 제가 직접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고 힘을 빌려 달라 청하고 싶어요.”
설득력 있었다.
석파란은 데아의 투명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데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두 가죠.”
다른 제국의 주민들을 피해 돌고 돌아 왕궁 안으로 도착했다.
하얀 돌로 부드럽게 다듬어진 기둥과, 장식물이 스쳐 지나갔다. 헌터들은 웅장하고도 고급스러운 내부에 입을 쩍 벌렸다.
“쉿.”
“네, 네.”
보통 사람의 다섯 배 높이의 거대하고 화려한 순백의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트리야를 만나기 위해 수 없이 서성였던 짜증스러운 알현실의 문. 지금은 데아는 그곳에 인간 헌터 샤샤의 자격으로 서있었다.
텅, 텅, 텅!
데아가 고리를 두드려 노크 소리를 내자 끼이이익… 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헌터들이 데아의 뒤를 따랐다.
“그래… 왔군요.”
그 안에는 한껏 위엄을 드러낸 피파글랜이 높은 옥좌에 앉아 있었다. 옥좌의 뒤로 나있는 길쭉한 창 아래 태양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위대하신 해저의 불꽃, 피파글랜 폐하를 뵙습니다.”
데아는 과장되게 인사를 했다. 그 자리에 위치한 무수한 호위 기사도, 시종들도 엄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들은 이미 다 데아와 말을 맞춰 두었다.
“아는 척하지 마.”
존경하는 태초 님을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냐며 펄펄 뛰던 인어들은 인간들 또한 그 자리에 온다는 말을 들은 순간 생각을 바꿔 계획에 동참했다. 인어들은 인간 놈들에게 우리의 우아함을 보여 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혼란에 찬 눈으로 보고 있는 건 헤타뿐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왕권이 한 번 더 뒤집어진 건가? 이게 무슨 일이지?’
“그래. 샤샤 헌터, 왔군요?”
“……? 방금 누님이 뭐라고.”
“쉿.”
옥좌에 걸치듯 앉은 피파글랜이 빛나는 금테 안경을 슬쩍 내렸다. 데아가 재차 인사하자 옆에서 헤타도 얼떨결에 같이 인사했다.
“위, 위대하신 해저의 불꽃……? 피, 피파글랜 폐하를 뵙습니다……?”
어수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피파글랜은 꽤나 그런 헤타가 웃겼는지 너그럽게 웃어넘겼다,
“오느라 피곤하진 않았나요? 하도 이것저것 몸을 혹사하는 일을 해서 걱정이 한두 번 된 게 아니랍니다. 이번에도 무슨 사고를 쳤으면, 어떡해서라도 이걸 주민들과 기사들에게 알리고 그대를 그대로 잡아와… 아냐. 여기까지 하죠.”
주군이 아닌 인간 친구 ‘샤샤’로 대해 달라고 한 것뿐인데 피파글랜은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헌터들은 ‘우와 정말로 친하신가 봐.’ 정도의 반응이었지만.
그때였다. 석파란이 데아에게 흘끗 눈길을 주었다. 데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석파란은 앞으로 걸어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헌터 석파란입니다.”
피파글랜은 석파란을 이미 호텔 헌터 홀 오프닝에서 본 적이 있었다.
피파글랜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아하게 턱을 괴자 석파란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많은 시간들이 석파란에게서 나왔다. 석파란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덜덜 떨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또렷하게 발성했다.
포세이돈의 의구점, 우리가 알아낸 것. 길드와 연구소의 횡포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길.
“그건 바로 인어와 인간의 협력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이죠.”
타당한 논증과 논리가 모두에게 들려왔다. 인간들과 협업해서 인어들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차분하게 나열되었다.
“감히 요청합니다. 저희와 손을 잡아 주십시오. 그 대가로, 저희는 인어 제국이 위험해질 수 있는 모든 인간들의 자료를 파기하고, 넘기겠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타협점을 찾아 원활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입니다.”
마치 유능한 직원의 하반기 실적 발표를 보는 것 같았다. 어느새 피파글랜도 흥미진진하게 발표를… 아니, 제안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쁘지 않군.”
―폐하!
옆에서 정말로 이럴 거냐는 듯이 시종들이 웅성거렸지만 피파글랜은 이미 처음부터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이건 또 의외로군. 나쁘지 않은 인재가 있어.”
말하는 당돌함은 그저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그러나 적대 관계의 황제를 눈앞에 두고 선을 지켜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했다. 그건 뛰어난 협상가의 기질이었다.
“그, 그럼……!”
“꽤나 솔깃한 제안이야.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피파글랜은 우아하게 옥좌에서 내려왔다.
“그렇다면 우리 쪽의 조건도 있어야겠지? 첫째, 그대들이 하급 인어를 포함한 모든 인어를 공격한다면 그 즉시 동맹은 취소다.”
꿀꺽, 누가 침을 삼켰다.
“둘째, 샤샤 헌터는 나의 친밀한 동료로, 대부분의 나의 의견은 그를 통해 전달될 것이니, 그에게 거역하지 말 것.”
데아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셋째, 이전에 말했던 모든 것을 지키고, 샤샤 헌터를 위험에 빠뜨리지 마라.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즉시 신호탄을 터뜨려 알리도록.”
피파글랜은 석파란의 앞에 성큼 다가와 섰다.
