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천장이 뚫린 백화점. 아슬하게 매달린 별이 보이지 않는 서울의 밤. 인간계의 하늘과 제국의 하늘은 꽤 달랐다.
그런데.
띠리리리― 띠리리―
적막을 찢는 벨 소리에 하나둘 헌터들이 이상 현상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는 거야?”
“파란 헌터님!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한지 헌터가 화장실에 없어서… 전화를 했는데 전화도 안 받네요.”
뚜루루, 뚜루루 전화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네 번, 다섯 번.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행동. 그건.
“해룡.”
해룡은 내 신호를 알아듣고 빠르게 헤엄쳤다. 으아악!! 사람들이 해룡을 피하기 위해 우수수 넘어지고, 거친 소음이 솟았다. 더한 소음과 소란. 그 틈을 타서 데아는 피파글랜 뒤에 숨어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쿠르릉―!!
때에 맞춰 비가 내렸다. 잠깐, 비?
분명 일기 예보는 맑음이었잖아.
데아는 서둘러 오고 있는 전화부터 거절했다. 그리고 바로 전원을 끄려고 하는데 지치지도 않고 또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의 발신인은 석파란이었다.
“하아…….”
이번에도 거절하고 휴대폰 전원을 끄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도로 뒤를 돌아 소매를 휘둘렀다. 약간의 해프닝은 해프닝답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려한 피날레가 필요하지.
“좋은 구경이었어. 다음번에 또 볼 수 있기를 소망하지.”
데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모른 척하고, 끝까지 가오를 지켰다.
데아에게 가까이 온 해룡과 그의 손을 받들어 모시는 제왕 피파글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단 하나의 신. 모든 헌터들은 그 광경을 각인처럼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번쩍―!
“!!”
쿠르릉―!! 쾅―!!
유리창과 실내를 아프게 두드리는 빗줄기 사이로 강렬한 낙뢰가 들이닥쳤다.
“뭐야!!”
소나기와 함께 찾아온 갑작스러운 낙뢰에 사람들은 질겁했고, 동시에 고요하게 서있는 태초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저, 저 태초의 짓이다!”
“젠장, 무슨 능력이……!”
이길 수 있나?
아니. 이길 수 없다.
날씨와 번개를 조종하는 이에게 어떤 반발이 통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 누구보다 당황한 건 바로 데아 본인이었다.
나 아냐!!
쿠르릉―!!
설상가상으로 또 한 번 낙뢰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간신히 남아 있던 비상 조명마저 푸슉, 단번에 꺼져버렸다.
―분위기 끝장나네.
―와, 역시 우리 데아, 아, 아니지. 태초 님.
―태초 님 한번만 더 해주시면 안 되나요? 집 가서 자랑하고 싶어요.
인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호위 기사들(다 아는 얼굴)만 신나게 입을 털었다.
“나 아냐.”
데아는 빠르게 속삭였다.
―어우 알죠. 그럼.
“아니 진짜라고.”
―안다니까요.
가장 깝죽거리는 건 유리였다.
―원래 이렇게 오해받는 상황에서는 구경꾼이 제일 재밌는 법이에요.
데아는 피파글랜을 돌아보았다.
‘너냐?’
피파글랜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니랍니다.”
“그럼 누구……! 아…….”
저 멀리 데아를 향해 환하게 웃는 사람이 있었다.
은밀하게 눈을 접어 웃는 새하얀 남자. 권도언.
“…….”
쟤는 도대체 뭐가 문제…….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겁은 먹을수록 좋으니까. 덕분에 능력 하나 안 쓰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지 않은가?
‘이렇게 겁을 먹어 줬을 때 퇴장하는 게 가장 좋지.’
“가자.”
데아는 모두를 대동하고 퇴장했다. 파랗게 질린 사람들과 아수라장이 된 백화점을 남겨 두고.
◈ ◈ ◈
약속 하나. 절대로 능력을 쓰지 말 것.
