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흩어져!”
총알은 빗나갔지만 또 다른 총알이 날아오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거야.”
“설마, 섬 안의 CCTV?”
“가능성 있어.”
일단은 90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을 숨기는 게 우선이었다.
파도는 깊고 빠르게, 온 세상의 시야를 가려라. 데아는 모두가 혼비백산이 된 사이 홀로 섰다. 검은 총구가 데아를 향했다.
“야, 야, 설한지!”
비가 왔다.
잘 보니 이건 비가 아니라 솟아오른 거대한 파도가 뚝뚝 흘리는 물방울이었다.
사람들은 무심코 고개를 들고 경악했다.
“뭐, 뭐야!”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파도가 밀려온다. 촌에 있는 아주 작은 항구 하나쯤은 그대로 삼켜버리고 입을 닦을 해일이었다.
격한 파도의 등장에 권총을 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저, 저거 뭐야!”
“숨 참아.”
90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은 데아의 한마디에 홀린 듯이 숨을 들이마셨다.
목적을 가진 바다는 그 존재만으로 생명을 부순다.
“한지야, 너, 너 코피……!”
피는 흘렸지만 머리는 개운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사방이 트였다. 비로소 숨을 쉬는 느낌이다. 데아는 권총을 든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다가 파도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그들이 저편으로 밀려나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며 미소했다.
“숨 들이마시라니까 왜 여기까지 왔어…….”
―있지. 잘 봐. 가장 쉬운 길이 있어.
철창 안의 괴물이 다시 눈을 떴다.
―왜 그동안 부정했던 거야?
가장 쉬운 길. 그건 그냥 상대를 밀어버리는 것. 인어 제국에 대해 피해를 끼치는 모든 인간을 죽이고 모른 척하는 것.
그 어떤 인어도 데아의 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아가 최대한 멀리했던 방법이기도 했다.
이유는 그저 단 하나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가 괴물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 살려, 끄, 끄억…….”
또 하나의 생명이 가라앉았다.
섬사람들은 애초에 숨을 들이마시고 벽을 잡고 버티고 있거나 능력을 써 멀리 피신했지만 권총을 든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방심한 그대로 파도에 잡아먹혔다.
“살……!”
또 하나의 생명이 죽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내가 죽이지 않았으면 우리가 죽었을 거야. 쉬운 방법이 있다면 쉬운 방법을 택해야지. 그렇고말고.
“한지야……?”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았다. 그래. 괜찮았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데아는 웃으며 심호흡을 했다. 코피가 주르륵 흘렀지만 닦아 냈다.
“정리됐네. 갈까?”
“너, 괜찮은 거… 맞지?”
데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웃었다.
“당연하지. 괜찮아.”
◈ ◈ ◈
“방금 그 파도 뭐였지? 갑자기 쳤어!”
“지, 진짜 신은 있나? 우, 우리 편인가?”
사람들은 다시금 모였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버려진 항구 안, 선발대는 출발했다.
“택시!”
“쉿.”
택시 두 대를 나눠서 각자 다른 루트로 돌아서 서울로 들어갔다.
그렇게 현금 결제를 하고 나오는 길, 선릉역이 보였다.
“여기부터는 긴장 풀어도 돼요.”
“하아……. 네.”
양철민만 없었더라면 당당하게 곧바로 게이트를 타고 들어가 권도언을 끌어냈을 텐데…….
데아는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제가 다녀올게요. 다 여기 계세요.”
“으응.”
데아는 홀로 데스크 직원에게 갔다.
“권도언 길드장님을 만나 뵙고 싶은데요.”
“길드장님을요? 어… 혹시 약속을 따로 잡으셨나요?”
“그럼요. 소라 아직도 못 돌려받았다고 말씀드리면 나오실 거예요.”
데스크 직원은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데아의 말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 직후, 느긋한 걸음 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기고만장하게 쫙 펴진 입가가 심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권도언이었다.
“여기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
“릴림은 어디 있어요?”
권도언의 눈이 살풋 가늘어졌다.
“절 불러 놓고 처음으로 하는 말이 백리서 얘기예요?”
“아무튼, 저랑 빨리 말 맞춰 놔요.”
데아는 저 멀리 유리창 너머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양철민을 흘끗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아하.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저기 피어싱 한 남자애 보여요? 쟤 빼고는 제가 인어인 것도, 샤샤인 것도 다 알아요. 길드장님은 그냥 적당히 장단에만 맞춰 주세요.”