“그대가 이곳의 대표인가?”
“…네?”
석파란은 일순 당황했지만 아무도 그를 대신해 나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피파글랜은 석파란의 손을 잡았다. 찌릿, 금빛의 맹세의 서가 실금처럼 손목에 그어졌다.
“이 모든 조건을 지켜 준다면 인어 제국은 그대들이 이 세계에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지키고, 구하고, 그대들이 적대하는 인간들을 똑같이 적대할 것을 맹세하겠어.”
“…….”
“그대도 맹세하는가?”
“네, 네!”
우웅―! 빛이 확 퍼져 나가고, 바로 가라앉았다.
맹세의 서를 여기서 쓰다니. 저건…….
“저거 그거 아냐? 맹세 안 지키면 한쪽이 죽는…….”
“헉……!”
아니었다. 아무런 효과도 없다. 데아의 눈이 짜해졌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주제에 화려하기만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남에게 위압감‘만’ 줄 때 종종 쓰는 예쁜 허수아비가 바로 저것이었다.
아주 인간들 놀리기에 도가 텄구나, 피파글랜…….
“그럼 이만 저희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데아는 웃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아시다시피 시간이 없어서요.”
“없다뇨?”
피파글랜이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손님은 응당 다과로 대접하는 게…….”
“아뇨. 아뇨. 물론 저희를 생각해 주시는 폐하의 아량이 바다만큼이나 깊고 넓어 감동을 받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지만, 애석하게도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필멸의 삶을 사는 인간들이잖습니까. 그러니 부디 저희들을 위해 창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섬으로 바로 이어지면 좋겠군요.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피파글랜이 팍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훅 다가와 속삭였다
“일부러 제가 잔소리 하는 거 듣기 싫어서 이러는…….”
“자, 자, 나갑시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혹시 다음에도 위험에 처한다면 아무나 소리를 질러요. 저 밖에 있는 하급 인어들에게 언제나 친절하시고요. 바다에 빠지면 구하러 와줄 확률이 높으니까!”
“샤샤.”
“여러분, 저 멀리 나무 보이세요? 저게 바로 태초의 고목이라는 건데, 주변에만 가도 강한 마력으로 결계가 쳐져 있어 안전하답니다. 악의를 가진 것들은 주변에도 얼씬할 수 없기에 가서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이에요.”
“샤…….”
“자, 인어 제국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다 봤으면 이만 해산합니다, 마침 창, 아니, 게이트도 열렸네요.”
말과 다르게 친절하게 창을 열어 준 피파글랜은 불만 가득히 데아를 바라보았지만 데아는 속으로만 손을 샥샥 비비고는 사람들을 밖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윽고 알현실에 데아밖에 남지 않았을 때, 피파글랜은 기어코 폭탄을 터뜨렸다.
“주군. 지금 창을 아예 열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신 건…….”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상태 악화?”
―뭐라고요?
―데아야, 뭐?
―네에?
―바다님?
―네에에??
피파글랜의 말에 헤타는 물론 뒤에 호위 기사로 서있던 유리와 제이제이, 그리고 헌터들을 데려다준 하급 인어와 그냥 지나가는 시종들까지 모조리 시선이 집중되었다.
“별거 아냐. 괜찮아.”
―별게 아니라뇨!
호위 기사로 있던 유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창을 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태초 님. 부디 설명을…….
인어들의 눈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아차, 데아는 입을 가렸다.
불안은 불신으로, 불신은 약화로 이어진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어떡하지?
당연히 안심시켜야 했다.
내 몸 상태와 상관없이 너희들은 안전할 거라는 안심을.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인간들이 자꾸 제국을 넘보고 있어. 열지 않았는데도 홀로 열리는 포세이돈의 게이트가 그 예지.”
모두의 안전을 위해. 전쟁을 저지시켜야 한다. 데아는 유리에게 다가가 손을 토닥였다. 가장 다정하게. 든든하게.
“어차피 내가 치명상을 입는다면 곧바로 해룡에게 신호가 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혹여나 내가 쓰러진다면…….”
가장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 뇌. 그걸 가져가. 알겠지? 난 다시 너희를 기억할 수 있어.”
―…….
유리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지만 데아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피파글랜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지금 그게 무슨…….”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너희들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야. ‘태초’가 사라지는 일도 없을 거고.”
“주군. 잠시만…….”
“그걸 위해 여기까지 왔어.”
소중하게 키운 제국의 번영을 위해. 태초의 형질은 이렇다. 그건 섭리와 같아서, 데아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헤타.”
“네?”
“너 마석 몇 개지?”
그건 그거고. 포세이돈 14층의 공략을 위해서 보스의 마석은 필요하다. 1세대 인어들은 보통 마석을 네다섯 개씩, 많으면 수십 개씩 지니고 다니기에 하나가 없어져도 괜찮았다.
“다섯 개…입니다. 하나 드릴까요?”
“응. 나중에 돌려줄게.”
헤타를 욱, 토하듯 마석을 꺼내 싹싹 닦고는 건네주었다. 엄지손가락만큼이나 작은 검정 마석이었다.
이걸로 포세이돈 14층 클리어 알람이 떴겠지.
“고마워. 이제 돌아갈게.”
그리고 게이트를 넘은 순간이었다. 인어 제국의 모습이 사라지고 익숙한 섬 안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샤, 샤샤 헌터!! 큰일 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