약속 둘. 몸에 이상 현상이 더 발생했을 시 바로바로 와서 알릴 것.
데아는 직접 게이트를 열어 주는 피파글랜에게 두 약속을 열창했다.
“알았어. 지킬게!”
“정말이에요.”
게이트를 넘자 본인이 들어갔던 화장실이 나왔다.
“아니, 여기인 줄은 어떻게 안 거야?”
데아는 조심스럽게 칸에서 나와 거울을 봤다. 다행히 멀리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는 건물 붕괴의 여파가 크게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이것도 시간문제겠지만.
“앞모습, 괜찮고, 뒷모습, 좋아…….”
다시 설한지로 돌아온 데아는 일부러 숨을 헐떡이며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대피하는 사람들이 잔뜩이었다.
“여, 여기 천장 왜 이래요?”
“뭐야! 비켜!”
이 새끼가…….
“한지야!!”
그때 석파란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너 화장실에서 나온 거야? 분명 화장실에 없다고 했는데―!”
“아…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멀리 떨어져 있었어요. 다들 무사하신 거죠?”
“어, 어어. 맞아 다 무사해. 그보다 네가 없던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아?”
석파란은 아쉬워서 죽을 것 같은 얼굴로 탄식했다. 물론 목소리는 개미만큼 작았지만.
“넌 들으면… 정말 놀랄 걸. 내가 하… 진짜…….”
“무, 무슨 일인데요?”
예상은 갔지만 물어보았다.
석파란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중대 발표하는 것 마냥 무게를 잡았다.
“잘 들어. 태초가 왔었어.”
“오, 오오……!”
“나는… 다가갈 수가 없었어. 손을 한 번 이렇게 하니까…….”
석파란이 손을 까닥였다.
“그냥 쉽게 건물을 뜯어서 날리고, 용을 소환해서 주변을 다 쓸어버리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와 소름이 돋았어.”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상급 헌터나, 강한 인어나. 암튼 그런 상위의 존재에게는 강한 마력 파동이 느껴지잖아.”
“어… 그래?”
“범접할 수가 없더라니까. 솔직히 인어와 대화를 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기회였는데… 도저히 그 이상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어.”
“어쩔 수 없죠.”
“말이라도 고맙다.”
“한지 헌터! 여기 계셨군요!”
그때 규진이 왔고, 데아는 우르르 대피하는 사람들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우선 나가요.”
◈ ◈ ◈
“이번 일로 인해 설계도 도면 일부가 타버려서…….”
“멍청……! 아, 아니다. 아니야.”
정소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헌터 홀에 태초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도 예상 밖의 일인데, 그 틈에 누군가가 MBL 연구소 안으로 침입을 했다.
그 침입자는 능청스럽게 연구소 안을 활보하며 이것저것 뒤집었고…….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 그게, 네…….”
기세등등하게 나타난 침입자에게 대적할 만한 연구원은 아무도 없었다. 연구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바빴고, 남아 있던 헌터 가드들은 단숨에 당해버렸다.
“설계도를 가져와 봐.”
심지어 침입자는 도주할 때 폭탄까지 터뜨렸다. 그러나 설계도 조금 탄 것 정도는 큰 손실이 아니었다.
“다 백업했잖아?”
“그, 그게…….”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왜 그래.”
“그 파일도 전부…….그래도 모체는 멀쩡합니다!”
“뭐? 지금 그게 문제야?”
병기의 설계도는 극비다. 먼 과거의 유물을 다시 캐온 그 극비는 소수의 수뇌부의 손만 거쳐 소중하게 보관되었는데, 사본이며, 백업해 놓은 모든 파일이 날아간 것이다.
“불가능해!”
“죄, 죄송합니다. 해당, 해당 설계도 파일만 지워져 있었습니다. 저도 이게 어찌된 일인지……!”
그렇다면 빠르게 대안책을 생각해 내야 했다.