“그렇게 하면 제가 얻는 건 뭐죠?”
권도언은 살짝 비웃었다.
“시간을 내어 데아 씨를 도우면… 저에게 뭐가 떨어지냐는 말이에요.”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간을 보는 것. 그건 권도언의 나쁜 버릇이다.
“왜 말을 그렇게 해요?”
데아는 기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검은 눈동자 아래 숨겨져 있는 건 명백한 조소였다.
아. 권도언은 데아가 뭔가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못 도와줘서 안달인 주제에…….”
“…….”
권도언은 대꾸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데아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게 두 명씩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올라오라고 했다.
50층에 있는 게스트 회의실. 딸깍, 그곳의 불이 켜졌다.
“어서오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궈, 권도언 길드장님.”
“안녕하세요. 전, 전 양철민이라고 합니다.”
“저희 구면이죠?”
“아, 기억하시는구나…….”
“네. 그리고 설명은 들었습니다.”
권도언은 심술을 부리기로 했다.
“그런데 어떡하죠? 샤샤 헌터는 여기 없는데…….”
몰래 빠져나가 변환석을 풀고 다시 오려던 데아가 우뚝 굳었다.
“네?”
“말씀하신 대로 샤샤 헌터는 인어들과 어느 정도 친분관계가 있거든요. 종종 포세이돈을 통해 안에 들어가기도 해요. 저에겐 따로 연락 수단이 있으니 말은 드려 볼게요.”
무슨 꿍꿍이야!
“아… 안에 계시는군요. 어쩔 수 없죠.”
배협이 미친 듯이 데아를 곁눈질했지만 권도언은 뻔뻔하게 고개를 돌렸다. 패닉에 빠진 건 양철민 하나였다.
“어, 어떡하지? 그러면 계획이 처음부터 어그러지는……. 아 진짜…….”
데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진행되어도 나쁠 건 없지. 그렇지. 곧 포세이돈 14층에 들어갈 사람들 사이에서 ‘샤샤도 올지 안 올지 명확하지 않은데 어떻게 들어가!’와 같은 반발이 터져 나올 것만 제외하면 괜찮았다.
똑똑―
저 새끼는 도대체 무슨 헛수작이냐며 데아가 눈을 부라릴 때, 주군 레이더라도 있는 건지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백리서가 들어왔다.
“여기서 무슨… 어.”
“백리서 헌터님!”
세연과 연가을, 배협이 반가워서 동동 뛰었다. 그러나 백리서는 그들을 무시한 채 시선을 데아에게 고정하고 눈썹을 내렸다.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조용히 좀 해봐…….’
결국 상황을 파악한 백리서가 샤샤에게 확실히 이야기를 전달해 주겠다는 말을 해주고 나서야 양철민의 불안은 가라앉았다.
“자. 그럼 전 이만.”
권도언이 흥흥거리며 쏜살같이 밖으로 빠져나갔다.
괜한 불길한 예감에 데아 또한 뒷문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행동을 실행하기도 전에 데아는 백리서에게 손목을 턱! 잡혔다.
“잠시 볼까요?”
아, 미치겠다.
데아는 남은 이들에게 먼저 돌아가 있으라고 말을 하고는 질질 끌려갔다.
“가지 마세요.”
벌써부터 본론이라니.
“이미 샤샤 헌터가 갈 거라고 말을 했잖아?”
“예기치 못한 상황은 언제든지 생기는 거니까요.”
인간들과의 약속이 뭐 그리 중요하냐며 묻는 얼굴이 너무 청렴결백해 보여 할 말을 잊었다.
“너도 와도 돼.”
“저는 빠지겠습니다.”
어, 웬일로?
백리서는 주변을 살피곤 속삭였다.
“칸나니아 측의 행동이 심상치 않아요. 연구소 투자자금을 마지막인 것처럼 몰아 쓰는 것도 그렇고, 주변 경계를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와 권도언에게도 감시역이 붙었는데… 뭐, 떨쳐내려면 떨쳐낼 수 있지만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냥 두는 게 더 방심시킬 수 있어서……. 하지만 포세이돈, 특히 주군과 접촉했다간 같이 몰릴 수 있어요.”
“의외네.”
데아는 악의 없이 물었다.
“네가 그런 신중한 고민도 하고.”
