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건물의 천장이 콰앙―! 폭발하며 조명이 도로 꺼졌다. 간신히 남아 있는 비상 조명만 벽에 붙어 흔들거렸다.
‘또, 또라이 아냐!’
석파란은 질겁했다.
이곳을 새롭게 꾸며 준다는 의미가 그거였냐?! 이 백화점의 천장을 뚫어버리는 거?!
천장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다 못해 아득해져서 밤하늘의 별까지 보이긴 했다. 예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건 좋긴 한데… 문제는 구급차 소리와 사이렌 소리까지 들려왔다는 것이다.
“흐아아악! 도망쳐!”
“도망치지 마!! 상대는 고작 인어 몇 마리다! 여긴 바다도 아니야!”
“그래!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헌터 아닌가?! 맞서 싸워!”
석파란은 기겁을 하고 도망가던 사람들이 우뚝 굳는 모습을, 결의를 다지며 무기를 잡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규, 규진 헌터, 어떡하죠? 우리도 싸워야 하나요……?”
“네? 저희는 상급 헌터도 아닌데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섬 사람들이 살기 위해 꾀했던 방법 중 하나. 인어와 접선해서 도움을 요청할 것.
가장 상위의 인어가 지금 이곳에 있었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여기은과 대화를 한다는 목표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건 기회라고요……!”
“그건 그래요……! 그런데 여기서 대화를 청, 청하자고요……?”
규진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고개를 저었다.
“여긴 너무 위험해요. 저희가 어떻게 보이겠어요?!”
“그건 그래요… 그러니까, 어?”
그때 석파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저 제왕이라는 인어. SS급 던전의 보스 인어로 나왔던 인어가 나를 본 것 같은데, 착각인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인어도 우리의 상황을 알고 있는 걸까?
그래, 한지의 말 대로 샤샤 헌터가 인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게 진실이라면, 이미 다 전해 들었을지도 몰라.
“잠깐, 지금 한지 어디 갔어?”
“화, 화장실에 가신다고 했는데…….”
“지금 건물이 이 꼴이 됐는데? 어디 갇힌 거 아니야? 안 되겠어. 당장 데리러 가야겠어…….”
그때였다.
SS급 던전의 보스 인어, 피파글랜이 다시금 석파란을 보며 씩 웃었다. 비웃음 같기도, 긍정의 미소 같기도 했다.
어, 석파란은 말을 걸어 보기로 결심했다.
“규진 헌터. 지금 한지 데리러 가세요.”
“네? 화장실에요? 저 남자인데요?!”
“건물이 무너졌는데 그게 중요할까요? 어디 깔렸으면 어떡해요?”
“파란 헌터님은 뭐 하시고요!”
“저는 저 인어와 말을 하러 갈게요.”
“네……?”
“한지를 데리러 가는 게 싫다면 저와 역할을 바꿔도 좋아요.”
규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가, 가겠습니다. 가고말고요…….”
석파란은 그 길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인어란 무엇인가?”
훤히 뚫린 천장에서는 건물의 잔해가 투둑 투둑 떨어지고, 온갖 먼지가 들이닥쳤다. 그러나 태초는 그 속에서도 더럽혀지지 않은 유일한 한 인어이었다.
“인어는 바다를 가르고,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
“음…….”
데아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예전에 본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등장할 때 이것과 비슷한 말을 하던데, 여긴 흥겨운 음악이 없으니 썩 별로였다.
“해룡. 밑으로.”
―그래.
데아는 해룡이 고개를 숙이자 바로 인어화를 풀고 두 다리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머, 멈춰라!”
데아의 앞으로 덜덜 떨리는 검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데아는 능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
“으아악! 으악!”
와장창!!
해룡이 이빨을 드러내며 와락 달려든 것이다.
해룡은 헌터의 검을 으스러뜨리고 그대로 헌터를 짓밟았다. 데아가 손을 들자 해룡은 다시 데아의 옆으로 다가왔고,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어 허겁지겁 헌터를 끌어냈다.
“어, 어떡해? 살아 있어?”
“그냥 기절한 것뿐이야. 저, 잔악한……!”
데아는 그제야 주변의 상황을 똑바로 보았다. 저 멀리 입을 가리고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차현, 탐나는 다이아 광산을 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권도언, 그리고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는 규진 헌터와 피파글랜에게 간신히 가고 있는 석파란이 보였다.
왜 가는 거지? 뭐, 피파글랜이 알아서 잘 하겠지만.
타악!
“아이템?”
데아는 어깨를 펴고, 턱을 여유롭게 치켜들었다. 거침없이 내딛는 발걸음에는 낭비가 없었다.
“이 아이템의 효능이 뭐지?”
데아는 꽤나 흥미롭게 생긴 아이템을 집어 들고 물었다. 그러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백화점 직원 한 명이 떠밀리듯 나섰다.
“그, 그건 ‘검은 진주의 눈물’이라는 방어계 상급 아이템으로, 대부분의 인어들에게 효, 효능이 있습니다. 5초 동안 모든 공격을 무효화해 주며, 동시에 인어들을 제압하는…….”
“음…….”
데아는 스스로에게 실험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
“별로네.”
땡그랑!
데아는 아이템을 등 뒤로 냅다 던지고 새로운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사람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건?”
“그, 그건 ‘새벽달의 하루’라는 아, 아이템으로, 공격 버프 증가 12%의 효능이…….”
“12%? 이것도 별로로군.”
땡그랑!!