“내 말 잘 들어.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돼.”
여기은의 비웃음? 그건 문제가 안 됐다. 중요한 건 투자가 끊기면 안 된다는 것.
“누가 이 사실을 또 알고 있지?”
“저와, 담당자들과, 연구 소장님…….”
“다 입단속시켜.”
안 좋은 일로 매스컴을 탈 수는 없어. 언젠가 나를 보고 찾아올 가족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으니까.
◈ ◈ ◈
“그래. 이 길드 통합 팀에 어설프게 강한 애들만 모아 놓은 이유가 있었어.”
“아, 뼈 때리지 마.”
섬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겉으로는 미발굴된 인재들을 키우자! 였지만 사실 나중에 일이 수틀려도 우리가 제압하기 쉬울 정도의 힘을 가진 놈들만 모아 둔 거였다고.”
물론 거기에 백리서가 낀 건 정말 의외의 상황이었겠지!
데아는 이불 속에서 꼬물꼬물 움직였다.
섬 사람들은 그 일 이후로 극심한 트라우마에 휘둘리고 있었다.
밤과 새벽에 자다가 깨서 후다닥 밖으로 나가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는 건 예사고, 혼자 자기 무섭다며 우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다 같이 불침번을 돌며 강당에 이불을 끌고 나와 잤다.
“그래도 다행인 건…….”
사람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샤샤 헌터가 우리의 현실을 알렸다는 거야……!”
밖으로 나갔다 온 연가을과 석파란, 그리고 규진은 빵빵한 와이파이의 수혜 속에서 기어코 커뮤니티 헌팅의 핫 이슈를 보고야 말았다. ‘진짜샤샤’가 올린 그 동영상을.
“정말 우리의 편이었어!”
“샤샤 헌터가 우리를 돕고 있다고!”
사람들은 들떠 소리쳤다.
“그나저나 오늘 불침번은 누구야?”
“A구역은 설한지 헌터와 세연 헌터요!!”
“아, 나였어?”
데아는 끙차 이불 밖으로 나왔다. 데아는 손전등과 확성기를 받아들고 어기적어기적 밖으로 나왔다.
“뭐야, 너네도 불침번이냐?”
배협과 양철민은 B구역의 불침번이었다.
데아는 그들을 무시하고 세연과 함께 해변을 걸었다. 주변이 고요했다.
“대충대충 해. 어차피 내가 있는 이상 기척을 놓칠 리가 없어.”
“어, 아? 그렇구나.”
첫 불침번이었던 세연은 그제야 긴장을 놓았다.
데아는 문득 이렇게 둘만 있는 게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잘래? 내가 돌게.”
“아냐. 나 잠도 안 오고…….”
세연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데아는 참방참방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위험해!”
물론 그 말 직후 세연은 입을 쏙 가렸다. 데아는 피식 웃고는 파도 속에 손을 넣었다.
“이것 봐. 세연아.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게.”
밤바다 아래에는 새벽이 잠들어 있었다. 데아는 그 창백한 시간을 휘저었다. 파도가 일렁이다가 뒤로 나선형을 그으며 치솟았다.
“와아……!”
바다에서 분리되어 나온 물줄기는 그대로 뭉쳐서 뱀이, 용이, 그리고 새가 되어 날아 세연의 어깨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세연은 놀랐을지언정 기겁하지 않았다. 역시.
“세연아. 어디까지 알고 있어?”
우뚝, 새의 얼굴을 쓰다듬던 세연의 손이 굳었다.
“언제부터 정신을 차리고 있었어?”
“…….”
“내가 널 데리고 물속에 들어갔을 때?”
데아가 말하는 때가 언제인지 세연은 단번에 눈치챘다.
4차 동굴 던전. 그 안에서 자신이 정신을 잃었을 때다.
고개를 들자 ‘설한지’는 빙글 웃으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세연은 문득,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