백리서의 방식은 거침없다. 그런데 이런 고민이라니.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
“네.”
백리서는 씩 웃었다.
“그래도 안전하게 다녀오세요.”
거칠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태초를 막은 적이 없었다. 태초의 업적을 칭송하고 따랐으면 따랐지. 그래서 데아는 그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넌 나를 안 막을 거지?”
“네?”
“아냐. 그냥 말해 봤어.”
◈ ◈ ◈
데아는 여파 안에 있는 스크롤과 포션을 턴 다음, 밖으로 나가 선발대원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다시 모여 밤새도록 계획을 짰고, 낮 시간동안 내내 잔 다음에 해가 떨어지는 저녁쯤에 하나둘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일어나. 시간이야.”
가장 경계가 느슨해지는 시간. 새벽 한두 시.
“운이 좋아. 포세이돈 14층의 게이트는 하나야.”
헌터들은 백리서가 따로 부른 버스를 타서 이동했다.
“가서 해야 할 일은 다 기억하지?”
“그럼.”
가서 해야 할 일은 네 가지.
1. 샤샤를 만나기.
2. 샤샤의 안내에 따라 ‘진짜 인어’를 만나기.
3. ‘진짜 인어’가 포세이돈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 확인하기.
4. 인어들이 포세이돈에게 적대적이라면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협력 구하기.
“만약 부정적이라면 어떡해요?”
“그건… 가서 생각해 봐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연가을이 중얼거렸다.
끼익, 버스가 멈추고, 모두가 나누어 내려 포세이돈 주변에 숨었다. 예상대로 경계는 느슨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삼엄했다.
그때였다.
콰앙―!!
“??”
“뭐야?!”
저 멀리서 굉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당연히 데아가 계획한 불꽃이었다.
우리 윌로… 시간 맞춰 잘 터뜨렸네.
“침입자다!!”
“침입자야!”
초보적인 방식이었지만 이런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는 의외로 잘 통했다.
데아는 곧바로 손짓했다.
“지금, 이때 들어가요!”
흩어져 숨어 있던 헌터들이 우르르 포세이돈 안으로 쳐들어갔다.
뒷일은 모르고 무작정 달려 도착한 곳은 14층.
“누구냐!!”
“잡아라, 크악!”
당연히 그들을 저지하는 헌터 또한 있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한 헌터들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허억, 두건이 답답해.”
“참아. 얼굴 팔리고 싶어?”
강도처럼 두건을 쓴 90명이 훌쩍 넘는 괴한들.
데아는 그들과 함께 손쉽게 게이트 앞에 섰다.
“지금 바로 넘어요!”
데아를 선두로 사람들이 넘어갔다.
[포세이돈 14층 진입.]
[보스 인어 ‘기이한 세상의 방랑자’(S)를 사냥하십시오.]
‘기이한 세상의 방랑자…….’
13층의 보스 인어는 꽤나 강한 인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까먹었지만 오래되고 깊은 늪 아래에서 똬리를 틀고 유유자적 여생을 즐기던 2세대 인어였다. 등급은 AA.
“머리카락이 붉은색인 걸 보아하니 움의 자유분방한 권속 중 하나인가 보지?”
―하하. 그럼요.
그는 한 번에 데아를 알아보았다.
이전 보스 인어와 달리 제정신이어서 데아는 매우 놀라워했었다.
“왜 넌 그대로지?”
―아, 그러고 보니 칸나니아 님이 왔었지요. 예전과 다른 몰골이었지만…….
보스 인어는 칸나니아가 억지로 자신에게 뭘 하려고 했지만 가까스로 도망쳤다 실토했다. 그리고 거기서 데아는 힌트를 얻었다.
‘아직 포세이돈은 13층을 보여 줄 준비가 덜 되었던 거야.’
시스템화되었던 던전. 보스 인어로 점찍어 둔 인어들이 있기는 했는데, 그 인어들을 변하게 만드는 속도보다 데아가 클리어하는 시간이 훨씬 빨랐기에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뭐, 상관없었다. 데아에겐 희소식이었으므로.
그래서 데아는 14층 안에 들어서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14층의 보스 인어 또한 아직 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가 내가 아는 인어일지도 모른다고.
13층의 보스 인어는 AA등급. 2세대 인어.
14층의 보스 인어는 S등급. 그렇다면…….
‘1세대 인어인가……?’
기이한 세상의 방랑자…….
‘그럼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