데아는 그 옆 매장으로 건너갔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기겁하며 부랴부랴 나왔다. 주변 헌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 다급했지만 헌터들은 지켜보기만 할 뿐 누구 한 명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하지. 권도언이랑 차현이이 가만히 있는데 누가 나서겠어.’
여기은이 온갖 난리를 피우며 나서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여기은은 저 멀리서 바쁘게 전화 통화만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네?”
저 멀리 권도언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데아는 이왕 온 김에 본전을 찾기로 했다.
“이곳의 총책임자는 누구지?”
본전이란 바로 인간들끼리 이루어지는 분열이었다.
“아, 저기 있군.”
리본을 잘랐던 주최자의 얼굴이 흙색으로 물들었다.
데아는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던 곳에서 척 봐도 포션처럼 생긴 유리병을 꺼냈다. 딸기 맛, 포도 맛, 복숭아 맛… 오, 이거 맛있겠는데.
“큰 건 아니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말이야.”
“네, 예? 아니 그게 무슨…….”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이렇게 대놓고 나를 도와줄지는 몰랐어. 그대의 도움이 커.”
물론 나도 그 도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마워! 주최자는 거의 혼절 직전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나,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주최자는 손을 미친 듯이 흔들며 부정했지만 이미 주변은 혼란과 불신을 품고 일렁였다.
“아, 그렇지. 우리 여례 헌터께서 많은 설득을 하셨던 모양인데.”
불똥이 여기은에게 튀었다. 여기은의 손등 위로 핏줄이 뿌드득 불거졌다.
“지금 뭐라고…….”
“지난번, 경매에서 나에게 이곳의 주소를 알려 주었잖아.”
“무슨 헛소리야!!”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했으니 모두 그대의 덕이지.”
그리고 데아는 똑, 포션병을 따서 피파글랜에게 주었다.
마셔 봐.
냄새가 별로예요. 주군.
둘이 소곤소곤 속삭이는 걸 못 봤는지 여기은은 여전히 펄펄 뛰고 있었다.
사실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간파하기 쉬운 얄팍한 함정이었다.
정말 둘이 협업 관계라면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왜 아는 척을 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사건은 여기은의 냉정에 또다시 금을 가게 하겠지. 그거면 충분했다.
또 기자들의 카메라는 망가뜨리면 그만이지만 사람의 귀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철저히 부정해도 결국 소문은 은밀하게 퍼져 불신의 새싹을 틔울 것이다. 그거라면 본전은 충분히 남았다.
쿵쾅, 쿵쾅, 쾅쾅!!
“여기냐!!”
“태초가 왔다! 당장 잡아라!”
밖이 시끄러워졌다. 부리나케 달려온 경찰 인력들과 지원된 헌터들이 드디어 올라온 모양이었다.
“벌써 손님이 오셨네. 내가 매일 제국에 있다 보니 가끔 이런 인간계의 열정이 그리워지곤 해. 이런 나들이도 나쁘지 않군.”
“주군. 그러면 종종 모시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피파글랜.”
데아는 능청스럽게 휙 몸을 돌렸다. 피파글랜이 데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주군과 같이 온 인간에 저에게 왔었습니다. 인파에 휩쓸려 말을 걸진 못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어요. 우선 알려 드립니다.’
‘알았어.’
데아는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저 멀리 황망하게 서있는 석파란이 보였다. 석파란이 다급하게 팔을 휘저었지만 가로막고 있는 인파는 엄청났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마침 저 멀리서 백리서가 훌쩍 뛰어 나타났다. 그가 손으로 사인을 보낸다.
완료. 연구실도 완료.
“여기까지.”
모든 것이 성공적이다. 이젠 철수할 시간이었다. 데아는 여기은에게 바싹 다가가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나를 위해 수고해 준 그대에게 소소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
“꺼져!”
휘이익!! 여기은이 들입다 데아를 공격했지만 고개를 까닥하는 것으로 피했다.
“그대와 어울리는 아이템이지.”
아이템은 무슨, 해변에서 그냥 주운 소라껍데기였다.
여기은은 받자마자 뿌드득 소라를 으스러뜨렸지만 상관없었다.
“여전히 차갑군.”
여전히? 물론 근본 없는 능청이었다. 주변인들이 여기은을 미묘하게 쳐다보았다.
“아냐, 아냐!”
“흐음…….”
보상까지 주고나자 정말 일이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임무 클리어. 턱, 턱, 포션병을 던지고 받으며 확 뒤를 돈 순간이었다.
“이제 돌아갈까?”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 순간 울린 진동이 아니었다면.
우우웅― 우우웅―
우뚝, 처음 데아는 이 소리가 뭔지 알지 못했다.
꽤나 큰 진동 소리. 주변에 있던 헌터들마저 ‘이게 무슨 소리야?’ 할 정도로 낮고 깊게 울리는 진동은 소란 속에서도 은은하게 들려왔다.
우우웅― 우웅― 띠리리리리―
몇 번의 진동 끝에 들리는 휴대폰의 기본 벨 소리. 잠깐, 이거…….
“주군.”
피파글랜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데아는 보았다. 저 멀리서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고 있는 규진 헌터가.
“설한지 헌터님은 어디에 가신 거야?”
그가 전화를 걸고 있는 상대는 바로 자신이었다. 벨 소리는 바로 자신의 품 안에서 들리고 있었고.
“……!”
온 몸에서 피가 빠져나는 착각이 들었다.